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두관 신임 행자부 장관 사진=임준선 기자 | ||
하지만 자신의 태를 묻은 마을에서 이장을 지낸 그 사람은 주민들이 뽑는 군수가 됐다. 전국 최연소(당시 37세) 군수였다. 주민들은 그를 한번 더 뽑아주었고 그는 7년간 군수를 지냈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 행정자치부 장관이 됐다. 인구 6만명에 6백여 명의 공무원을 거느린 수장에서 5천만 명의 인구에 16개 광역자치단체와 2백32개 기초자치단체에 수십만 명의 공무원을 거느린 대한민국 정부의 내무 행정을 책임지는 수장 자리에 오른 것.
김두관. 대한민국 학부모들이 그렇게 보내고 싶어하는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오지도 못했다. ‘입으로는 욕하면서도 내심으론 다니고 싶어하는’ 재벌 회사에서 일한 적도 없다. 시험봐서 되는 공무원 경력도 없다. 모언론사에서 나오는 시사월간지 외판원 경력이 돈받고 사회생활한 이력의 전부다. 이렇듯 우리 사회의 주변부 인생중의 주변부라고 할 수 있는 그는 어떻게 시골 군수에서 장관이 되었을까.
김두관 신임 행자부 장관 인생의 최대 승부처인 경남 남해를 다녀왔다. 남해는 70년대 검인정 교과서에 단골 화보로 실리던 현수교 방식의 남해대교를 빼고는 별반 알려진 게 없다. 남해대교를 건너자 남해안의 섬지역 어디서나 그렇듯 왕복 2차선 도로를 따라 줄지어 선 벚꽃나무와 올망졸망 바다위로 튀어오른 섬과 계단식 밭자락이 펼쳐졌다.
남해읍으로 들어서자 김두관 장관 취임을 축하하는 두 개의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하나는 그의 본적지이자 현 거주지이기도 한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 주민들이 붙인 것이고 또 하나는 그의 모교인 남해종합고(현 남해제일고) 동문들이 붙인 것이다.
시골집들이 그렇듯 그의 이어리 집은 대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남해안답게 문 입구에는 입이 두터운 상록수 한그루가 버티고 서있었고 마당에는 4~5년생쯤 될 법한 키작은 동백 하나가 꽃망울을 품고 있었다.
대대로 살던 집에 부엌만 입식으로 개량하고 군수가 된 뒤 손님맞이용으로 외양간 자리에 사랑채를 들인 게 전부라고 했다. 인기척을 하자 그의 노모 박봉순씨(83)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팔순을 넘은 그의 노모는 허리 하나 굽지 않고 꼿꼿했다.
장관된 아들을 축하하자 별말이 없다. 다짜고짜 묻기만 하는 외지인이 낯선 듯 아드님이 어땠냐고 하자 “두관이는 착해요”라며 말을 아꼈다.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가 나자 건넌방 문이 빠꼼이 열리며 여중생으로 보이는 소녀가 얼른 내다보고 들어갔다. 장관의 큰딸(16)이란다.
김 장관의 큰딸은 남해중학교를 나왔다. 아들도 남해중학교 학생이다. 큰딸은 이번 신학기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남해제일고 입학이 예정돼 있어 부녀 동문이 될 참이다.
▲ 김두관 장관의 남해 자택(왼쪽 사진)에서 만난 그의 어머니 박봉순 씨는 순박한 촌로답게 “두관이는 착해요”라는 말 외에 다른 특별한 소회를 털어놓지는 않았다. | ||
지난해 자치단체장 선거에서 경남도지사 선거 에 입후보하기 위해 군수직을 사퇴한 뒤 민주당에 입당한 뒤 쭉 선거전을 치렀던 것. 처음에는 자신의 선거를 위해, 그 다음에는 노무현 대통령 후보를 위해 창원에 경남지역 선거본부를 차리고 뛰었던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고 그는 서울로 갔다. 2월 초 김 장관의 입각설이 나돌 때는 해양수산부 장관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예상보다 더 큰 자리에 임명됐다. 이번 그의 행자부 장관 임명을 놓고 법무부의 강금실 장관과 함께 노무현 1기 내각의 하이라이트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시골 군수가 장관이 됐으니 고향 사람들도 기대가 큰 듯했다. 남해에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 이에 동의하는 듯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그가 만든 남해신문 관계자나 그의 보좌관 출신들, 거리에서 만난 상인들도 모두 그가 남해군수 시절 “잘했다”고 입을 모았다.
그의 최대업적으론 스포츠파크 사업이 꼽힌다. 남해에서 만난 한 주민은 “애초 그 땅(서상매립지)은 광양제철소 들어온다고 해서 매립했던 땅”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환경 문제 등으로 반대에 직면했다가 결국 제철소는 광양에 들어섰다. 하지만 광양에 접한 남해 앞바다는 광양제철소가 들어선 이래 고기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 바다가 돼버렸다. 남해로선 제철소도 놓치고 환경도 망친 이중 손해를 본 셈.
한때 현대그룹이 남해 바로 앞 하동에 일관제철소를 짓겠다고 했을 때 김 장관은 앞장서서 반대했다. 환경을 망친다는 것이었다.
김 장관의 대안은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버려졌던 서상매립지는 김 군수 시절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천연잔디구장을 세운 것이다. 외지로 이어지는 길이라곤 고작 왕복 2차선뿐인 남해대교를 통해야 하고 스포츠 기반 시설이라고는 전무했던 곳에 스포츠파크라는 시설을 세운 것이다.
스포츠파크에 들어간 예산은 1백74억원. 이중 68억원은 군 예산으로, 나머지는 국가와 도에서 지원했다. 스포츠파크가 들어선 8만평의 서상매립지는 남해군이 2억7천만원을 들여 매입한 땅이다. 평당 3천4백원 남짓한 셈. 하지만 이곳은 스포츠파크가 들어선 뒤 평당 30만원선으로 땅값이 뛰었다. 땅값 상승이 보여주듯 스포츠파크 사업은 대성공이었다. 월드컵이 열리고 대전-진주간 고속도로 개통, 남해안 고속도로 확장 등 남해에 대한 접근성이 현저히 높아졌다.
천연잔디 구장이 들어선 뒤 대한야구위원회에서 이곳에 상설 캠프를 만들었고 민자로 호텔도 지었다. 지난 월드컵 때는 유일하게 군 단위에 월드컵 대표팀 훈련캠프(덴마크)를 유치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지난주에도 이곳에선 전국 규모의 축구대회가 열렸다. 현재 5면인 잔디구장과 관중석을 늘리는 공사도 한창이다.
이 스포츠파크를 통해 들어오는 돈이 1년에 최소 1백억원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제대로 된 농공단지 하나 없고 말만 한려수도이지 수도권이나 부산권에 알려진 변변한 관광명소 하나 없던 남해에 스포츠파크는 관광명소이자 수입원이 된 것이다.
▲ 김두관 행자부 장관이 남해군수 시절 주도적으로 추진한 시책 중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되는 스포츠파크. | ||
군수로 취임한 뒤 그는 임진왜란의 역사적 현장에 있어야 할 거북선이 한강에 가 있는 것을 보고 서울시에 보내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해군쪽에 지원을 요청했고 거북선은 임진왜란의 현장으로 돌아와 남해의 관광명소 구실을 하게 됐다. 썰렁하던 남해대교 입구도 거북선을 중심으로 음식점이 들어서는 등 제법 관광지 면모를 갖추게 됐다.
거북선 유치는 김 군수가 돈 한푼 안들이고 생각과 협상으로 이뤄낸 것이고 스포츠파크 역시 중앙정부나 도를 상대로 협상과 설득을 통해 이뤄낸 것이었다. 그러기에 남해군민들은 그의 군수시절을 “잘했다”고 평가하는 것.
그가 처음부터 이런 박수갈채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군수 취임 초기 지방 주재기자실을 폐쇄해 격렬한 파열음을 냈었다. 남해군수의 언론과의 싸움은 중앙지에 실릴 정도로 유명했었다.
취임하자마자 기자들에게 관행적으로 주던 촌지를 없애고 지방지를 사주던 예산을 없애버리자 군수 취임 뒤 6개월 동안 무려 2백건 이상의 비난기사가 지역언론을 도배하다시피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여론을 거머쥔 지역언론과의 싸움에서 밀리지 않았고 결국 지방자치 시대의 성공한 군수 모델이 됐다.
물론 모든 것이 호의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그가 군수로 취임하자마자 군청 옆의 군수관사를 헐어 민원인 주차장과 쉼터를 조성한 것이나 군수실의 한쪽 벽면을 투명 유리로 바꾼 것은 호평을 받은 한편으로 ‘전시행정 아니냐’는 뒷말을 듣기도 했다.
또 그의 군수시절 역점 사업 중의 하나인 공설공원묘지 사업은 아직도 진통을 거듭하고 있다. 남해군 군소재지에서 스포츠파크를 가다보면 바다가 보이는 왼쪽 산기슭에 대한민국의 장례법을 법 규정대로 지킨 남해군 공설공원묘지가 보인다.
문제는 이 공원묘지가 들어선 뒤 일체의 묘지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역민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왜 내땅에 무덤도 마음대로 못쓰게 하냐’는 것이다. 이곳에선 선산에 자신이 들어갈 가묘를 만들어놓는 풍습이 있었다. 김 군수는 가묘도 못쓰게 했다. 그러자 지역민들의 반응이 차가워졌다. 때문에 김 군수가 세 번째 연임에 도전했을 경우 “당선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란 의견도 없지 않았다.
남해에서 만난 박아무개씨는 김 장관 칭찬 일색의 말을 하다가 묘지 문제가 나오자 “부모님 모실려고 만들어 놓은 곳도 쓰지 말라고 하니 어떻게 되는 일인지 모르겠다”며 말끝을 흐렸다. 공원묘지 외에는 남해군 안에 일체의 묘가 새로 들어서지 못하게 한다고 못박자 생겨난 갈등이다. 최근 주민들은 가족 납골당이라도 허용해 달라는 주장을 하고 있어 이 문제의 귀추가 주목된다.
남해군 터미널 주변에서 만난 장사를 하는 30대 여성도 조심스럽게 김 장관에 대한 다른 의견을 냈다. “외지에서 김 장관이 더 유명해졌지만 여긴 꼭 그렇지도 않다”고 말했다. 인사문제 등 현지인들의 이해가 달린 문제에서 현지의 평가는 다르다는 것.
어쨌든 남해 현지에서 그는 박희태 의원(남해군), 유삼남 전 해군참모총장과 함께 남해가 낳은 3대 인물로 꼽히고 있다. 두 사람이 엘리트 코스를 거친 지도자라면 김 장관은 바닥에서부터 커간 정치인이라는 점이 다르다. 김 장관은 청년 시절 남해에서 알아주는 씨름꾼이었다고 한다. 특기는 왼배지기와 잡치기. 이 기술로 군내 씨름 2인자 자리까지 올랐다고 한다.
허리와 손을 이용하는 이 기술은 머리를 쓰지 않고서는 제대로 쓸 수 없는 기술이다. 김 장관이 정부내 최대 조직인 행자부에서 어떤 기술로 자신의 지론인 지방자치 시대의 도우미 역할론을 펼쳐나갈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