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화재배에서 이세돌 9단이 준우승에 그쳤다. 한국은 올해 세계대회에서 우승컵을 하나도 가져오지 못했다.
‘20년 만에’라는 것이 재미있다. 20년 전이면 1993년. 이창호 9단이 사상 최연소 기록으로 세계 챔피언에 오르던 때다.
아닌 게 아니라 중국이 올해 세계 타이틀을 독식했다는 것도 그렇지만, 천야오예를 빼면 전부 1990년대 출생 혹은 이른바 ‘90후’ 세대인 것이 돋보인다. 게다가 지금은 물론 모두 유명기사가 되어 있지만, 등장할 때는 보도 듣도 못하던 어린 소년들이었다. 괴력의 소년들의 등장,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 가공할 일이다. 지금이 겁나는 게 아니고, 미래를 생각하면 좀 추워지는 것.
올해 우리는 우승컵을 하나도 가져오지 못했지만, 내년에는 또 심기일전해 두세 개나, 서너 개 차지할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한 해 두 해 흘러가도 그게 가능할지, 몇 년 후를 생각하면 자신이 없다. 몇 번씩 하는 얘기지만 우리는 나현 이동훈 변상일 신민준 신진서, 이 정도 소년들을 기대하고 있다. 불과 대여섯 명인 데 비해 중국은 판팅위 미위팅 탕웨이싱 같은 소년들이 즐비하고, 우리의 대여섯 준재들은 이들보다 나은 게 별로 없어 보인다. 숫자에서는 크게 밀리고 실력에서는 좋게 봐서 비슷하다.
중국 국가대표 감독 위빈 9단은 시상식 자리에서 우리 기자들에게 “탕웨이싱은 누군지도 잘 모르는 아이였다. 이번에 준결승에서 스웨를 물리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래도 이세돌 9단에게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대단하다”고 말했다. 이런 정도다.
이번 결승전을 지켜본 바둑팬 중에는 주최 측의 무신경을 지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세돌 9단은 11월부터 12월 초까지 국내에서 도전기 결승기 등으로 강행군을 했다. 대국수가 너무 많았다. 좀 심하게 말하면 살인적인 스케줄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 삼성화재배 결승3번기를 두었다. 상대가 열 살 어린 중국의 무명 신예라는 것도 부담이 되었을 텐데, 바둑을 사흘 연속으로 두게 했으니, 체력이 어디 배겨나겠느냐. 정신적 육체적, 이중의 부담이었다.”
“일본은 결승전은 일주일에 한 판이다. 우리도 예전에는 그랬다. 일주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 며칠은 쉬었다가 두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세계대회 결승전도 후다닥 해치우곤 한다. 특히 이번에 왜 결승전 바둑을 하루에 한 판씩, 사흘에 몰아 두게 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경비 절약 때문인가? 우승상금 3억 원이라고 그런 홍보는 하면서 대국자 호텔 비용은 아끼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중간에 하루씩은 쉬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중국의 탕웨이싱 3단(왼쪽)과 이세돌 9단.
“아니면 차라리 제3국에서 하든지. 도대체 누가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누리는 건가. 하긴 기업의 입장에서는 중국 시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니, 할 말은 없다만.”
그러나 원래 패장은 말이 없는 법이고, 자성의 무거운 분위기에 비하면 바둑팬들의 지적은 애교에 가까운 것. 그것보다는 “문제는 우리가 심기일전 하면 다행이지만, 과연 우리가 심기일전 하겠느냐.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누가 지금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이며, 한두 사람 그런 프로기사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들만으로 대세가 바뀌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사실은 아프다.
“여유 있는 기사는 고행을 자원할 이유가 없다. 중국 리그도 있지 않은가. 애국심 같은 것에 호소할 수 없고, 그런 시대도 아니다. 결국 우리도 중국처럼 뭔가를 보장해 주는 것으로 분위기를 바꿀 수밖에 없다.
예컨대, 우리는 대학 진학이 청소년의 모든 것이니까, 명문대학 진학의 길을 열어 준다든가… 교육적으로 옳은 건지는 모르지만, 그건 다음 문제고, 아무튼 방법만을 생각한다면 그런 게 효과를 볼 수는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중국은 바둑을 잘 두면 명문대학 진학이 쉽다. 대만은 병역 혜택이 있다. 태국은 진학과 취업에 결정적 도움이 된다. 참고할 만한 일 아닌가.
얼마 전에 이인제 의원이 발의한 ‘바둑진흥법’이 통과된다면 이런 것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도 보인다. 그때가 되면 나아질까. 다만 신중해야 할 것이다. 바둑이 전부는 아니니까.”
‘바둑진흥법’은 올해 통과될 것으로 기대들을 했었는데, 지금 국회가 저런 상황이어서 어렵게 되었다. 차제에 좀 더 다듬는 시간을 갖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처럼, 나쁘지 않아 보인다. 그나저나 내년은 과연 어떨까. 이창호나 이세돌 그런 재주가 어디서 혹시 또 안 나오려나.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