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6일 필리핀에서 검거된 ‘양은이파’ 두목 출신 조양은이 29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송환된 뒤 서울 마포 광역수사대 앞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 씨는 지난 26일 필리핀 팜팡가주 앙헬레스시의 클락 경제특구내 파콜 카지노에서 체포됐다. 현지 교민에 의하면, 조 씨를 체포하기 위해 필리핀 경찰특공대, 유엔마약범죄수사국 등 버스 3대 인원의 병력이 투입됐다고 한다. 그 전에도 여러 번 놓쳤던 터라 이번엔 더욱 보안에 신경을 쓰면서 작전을 수행했다. 슬롯머신 오락을 하던 조 씨를 특공대가 덮쳤고, 지역의 사채업자인 이 아무개 씨가 함께 있었다.
조 씨는 2010년 8월 서울 역삼동에서 유흥주점 2곳을 운영하면서 허위 담보서류를 이용해 제일저축은행에서 44억 원을 대출받아 가로챘다. 2011년엔 주가조작에 가담, 강요와 공갈 혐의로 지명수배됐다. 수사가 시작되자 그는 2011년 6월 중국을 거쳐 필리핀으로 달아났다. 현재 그는 필리핀 현지 교민과 관광객을 상대로 수억 원대의 금품을 갈취한 혐의도 받고 있다. 은행에서 사기대출 받은 44억 원은 도박과 주식으로 모두 날렸고, 결국 필리핀에서도 범죄에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관계자는 “교민들의 피해 정황이 포착됐다”며 “필리핀에서 저지른 여죄를 추가 조사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필리핀 앙헬레스에 거주하는 한 교민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교민을 괴롭혔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며 “여기는 동네가 좁아서 피해를 보면 금방 소문이 난다. 만약 누군가를 갈취했다면 마닐라에서 했을 것이다. 앙헬레스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조 씨가) 사업차 마닐라에 자주 갔다”고 귀띔했다.
조양은은 1970년대를 풍미했던 폭력조직 양은이파의 두목으로, 양은이파는 서방파, OB파와 더불어 국내 3대 폭력조직으로 군림했다. 조 씨는 전남 담양 출신으로 광주에서 성장, 18세 때부터 조직폭력배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타고난 대담함과 지력,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제압하는 방식으로 젊은 나이부터 두각을 나타내 서울지역의 지하세계를 평정했다.
조 씨는 1970년 광주를 떠나 서울로 본거지를 옮겼다. 중원은 신상사파(두목 신상현이 군 상사 출신이라서 붙은 명칭)가 차지하고 있었지만 호남 출신 폭력배들 역시 명동과 무교동을 중심으로 세를 넓혀갔다. 조 씨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75년 일어난 ‘사보이호텔 커피숍 습격사건’이었다. 1975년 1월 2일 야구방망이를 든 조양은 등 범호남파 특공대 4명이 신상사파의 본거지였던 명동 사보이호텔 커피숍을 습격한 것. 그후 신상사파는 세력이 급격히 추락했고 호남파가 그 빈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검찰은 당시 “조양은이 회칼과 쇠파이프로 무장한 채 맨주먹으로 대응하는 신상사파를 몰락시켜 이후 칼잡이 시대가 도래했다”고 밝혔으나, 조 씨는 지난 2003년 <일간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회칼을 사용하지 않았다. 검찰기록에도 칼이란 단어는 한 번도 안 나온다. 실제 동원된 인원도 10여 명뿐”이라며 자신에게 씌워진 칼잡이라는 오명을 강력하게 부인했다.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서방파 김태촌과의 악연도 이 무렵 시작됐다. 두 사람은 1960년대 말 소년원에서 처음으로 만났으며, 조 씨가 김 씨보다 두 살 어렸다. 둘의 라이벌 의식은 정치권의 김영삼-김대중 관계에 비견될 정도다. 동료 주먹이 두 사람을 화해시킨다고 마련한 자리에서 서로 품고 있던 칼을 꺼내 부딪쳤던 일화, ‘황제 수감생활’, 출소 후 기독교 신앙을 내세워 회개를 다짐했으나 결국 범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 등 둘의 인생은 여러 면에서 접점을 가진다.
1970년대 중반 김 씨는 ‘서방파’라는 이름으로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조양은도 무교동·명동 일대 다운타운호텔, 백남호텔, 조선호텔 나이트클럽 등 유흥업소를 장악해갔다. 1977년 1월 서방파는 무교동에서 조양은의 두목 오 씨를 식도로 난자해 불구로 만든다. 이로 인해 결국 오 씨가 은퇴하자 조양은은 1978년 11월 양은이파를 결성했다.
1977년 10월 김 씨가 구속됐다. 뒤이어 조양은도 1980년 구속됐다. 몰락의 전조였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 이동재의 OB파였다. 이동재는 1989년 양은이파의 공격을 받아 칼과 도끼 등으로 난자 당해 불구가 됐다. 1980년 5월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조 씨는 범죄단체 결성 혐의로 구속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5년 형으로 감형, 기나긴 수감생활에 들어갔다. 수감 당시 그는 31세에 불과했다. 이정재, 임화수 이후로 혁명재판에 회부돼 사형선고를 받은 건달은 그가 처음이었다.
수형 생활 동안 조 씨는 김두한의 후계자 조일환의 소개로 부인을 만났다. 부인 김 아무개 씨는 4개 국어를 구사하는 동시통역사였다. 옥중에서 면회를 하고 첫 눈에 반해 그 후로 1년간 편지를 주고받았다. 1995년 출소 후 6개월 만에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조용기 목사의 주례로 결혼했다. 결혼식 직전까지도 아내는 그의 과거를 전혀 모르고 옥고를 치른 운동권 학생인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조양은은 결혼 후에도 출소 1년 5개월 만인 1996년 8월, 금품 갈취를 시작으로 필로폰 밀반입 시도, 조직원 살해 지시, 해외 원정도박, 청부 폭력 등으로 여러 차례 수감됐다. 그동안 무려 7차례, 19년 4개월간 자유가 억압된 어둠 속에서 수감생활을 지속해왔다.
한편 필리핀에서 검거된 조양은은 29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송환,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수사대 사무실로 압송되면서 대출 사기 혐의와 해외 도피에 대해 전면 부인했다. 조양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도피가 아니라 처음에는 경찰 수사를 모르고 나갔다. 어수선하기에 잠깐 밖에 있었다가 카지노 사업을 하게 됐다”며 억울하다는 입장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상미 프리랜서
“마닐라서 조직 결성했다 들어”
조양은이 검거된 앙헬레스 지역에서 관광업에 종사하고 있는 한 교민은 조양은을 생활 반경에서 자주 봤으며, 그와 대화를 나눈 적도 있다고 밝혀 관심을 끌었다. 조 씨는 약 18개월 전 마닐라에서 앙헬레스로 와서 주로 지역의 사채업자 겸 환전업자와 함께 다녔다고 한다. 이 사채업자가 그의 현지생활을 옆에서 돌봐줬다는 것. 이 교민은 “사채업자이긴 하지만 건달 출신도 아니고 지역에서의 평판이 좋다”며 “조양은이 카지노에 자주 갔다. 오후 6시께 카지노에 나타나 새벽에 사라졌다. 낮엔 안 보이고 밤에만 움직였다. 큰 돈을 걸고 하진 않고 슬롯머신 정도 하더라. 무료함을 달래려는 것으로 보였다. 비교적 조용히 지냈다”고 전해왔다.
또 그는 조양은의 인상과 풍모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약간 살이 쩠지만 전성기 때 포스가 남아 있더라”며 “말투도 그렇고 옛날 외모 그대로다”라고 말해 궁금증을 안겼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교민은 “조 씨가 한국에서 따라온 부하들과 마닐라에서 조직을 만들었다고 하더라. 필리핀은 돈만 있으면 불가능한 것이 없는 나라다. 경찰이 덮치기 전에 미리 은밀히 알려 줄 수 있기 때문에 충분히 도망갈 수 있다. 체포는 솔직히 예상 못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민 20년차 마닐라 거주 한 교민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필리핀 현지 조폭과 연관이 있다는 풍문도 들었다. 그 정도 위치의 건달이라면 이곳 조폭과 같이 움직였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여행업에 종사하는 한 네티즌은 블로그에 “조 씨가 검거돼서 이제 안심하고 살 수 있게 됐다”며 “그동안 피해담과 목격담이 끊임없이 제기됐지만, 교민들이 불안에 떨며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교민사회에선 한국 수사 당국이 검거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하기도 했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신상미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