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유럽 유일의 7단이었던 슐렘퍼(왼쪽)와 유종수의 대국 장면.
그런데 이세돌-구리의 10번기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동안에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새롭게 밝혀졌다. 우리에게도 지난날 이미 그와 거의 같은 승부가 있었다는 것.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5년 10월 20일, 일요일 오전. 네덜란드 북서부의 아름다운 도시 리우바르덴(Leeuwarden)의 한 호텔(Freislandhal). 이날따라 유난히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유럽 각지에서 몰려온 바둑팬들이었다. 호텔 입구에는 ‘로널드 슐렘퍼(Ronald Schlemper)-Jong-Su, Yoo(유종수) 9번기 제1국’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1982년 4월의 어느 봄날, 김포공항의 출국 검사대 앞에서 한 청년이 난감한 표정으로 공항 요원들에게 뭔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청년의 허리춤 속에서 이상한 게 발견되었다. 전대(纏帶)였다. 상당한 액수의 돈다발, 청년이 지니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었다. 청년은 독일로 가는 유학생이었고, 돈은 청년의 학비와 생활비였는데, 청년의 어머니가 청년이 혹시 잃어버릴까 염려되어 전대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청년의 설명에 요원들은 웃으며 청년을 통과시켰다. 인정이란 게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청년의 이름은 유종수. 1954년생. 바둑 아마7단의 실력. 경기고-외대 출신. 1980년대 초반, 한국 외국어대학교는 대학 바둑을 주름잡으며 전성기를 구가했는데, 그때의 주역이 유종수와 그의 친구들인 김원태 박윤서 함철 등이었다.
프랑크푸르트공항이 내려다보였다. 유종수는 상념에 잠겼다. 경기고에 진학하자 주변의 기대가 피부로 느껴졌다. 부모님과 친척들은, 사람들이 흔히 그랬고 지금도 그런 것처럼, 내가 아버지처럼 의사가 되든지 아니면 판검사가 되는 걸로 믿었던 것 같은데, 나는 의사나 판검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고, 대신 바둑을 더 열심히 했다. 후회는 없다만 그래도 바둑만으로 살 수는 없는 것. 새출발한다는 마음으로 유학을 떠나와 이제 쾰른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한다. 언어학도 무지하게 어려운 공부라고들 한다. 바둑은 한동안 쉬어야 할 것이다. 최소 몇 년은 바둑을 멀리 하리라.
그러나… 바둑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유종수는 얼마 후 ‘함부르크 바둑대회’에 출전했고, 우승했다. 유럽에 건너와 처음 참가한 대회였다. 함부르크 대회는 요즘 기도산업의 박장희 회장이, 함부르크를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윤영선 5단을 도와 주최-후원하는 바로 그 대회다. 함부르크 대회는 프랑스 파리 대회,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대회, 스위스 라쇼드퐁 대회와 함께 유럽의 메이저 4대회로 불린다. 유종수는 89년 11월 귀국할 때까지 약 8년 동안 4개 메이저대회에서 한두 번인가를 빼고 30회쯤 우승했다. 석권이나 다름없었으며 기타 군소 대회를 합하면 60여 회를 우승함으로써 유럽 바둑계를 글자 그대로 초토화시켰다.
유종수의 대국에는 언제나 관전객이 구름처럼 모였다. 오른쪽 사진은 2010년 국내대회에 참가한 유종수.
다국적 기업이었던 네덜란드 굴지의 보험회사 ‘인터폴리스(Interpolis)’가 유종수-슐렘퍼의 진검승부 9번기를 기획-후원하고 나섰다. 10번기로 하지 않은 것은 5 대 5 무승부를 없애자는 것이었다. 10월 20일부터 27일까지, 전설의 여간첩 마타하리의 고향, 리우바르덴에서 시작해 동부의 아른헴(Arnhem), 남부의 틸부르크(Tilburg)까지, 작지만 아름다운 3개 도시를 순회하며 도중에 쉬기도 하면서 하루에 한 판이나 두 판을 소화하는 여정이었다. 결과는 유종수의 7 대 2 승리. 그런데 ‘유럽 바둑계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그 사건이 국내에는 알려지지가 않았던 것.
이세돌-구리 10번기 얘기가 나돌던 작년 여름, 우연히 유종수 7단과 김원태(킴엑스무역 대표) 전 한국대학바둑연맹 회장, 그리고 바둑 관계자 몇이 어울린 자리에서 유 7단의 9번기 얘기가 나왔다. “우리나라 사람이 8년 동안이나 유럽 바둑을 완전 제패한 것은, 프로-아마를 떠나 우리 바둑사는 물론 세계바둑사에서도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도 남을 만한 기념비적 일이다. 이제라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것에 이견이 없었다. 김 대표는 마침 7월 말 폴란드에서 열리는 ‘유럽 바둑 콩그레스’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김 대표는 콩그레스에서 네덜란드 선수를 만났고 “귀국해서 찾아보고, 있으면 알려 주겠다”는 답을 갖고 돌아왔다. 8월에 네덜란드에서 연락이 왔다.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오는 4월 18일 파리대회가 열린다. 유 7단과 김 대표는 그 날짜에 맞춰 파리로 간다. 대회에 참가한 후, 9번기가 열렸던 네덜란드의 도시들과 유 7단이 유학했던 쾰른대학을 찾아 당시의 바둑 친구들을 만나보고 기록을 수집해 올 작정이다. 가능하면 바둑TV 촬영 팀과 동행해, 역사의 현장을 되짚어 찾아가는, 추억과 감회의 여정을 필름으로 남길 생각도 하고 있다. 동행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9번기의 상금은 5000굴덴, 5000마르크보다 좀 약한데, 가치를 환산하면 500만 원쯤 되었던 것 같아요. 준우승은 2500굴덴… 대회 우승 상금은 보통 1000마르크 안팎이었어요. 한 달 생활비 정도 되는 금액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유종수는 바둑만으로는 살 수 없을 것 같아 유학을 떠났고, 공부하려고 바둑과 잠시 헤어지려고 했지만, 결국 바둑에 묻혔고, 지금 바둑으로만 살고 있다. 어쩌랴. 사주팔자가 그런 것을.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