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월14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맨 앞)이 청와대 춘추관 에서 대북송금 파문에 대한 대국민담화를 발표한 뒤 임동원 외교안보통일특보(오른쪽 끝)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연세대 송복 명예교수는 최근 <일요신문>과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2년 전인 지난 2001년 일본을 방문하는 기간에 일본의 지한파 유력 언론인으로부터 전해들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당시 이 언론인이 전한 바에 의하면 당초 북한이 남북정상회담 대가로 남한 당국에 요구한 금액은 30억달러였으며, 남북측이 협상을 벌여 결국 10억달러를 주기로 합의했다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송 명예교수는 “이 같은 전언에 대해 당시엔 다소 황당하게 들렸으나 결과적으로 일본 언론인의 여러 증언이 오늘날 밝혀지는 사안들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고 있어 나도 솔직히 놀랍고 당황스럽다”고 덧붙였다.
4월17일 송두환 ‘대북송금 의혹’ 특검팀 출범을 앞두고 이 사건과 관련된 여러 관계자들의 증언을 청취하는 과정에서 <일요신문>은 전직 국정원 관계자로부터 흥미로운 얘기를 전해들었다.
이 관계자는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가 지난해 어느 대학의 포럼에서 ‘일본 유력 언론인들은 이미 2001년 남북정상회담의 뒷거래 내용을 알고 있는 듯했고, 또한 그들이 내게 귀띔해준 내용들이 놀랍게도 지금 국내에서 불거지는 것과 일치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발언을 했다”고 제보했다.
기자는 이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송 교수와 통화했다. 통화에서 송 교수는 “문제의 발언은 대선 전인 지난해 10월경 한 대학의 비공식적인 포럼에서 한 말”이라고 재차 확인했다.
그는 “내가 일본 언론인으로부터 그 말을 전해들은 것은 2001년 4월이었으며, 당시엔 국내에서 어느 누구도 남북정상회담 과정에 돈거래가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도 못할 시기였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당시 일본 언론인이 전한 얘기에 의하면 정상회담에 앞서 북한측은 남한측에 30억달러를 요구했으나 남한측이 액수가 너무 많아 수용하기 어렵다고 난색을 표했으며, 양측이 서로 밀고당기는 협상을 몇 개월간 벌인 끝에 결국은 10억달러로 합의를 봤다는 내용이었다”고 밝혔다.
당시 일본 언론인은 송 교수에게 “약속대로 5억달러가 회담 전 먼저 북측에 송금되었는데, 전달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남북정상회담의 날짜가 당초 6월12일에서 13일로 하루 연기된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
송 교수는 또 “이 얘기를 전한 일본 언론인은 ‘아마 한국에서도 내년(2002년) 하반기쯤이면 이 문제가 크게 터질 것’이라고 예상했다”고 회고했다.
송 교수는 “당시 나와 함께 이 대화를 나눈 일본 언론인은 3명이었으며, 주로 한 명이 얘기했지만 나머지 두 사람도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또 “이 말을 한 일본 언론인은 그 자리에서 ‘일본 하코네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우리는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다 알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고 밝혔다. 송 교수는 이들이 일본의 유명 관광지인 ‘하코네’라는 지명을 말한 것은 “하코네에서 남북측이 접촉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했다”고 추정했다.
이들 일본 언론인에 대해 송 교수는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일본의 유력 언론사 소속의 지한파 언론인이었다”면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강조했다.
▲ 송복 교수 | ||
송 교수는 “워낙 황당하고 엄청난 일이어서 당시엔 ‘과연 그런 일이 있었을까’라는 의구심만 들었을 뿐 더이상 캐묻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5개월 뒤인 지난해 9월25일. 대선을 불과 3개월 앞둔 시점에서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의 ‘현대상선의 대북송금 폭로’는 정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당시 엄 의원은 “현대상선은 남북정상회담 직전인 2000년 6월7일 산업은행으로부터 4억달러를 대출받았고, 이 돈은 현대아산을 통해 바로 북한측에 넘어갔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이성헌 의원 역시 “현대건설도 1억5천만달러를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북한에 송금한 것으로 보인다”며 연이어 폭로했다.
정국이 온통 남북정상회담 뒷거래설로 어수선해지는 것을 보고 송 교수 역시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그는 지난해 10월 한 대학 정책고위과정 주최 포럼에서 강연을 하던 중 “지금 대북송금 뒷거래설로 국내가 온통 난리이지만, 나는 이 사실을 지난해(2001년) 일본 언론인으로부터 들은 바가 있다. 그들의 예고대로 지금 이 일이 터져나와 솔직히 놀랍다”는 내용을 슬쩍 소개했다는 것.
이후 하나둘씩 밝혀지는 사실 또한 당시 일본 언론인이 전한 내용과 일치했다는 게 송 교수의 전언. 즉 회담 일자가 당초 6월12일이었으나 13일로 연기된 점, 그리고 올해 2월16일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장의 입을 통해 대북송금액이 5억달러로 밝혀졌고, 또 이를 청와대(김대중 정부)에서도 확인한 점 등이 그것이다.
송 교수는 “그러나 당시 일본 언론인과 접촉한 북한측 인사들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전해듣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2001년 당시 자신과 대화를 나눈 일본 언론인들에 대해서도 구체적 언급을 피했다.
송 교수의 이 같은 증언에 대한 주변의 반응은 다소 엇갈리고 있다. 한 전직 국정원 직원은 “일본 내 정보기관과 언론의 북한에 대한 정보력은 솔직히 우리 국정원보다 더 앞서갈 때가 많았다”며 “당시 일본 언론인이 전한 내용은 언론사 간부들이나 정부 고위직에서만 감지하고 있던 고급 기밀정보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했다.
그는 “남북정상회담이 있은 지 10개월 후에, 또 국내에서 이 일이 불거지기 1년5개월 전에 상황을 정확히 예측한 것으로 봐서 이들은 이미 이 사안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반면 또다른 국정원 관계자는 “폭로주의적 성격이 강한 일본 언론의 특성으로 봐서 일본 언론계에 떠돌던 소문의 하나를 옮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그는 “평소 송 교수가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에 비판적이었는데, 그가 일본 인사들과 사석에서 나눈 대화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만약 일본 언론에서 이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왜 보도하지 않고 감추고 있었는지도 의아스런 대목”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일본 유력 일간지의 국내 특파원인 한 일본 언론인은 “나는 미처 그 같은 정보를 듣지 못했지만 일본 현지의 고급 간부들이 내부정보로 갖고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정보가 일본에서 보도되지 않은 배경에 대해서 “현직기자가 아닌 언론사 내 고위간부였다면 기사화보다는 다른 정보용으로 간직했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는 “현재 일본 법무성 공안조사청 등 정보기관들의 조총련계 감시가 아주 강화된 상태다. 그리고 조총련계의 와해로 정보가 많이 새어나가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일본 언론인의 발언 중 ‘하코네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 손바닥 안’이라는 대목으로 보아 이미 일본 정보기관에서 북측 인사의 은신처를 파악하고 감청 등의 정보캐내기 작업을 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 언론인은 또 “지난 90년 고 정주영 회장이 방북할 때도 일본 인사의 도움을 받았다. 북한과의 왕래가 남한보다 훨씬 자유로운 일본이 정보력도 한 발 앞서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러나 지금 단계에선 송복 교수의 증언만으론 진상을 확인하기 어렵다. 일본 언론인의 직접적인 증언을 비롯, 남북밀사의 하코네 회동 진상 등 좀더 확인해야 할 것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