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의 대법원 전경. 왼쪽은 양승태 대법원장. 지난해 대법원에 상고된 사건 수는 3만 6100건, 대법관 1인당 1년간 쉬지 않고 일하더라도 하루에 30건이 넘는 사건을 처리해야 한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우리나라 대법원의 기형적인 현실을 보면 대법원 다양화가 생각보다 쉽지 않은 현실임을 알게 된다. 사회적으로 기준을 제시해야 할 필요성 이 있는 극소수의 사건만을 다루는 다른 나라 대법원과는 달리, 우리나라 대법원은 한 해 3만 건 이상의 많은 사건을 처리하고 있기 때문이 다. 소수의 의미 있는 사건을 깊이 있게 심사하고 토론을 벌이는 해외 대법관들은 성향을 뚜렷하게 드러내며 사회 구성원들의 지지나 비판을 받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대법관도 많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법관은 가치관보다는 ‘많은 사건을 처리할 재판능력’이 중시되고, 화려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6년 임기 내내 격무에 시달리며 ‘판결하는 기계’로 고생하는 게 현실이다. 당연히 장시간에 걸 친 깊이 있는 토론은 꿈꾸기 힘들고, 사회갈등을 봉합하는 명판결이 나오기도 어렵다.
최근 ‘통상임금 사건’에 대한 판결이 대표적이다. 상여금과 각종 수당을 통상임금으로 봐야 할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재계와 노동계는 물론 정부와 법조계도 대법원을 주목했지만, 분쟁을 종결짓기는커녕 혼란을 더 부추겼다는 지적이다. 대법원이 “상여금과 수당 일부도 통상임금”이라고 하면서도 근로자들이 덜 받은 통상임금을 기업들에게 청구할 수 있는 요건을 모호한 기 준을 내세워 제한했기 때문이다. 분쟁을 종결짓고 명확한 기준을 제시해야 할 대법원이 ‘신의성실의 원칙(권리행사는 사회통념을 벗어 나지 않는 범위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법 이론)’을 내세워 애매한 결론을 내린 데 대해서는 법원 내부에서도 비판이 이어지고 있는 상 황이다.
우리나라 대법원은 1심이나 2심과는 다른 특성을 갖는다. 대법원이 처리하는 ‘상고심 사건’은 1, 2심이 확정한 사실관계를 토대 로 순수하게 법 이론적인 부분만을 검토한다. 사실관계에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이론이 잘못된다면 사건을 파기하고 다시 재판하게 할 수 있 다. 최근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경우도 1, 2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가 대법원에서 “횡령·배임액수를 평가하는 기준이 잘못 됐으니, 재판을 다시 하라”며 사건을 파기환송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사실관계를 제외하고 법 논리만을 판단하는 대법원 상고심의 특성상 대법관의 가치판단이 중요하게 개입하게 된다. 징역 4년의 실형을 살 뻔한 김승연 회장이 집행유예로 풀려난 사례에 서 볼 수 있듯이, 대법원을 구성하는 대법관들의 개인 성향이 중요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4명의 대법관이 의견이 달라 결론을 내리지 못하게 되면 사건은 대법원장과 12명의 대법관이 모두 사건을 검토하는 ‘전원합의체’로 넘어간다. 원래 대법관 구성에서 다양성이 중요하다는 것은 대법관 전원이 토론을 벌이고 결론을 내는 전원합의 체 선고를 전제로 한 것이지만, 격무에 시달리는 현실상 대법원이 1년에 전원합의체를 통해 판결하는 사건은 10~20건에 그친다.
소부사건에서는 사건을 주도하는 주심이 누구인지가 중요하다. 주심 대법관의 성향에 따라 사건의 결론이 뒤집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 서 대법원에 사건이 계류중일 때 변호사들은 사건 주심이 누가 되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기도 한다. 전원합의체 역시 다수의견으로 결론이 나 므로 개개인의 성향이 중요하다. 서울대 출신의 남성 법관 출신이 대부분인 대법원 구성에 여성이나 학자, 변호사 출신이 들어가야 한다는 지적이 이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양한 시각을 가진 대법관들이 토론해야 가치 있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현재 대법원에 구성을 보면 여성은 박보영(53·16기), 김소영(49·19기) 대법관으로 두 명뿐이다. 학자 출신은 서울대 법대 교수에서 대법관으로 지명된 양창수 대법관(62·6기)이 유일하며, 그나마도 판사에서 학자가 된 케이스다. 양 대법관은 오는 9월 임기만료로 물러난다. 출신 학교를 보면 쏠림 현상은 더 두드러진다. 고려대 출신의 김창석 대법관(57·13기)과 한양대 출신의 박보영 대법관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서울대 법대 출신이다. 40여 년간 자리를 이어오던 검찰 출신 대법관은 대검 중수부 장 출신의 안대희 대법관(59·7기)이 퇴임한 2012년 이후 명맥이 끊겼다. 대법원 구성이 ‘사법연수원 10~13기의 서울대 출신 남 성 엘리트 법관’으로 한정돼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법원 구성의 다양화는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대법원이 처리해야 하는 사건 수가 워낙 많기 때문이다. 대법원 통계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대법원에 상고된 사건 수는 3만 6100건이다. 소부를 구성하는 12명의 대법관들이 처리하는 사건 수는 산술적으로 3000건 이 넘는다. 4명이 1개의 부를 구성하고 사건을 공동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산술적으로 대법관 1인당 1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더라도 하 루에 30건이 넘는 사건을 처리해야 한다. 1심이나 2심 법원에서 사건 하나를 처리하는 데 수개월이 걸리는 걸 감안하면 가히 살인적인 업무 량이라고 할 만 하다.
실제 대법관들은 주말 중 하루만 쉬는 게 대부분이고, 새벽에 출근해 밤늦게까지 야근을 하는 격무에 시달린다. 가끔 점심이나 저녁자리에 반주를 곁들이는 정도가 여가의 전부인 대법관이 대다수다. 이런 현실 때문에 자연스레 ‘재판을 기계적으로 잘하는 정통파 법관이 필 요하기 때문에 대법원을 다양화할 수 없다’는 반론이 나오게 된다. 역대 대법원장들은 이런 현실을 감안해 평생 재판업무를 맡아온 서 울대 출신의 엘리트 법관들을 위주로 대법관을 지명해왔다. 법조계에서 ‘대법관이 되면 임명되는 날 하루만 좋고 나머지 임기동안은 생지옥이다’라는 말은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우리나라 대법관은 엄밀히 말하면 ‘판사’가 아니다. 법원조직법상 우리나라 법관은 ‘대법원장’과 ‘대법관’, ‘판사’로 구분된다. 판사의 임기는 10년이며, 임기를 채우면 재임용심사를 받게 된다. 지금까지 사법역 사상 재임용에 탈락한 사례는 단 3명뿐이다. 가장 최근에 재임용에 탈락한 판사는 서기호 현 정의당 의원(44·29기)이다. 서 의원은 서울북부지법 판사로 일하던 2011년 ‘가카 빅엿’ 등 이명박 당시 대통령을 비난하는 글을 SNS에 올리며 화제가 됐다. 이후 곧바 로 재임용에 탈락했으나, 통진당 비례대표에 이름을 올려 국회의원이 됐다. 평판사에서 재임용 탈락 후 곧바로 국회의원이 된 서 의원은 2012~2013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으로 국정감사를 진행하며 법원행정처장 등 법원 고위관계자들을 상대로 호통을 치는 진풍경을 연출하 기도 했다. 임기가 10년인 판사와 달리 대법원장과 대법관의 임기는 6년이다. 대법관은 대법원장이 지명하고, 대통령이 임명한다.
사실 대법관들이 살인적인 업무를 소화할 수 있는 이유는 ‘재판연구관’ 덕분이다. 재판연구관은 대법원에 소속돼 대법관들의 사 건처리를 돕는 인력으로, 현직 판사가 대부분이다. 재판연구관은 110명 정도 규모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중 70명 정도는 어느 대법관 에게 배당됐는지를 가리지 않고 사건을 검토하는 ‘공동조’로 일하며 사건처리를 돕는다.
특정 대법관의 업무를 돕는 ‘전속연구관’은 대법관 1인당 3명이 붙는다. 이들은 대법관들을 도와 사건 기록을 검토하고 기존 대 법원 판례와 해외 사례 등을 검토한다. 대법원에 쏟아지는 엄청난 양의 사건을 실질적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자연히 실력이 쌓일 수밖에 없고 , 대법원 재판연구관 출신은 퇴임하는 즉시 주요 로펌의 타깃이 돼 수십억 원의 고액연봉을 받으며 스카우트되기도 한다.
때문에 변호사 업계에서는 대법원 상고심 재판이 ‘대법관 재판’이 아니라 ‘재판연구관 재판’이라는 비아냥이 일기 도 한다. 대법원 역시 재판연구관들이 깊숙이 사건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외부에서는 어떤 재판연구관이 어 떤 사건을 맡았는 지 전혀 알 수 없다. 표면상 주심 대법관이 누구라는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인 게 현실이다.
이렇게 임기 내내 재판연구관들의 보조 없이는 제 역할을 못할 정도로 ‘중노동’을 이어가다 퇴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 대법원은 올해 상고심 사건 수를 제한하거나 대법원 사건 중 일부만을 대법관이 판결하고 나머지 사건을 판사가 하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한 다는 방침이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도 이런 현실에 깊이 공감을 하고 있는 만큼 어떤 형태로든 올해에 결론이 날 가능성이 높다. 격무를 줄 여 보다 신중한 판결을 내리는 ‘포청천’ 대법관의 시대가 올 수 있을까.
이선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