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려한 시절’의 이후락 전 부장. 아래는 박정희 전 대통령 과 악수하는 모습. | ||
하지만 HR은 언론과의 접촉을 극도로 피하고 있다. 막내아들 동욱씨도 “아버지는 절대로 언론에 직접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더군다나 현재 치매증세를 보이고 있어 그의 자서전이나 역사 기록을 기대하기란 더욱 어려운 상태로 알려졌다.
동욱씨는 “가족회의를 통해 아버지께 ‘자서전을 집필하시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 적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모두 지난 일인데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이후락 파일’에 대한 관심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그만이 알고 있는 역사적 비화가 많기 때문이다.
HR은 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전후해서 평양에 밀사로 파견됐다. 당시 김일성은 HR에게 “남북한 공동으로 핵무기를 개발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이는 지난 95년 일본 <지지통신>에서 보도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HR은 이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다. 또 밀사로 파견됐을 때 김일성과 나눈 구체적인 밀담 내용과 밀사 파견 과정 등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또 중앙정보부장 시절인 72년 박정희 독재 장기 집권을 위한 유신 개헌을 주도했는데, 이에 대한 비화도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JP)는 몇 해 전 “73년 DJ(김대중 전 대통령) 도쿄 납치사건은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단독범행이고 나와 박정희 대통령은 몰랐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HR는 입을 열지 않고 있다. JP의 주장처럼 ‘단독범행’인지 아니면 ‘3공 정권의 공동범행’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스터리인 상태.
73년 12월 해임된 HR은 3공의 극비 문서를 챙겨 한때 해외로 도주했다고 한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과의 ‘타협’으로 국내로 다시 들어오긴 했지만, 당시 HR이 들고 나갔던 ‘3공 극비 파일’ 내용은 아직도 궁금증으로 남아 있다.
제3공화국의 최대 이권 사업은 미국의 석유 재벌인 칼텍스와 유니언 오일사의 한국 내 합작회사 선정 사업이었다. 당시 재벌들은 석유합작회사로 선정되기 위해 치열한 로비를 펼쳤는데 최종 승리자는 호남정유와 한국화약그룹으로 결정됐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들 회사는 바로 이후락의 사돈 기업. 첫째와 셋째 아들이 이들 기업 오너의 딸과 결혼했던 것.
당시 이 사업자 선정과 관련해 거액의 정치자금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제공됐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HR이 그 전모를 알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사업자 선정에 깊숙이 관여됐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정인숙 여인 사망사건’과 ‘김형욱 전 중정부장 실종 사건’ 등과 같은 3공 시절의 각종 미스터리 사건에 대해서도 그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처럼 3공 시절 최고의 권력 핵심이었던 HR은 ‘역사의 산증인’이다. 하지만 그만이 알고 있는 ‘3공 비사’는 빛을 보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