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왼쪽)과 담철곤 오리온 회장 등은 등기이사직을 내놓아 연봉 공개 대상에서 제외됐다. 임준선·최준필 기자
이번엔 피해갔더라도 12월 결산법인의 경우 내년 3월 사업보고서를 제출할 때 연봉 공개를 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일부 대기업 오너들은 잇따라 등기이사직을 내놓아 그 대상에서 빠져나갔다. 올 들어서만도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과 이화경 부회장 부부, 조정호 메리츠금융지주 회장 등이 등기이사에서 물러났다. 윤영달 크라운해태 회장도 일찌감치 크라운제과와 해태제과식품의 등기이사직을 사임했다.
등기이사는 미등기이사와 달리 이사회에 참여하는 권한이 있는 자리다. 기업경영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고 그에 대한 법적인 지위와 책임을 갖는다. 그런데도 그룹의 대주주이자 실질적 경영 책임을 지는 오너들이 등기이사직을 내놓고 있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더욱이 지난해 임원들에게 평균 5억 원 이상의 연봉을 지급한 기업 가운데 다수가 올해 임원 보수를 대폭 삭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중에는 실제 실적 부진 탓에 보수를 줄인 곳도 있지만, 연봉을 ‘5억 원’ 이하로 미리 끌어내려 공개 대상에서 빠져나가려는 의도로 보는 시각이 팽배하다.
지난 1일 ‘재벌닷컴’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12년 기준 등기임원 보수가 평균 5억 원 이상인 12월 결산법인 219개사(상장사 190개사, 비상장사 29개사) 중 123곳(56.2%)은 올해 1∼9월 지급한 등기임원 보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감소했다. 이 중 올해 임원 보수가 지난해의 절반 이하로 줄어든 곳이 20개사에 달했다. 이를 포함해 임원 연봉 하락률이 30% 이상인 곳이 45개사였고 10% 이상 하락한 기업은 모두 81곳으로 집계됐다.
특히 총수나 일가족이 등기임원으로 있는 기업의 임원 보수 감소폭이 컸다. 아모레퍼시픽은 지난해 등기임원 1인당 평균 보수가 18억 2900만 원이었고, 9월 말까지 14억 4400만 원을 지급했다. 하지만 올해에는 9월 말까지 평균 4억 1500만 원을 지급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무려 71.2% 급감했다. 한국타이어의 지주회사 격인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는 지난해 연간 등기임원 평균 보수가 19억 500만 원이었고 9월 말까지는 13억 3300만 원을 지급했다. 올해는 같은 기간 3억 9300만 원에 그쳐 70.5% 감소했다.
지난해 등기임원 1인당 평균 보수가 연간 30억 원을 넘었던 SK텔레콤, CJ제일제당은 올해 9월 말까지 지급된 임원 보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0% 이상 하락했다. 지난해 20억 원대의 등기임원 1인당 평균 보수를 기록한 네이버와 엔씨소프트도 50% 이상 감소했다. 그 외 LG생활건강, SK네트웍스, GS건설, STX조선해양, E1, LG화학, LG상사, 에스원 등도 하락률이 50%를 넘었다.
실질적인 경영권을 행사하면서 등기이사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삼성그룹의 경우 연봉공개 대상자는 호텔신라 등기이사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유일하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번에 승진해 삼성에버랜드 패션부문 경영기획담당을 겸하게 된 이서현 제일모직 사장과 그의 남편 김재열 삼성엔지니어링 경영기획총괄 사장 등 나머지 일가는 모두 미등기임원으로 연봉공개 대상이 아니다. 반면 현대자동차, SK, LG, 롯데, 현대중공업, 한진, 한화 등은 모두 대주주가 등기 이사를 맡고 있어, 연봉이 공개될 전망이다.
사정이 이렇게 흘러가자 회사를 책임지는 경영진들이 스스로 급여를 공개해 회사 경영의 투명성을 보장하자는 법 개정의 취지가 무색해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고개를 들고 있다. 미등기이사이면서도 회사 경영에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오너 일가를 연봉 공개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는 이유다.
이에 당국도 제도보완 방침을 밝히고 나섰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재벌 오너들이 기업경영에 사실상 영향력을 행사하고 관여하면서 많은 보수를 받지만 보수 공개 대상에서는 제외되는 문제가 있다”면서 “제도가 아직 시행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일단은 제도 정착을 위해 노력한 뒤 시행과정에서 문제가 있다면 보완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웅채 언론인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