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화 5단이 시종 박영훈 9단에게 조금씩 밀렸고, 종국을 앞두고는 박 9단의 반면 10여 집 리드가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는데. 그때 박 5단이 무서운 노림수가 작렬시키며 ‘타개의 달인’이며 끝내기 계산은 전성기 이창호 9단과 쌍벽이라고 불리는 박 9단의 대마를 한 순간에 함몰시켰다.
누구도 예상 못한 박영훈의 허를 찌른 통렬한 노림수였다. 나중에 보니 박 5단은 박 9단의 대마를 노리며 한참 전부터 꾸준히, 참을성 있게 한 발 한 발 접근하고 있었고, 기회다 싶자, 물실호기, 통쾌한 카운터펀치 한 방을 날렸던 것. 해설하던 박정상 9단은 “소름이 끼친다”면서 감탄을 연발했다. “무서운 미끼입니다. 섬뜩한 사석이네요.”
<1도>가 박영훈 9단과 박승화 5단의 바둑이다. 거의 다 두어 하중앙 쪽만 정리하면 끝날 것 같은 상황이다. 흑1, 마지막 남은 큰 자리. 이걸로 여기에 흑집이 제법 붙었다. 흑이 넉넉히 앞서고 있다. 이른바 낙승지세. 박 9단도 승리를 확신하듯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박 5단은 백2로 시간을 벌더니 돌연 중앙으로 손을 돌려 4의 곳을 잇는 것이었다. 관전자들이 모두 놀랐다. 아니, 그쪽 백돌은 잡혀있는데… 보태주는 거 아닌가? 무슨 수가 있나? 키워 버리면서 끝내기로 활용하는 수가 있나?
<2도> 흑1로 끊는 박 9단의 표정은, 응? 뭐지? 보태주나? 던지려고 하는 건가? 그런 거였다. 백은 2로 단수친 후 이번에는 또 4쪽을 끼웠다. 해설하던 박정상 9단의 눈빛이 변했다. 뭔가 느낀 것이었다. 던지려는 게 아니라면 이렇게 둘 이유가 없으니까. 박정상 9단이 대형 해설판 위에서 수를 따라가고 있었다.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 수는 대국자가 제일 정확하게, 잘 보는 법이니,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걸 박승화 5단은 보고 있는 것일 테니까.
<3도> 박영훈 9단도 여기에 이르러서는 상대가 왜 이러는 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의 방심을 크게 후회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선 도리가 없다. 백을 살려 줄 수는 없다. 살려 주면 역전이니까.
흑은 1·3으로 잡고 백은 2·4로 죄어 붙이며 외곽을 다졌다(흑5는 백 자리 이음). 그리고 좌상변에서 상변에 걸친 거대한 흑말을 향해 필살의 센터링 백6을 날렸다. 관전석에서 환호성과 탄성이 동시에 터졌다. 잡으러 가는 거였다! 그런데 과연 저걸로 대마가 잡히는 건가?
<4도> 흑1로 끊는 것에는 백2로 되몰고, 흑3으로 잇자 백도 4로 이었다. 이게 선수 아닌가. 흑5로 잇자 백도 6으로 이었다. 흑7로 내려서 궁도를 최대한 넓히자, 박승화 5단은 백8로 시간을 벌어 숨을 고르면서 흑 대마 함몰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백10으로 가만히 내려섰다. 박영훈 9단은 다른 곳에 한 수를 더 두고는 얼굴을 붉히며 곧바로 돌을 거두었다. 백10 다음은 어떻게 정리되는 것일까.
<5도> 흑1로 또 넓히면 백2로 이쪽에서 들어가고, 백4로 저쪽에서 들어간다. 계속해서 흑이 A에 이으면 백B로 꼬부린다. 5궁도화.
<6도> 흑1로 꼬부리면? 이게 급소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이번에는 백2 쪽으로 올라가고 4로 젖히고 6으로 들어간다. 흑7이면 백8, 빈삼각으로 꼬부려 역시 5궁도화. 흑7로 8의 곳에 두면 빅 아닌가? 아니다. 백은 7로 계속 들어가 찝으면 흑이 A의 곳을 이어야 하므로(바깥 공배가 다 채워지면) 5궁도화. 이래도 저래도 5궁도화를 피할 길이 없는 것.
박 5단은, 여기서는 지면 관계로 앞의 수순은 보여 드리지 못했지만, <1도> 백4 이전에도 흑 대마를 쳐다보면서 차근차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백4로 결정적 미끼를 던졌고, 박영훈 9단이 그걸 덥석 문 것 아닌가. 조금만 신경 써 대마를 돌보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다. 궁금하신 분들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기보를 찾아보시기를.
젊은 프로기사들은 성적을 내는 기사든 그렇지 않은 기사든 누구나 ‘한칼’은 있는 것. 누구나 위에서 본 것 같은 노림수를 터뜨릴 잠재력이 있다. 좀 낯선 얼굴이라고 방심하면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다칠 수 있다.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