▲ 지난 2월25일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동교동 집 앞에서 퇴임행사를 가졌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 비밀문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재직시절 통치와 관련된 기밀사항이 담긴 문건으로, 현행법상 향후 30년 동안 일반인에게 공개될 수 없는 것이다. 현행법상 대통령이 퇴임하면 이 비밀문서는 정부기록보존소로 넘겨져야 한다.
당초 통치사료 비서관실에서 분류한 이관 목록 건수는 15만8천2백32건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확인 결과 김 전 대통령이 퇴임하기 직전인 지난 2월19일 정부기록보존소에 넘겨진 통치사료 문서수는 13만5천여 점. 원래 넘기려던 자료에서 2만3천여 건이 빠진 것이다.
게다가 이번 통치사료 이관 문제를 놓고 김대중 정권측과 정부기록보존소 간에 적지 않은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져 또다른 의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항간에는 통치사료 문건 중 사라진 일부의 행방과 사라진 문건에 담긴 내용, 그리고 사료이관을 두고 왜 갈등을 겪었는지 등에 대해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청와대에서는 통치사료에 대한 이관 작업을 준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관 작업은 사료들 중 공개와 비공개 여부를 구분하는 것과 사안의 중요성에 따라 비밀 1·2·3급을 결정짓는 것 등이 핵심. 이 과정에서 비밀문건에 대한 처리 향방을 놓고 상당한 논의가 거듭되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11월은 대선 정국이 절정에 달할 때였다. 현대상선 4천억원 대북 지원설 등 김대중 정권의 7대 의혹이 야당에 의해 불거지기도 했다. 이즈음 아태평화재단을 연세대학교에 기증키로 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리고 그 내부에 김대중 도서관을 개설하고 관련 서적 및 자료들을 소장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도 들렸다. 이를 두고 야당측 의원들은 “민감한 사료들을 빼돌리기 위한 제스처가 아니냐”며 김대중 도서관 건립계획에 의혹을 제기했다.
이 같은 의혹은 그러나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대선 승리로 일순간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했다. 김 전 대통령측은 “정부기록보존소에 모든 통치사료들을 다 이관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이관 목록에는 정작 중요한 비밀문건이 모두 빠진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문제점을 밝혀낸 것은 오항녕 국가기록연구원 연구부장과 김익한 명지대 교수 등 학계 인사들의 꾸준한 감시에 따른 결과였다.
이들은 김대중 정권이 넘긴 이관 목록 자료 대부분이 대통령의 일정 및 행사 계획표, 연설초고, 외교활동 자료 등 이미 언론 보도에 의해 공개되었거나, 공개되어도 상관없는 비망록 등에 그친 것을 확인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김대중 정권측에서는 뒤늦게 비밀기록을 포함한 모든 자료를 새 정부측에 넘기겠다며 진화 작업에 나섰다.
새 정부의 탄생을 닷새 앞둔 지난달 20일. 대구 지하철 대참사로 전국이 떠들썩한 상황에서 대전 정부청사로 김 전대통령의 통치사료 13만5천여 점이 전달됐다. 이때 비밀문건 목록도 함께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 지난 2월25일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김대중 전 대통령. | ||
그러나 비밀문건의 행방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자 “여기엔 없다. 청와대에 남아 있다”고 밝혔다. 즉 비밀문건은 보존소에 넘기지 않고 청와대에 그대로 있을 것이라는 얘기.
그러나 이 자료들이 청와대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정부기록보존소 관계자들 역시 “청와대에 있을 것”이란 추정만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부기록보존소측은 비밀문건 목록에 대해서도 함구로 일관하고 있다. 법적으로 목록 내용도 절대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의 민감한 분위기 탓인지 “그 내용에 대해서는 청와대에 직접 문의해 보라”고만 답변하고 있다.
안봉모 청와대 국정기록비서관은 “원칙적으로 청와대 수석급 이상만 언론과 인터뷰를 할 수 있다”며 즉답을 피하고 대신 “대변인실을 통해 질문해달라”고 밝혔다. 그러나 청와대 대변인 관계자는 “아직 시스템 정비가 안되었기 때문에 지금 질의를 받을 수 없으니 좀더 기다려달라”고 답변했다.
만약 김 전 대통령의 통치사료가 청와대에 그대로 있다면, 이 부분은 일단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 그러나 절차상 의혹을 남길 소지가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의견이다.
김대중 정부에 의해 제정된 ‘공공기관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령’에 의하면 퇴임하는 정부에 의해 제출된 통치사료 목록을 새 정부는 정부기록보존소의 협조로 열람할 수 있으며, 새 정부에서도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자료에 한해서는 정부기록보존소로부터 관련 자료를 넘겨받도록 되어 있다는 것. 따라서 법적시비를 삼긴 힘들지만, 절차상 비밀문건은 새 정부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넘겨받는 형식을 밟아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측이 비공개로 결정된 문건임에도 굳이 정부기록보존소에 비밀문서 중 일부를 넘기지 않은 데에는 이 기관에 대한 불신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언이다.
국가의 근간을 뒤흔들 수도 있는 기밀 사항을 함부로 맡길 수 없다는 점이 그것. 지난 2월 초 학계에서 “비밀문건 목록을 넘기지 않았다”고 문제를 제기한 것도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정보를 흘린 것으로 김 전 대통령측은 판단하고 있다.
학계 관계자에 의하면 “김대중 정권에서 인수인계 작업시 비밀문건은 국가 기밀 사항이기 때문에 목록조차도 넘겨선 안된다는 입장을 정한 것으로 들었다”고 귀띔했다. 자신이 세운 법안을 시행 첫 사례부터 스스로 어기고자 한 셈.
이에 대해 정부기록보존소 관계자는 “국회에서 청문회 등을 이유로 의원들이 비공개 자료를 요구할 경우 이를 우리 기관이 거부할 수가 없다는 점을 고려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국회의원이 여론을 등에 업고 비공개 자료를 요구할 경우 상당히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는 만큼 대통령 통치사료의 경우에는 일정기간 동안 공개를 절대 불허하는 내용으로 법령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설득력이 떨어져 보인다. 오항녕 연구부장은 “국회에서 증언 감정을 이유로 자료를 요구할 경우, 설사 그 자료가 정부기록보존소가 아니라 청와대에 있다 하더라도 자료를 넘겨줘야 한다”고 밝혔다.
또다른 관계자는 “정작 중요한 이유는 정권의 존립 자체를 흔들 수도 있는 중요한 자료들을 행자부 산하의 기관에 맡긴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있지 않았겠느냐”고 추측했다.
일례로 박정희 정권에 의해 작성된 천도계획 프로젝트가 비밀공개 시한을 7년이나 앞당겨 지난 1월 전격 공개된 것 역시 노무현 새 정부의 행정수도 이전계획 붐에 편승한 정부기록보존소측의 홍보성 언론플레이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학계에서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새 정부, 그리고 정부기록보존소 3자가 모두 ‘국가기밀’임을 내세워 입을 다문다면 현실적으로 모든 통치사료가 제대로 다 이관되었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다”고 의문을 표시했다.
취재 결과 정부기록보존소에 넘겨지지 않은 2만3천여 건의 문건에 담긴 주요 내용은 김대중 정부 시절 있었던 많은 사건과 관련된 내용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북지원과 관련된 서류와 남북정상회담의 회담록, 99년 6월의 서해교전 사태, 2000년 언론사 세무조사와 의약분업 사태, 정권초기의 대기업 빅딜과 대우그룹 도산 등과 관련된 문건일 것이라는 추측. 특히 이들 사안과 관련해 관계부처의 보고서와 대통령의 결재 서류 등이 이 문건에 포함돼 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추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