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일 새벽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투신자살 했다. 사진은 경찰 관계자들이 시신을 수습하는 모습. 문화일보 | ||
정 회장의 자살은 그가 단순히 현대아산이사회 회장이라는 기업인이라는 점 외에도, 개성공단, 금강산관광사업 등 굵직굵직한 남북경협의 핵심인사로 수많은 ‘비밀’을 쥐고 있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왔다.
특히 그가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추진해왔던 남북 경협사업의 성과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갑자기 자살을 결심하게 된 배경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과연 무엇이 정몽헌 회장을 죽음으로 내몰았을까. 그가 투신자살을 통해 역설적으로 웅변하려 했던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다가오는 검찰의 칼날]
정 회장의 투신과 관련, 우선 자살동기로 거론되는 것은 검찰 수사에 따른 ‘심리적 압박감’이다. 대북사업 등과 관련해 특검에 이어 검찰의 강도 높은 수사가 거듭되면서 심리적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지 않겠느냐는 추측이다.
실제 정 회장은 자살 직전에도 몇 차례 검찰측의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측근에 따르면 장시간 조사가 이어지기도 했는데 정 회장의 성격이 여린 편이라 내심 견디기 힘들어 했다는 것.
또한 정 회장은 대북송금 특검법이 발효된 이후,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한 특검 수사에 응하면서 적지 않은 심리적 부담감을 주변 인사들에게 토로해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정 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는 지난해 10월 엄호성 한나라당 의원이 국회에서 현대상선의 대북송금 의혹을 제기한 지 석달 뒤인 올 1월23일 출국금지조치가 내려지면서부터 시작됐다.
본격적인 수사는 노무현 대통령이 대북송금 특검법을 수용하고 송두환 특검이 활동을 시작한 이후부터 이뤄졌다. 정 회장은 5월30일 처음 특검의 소환조사를 받았다.
정 회장은 몇 차례의 특검 조사에서 ‘정부가 현대측에 1억달러 대납을 요구했으며, 현대가 이를 수용, 모두 4억5천만달러를 송금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회장은 이밖에도 대북송금 경위를 비교적 자세히 진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특검수사 과정에서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이 박지원 전 장관에게 1백50억원을 제공했다고 진술함으로써 특검 수사는 대북송금 의혹에 이어 정치자금 제공 의혹으로 확대됐다. 정 회장으로서는 악재에 악재가 겹친 꼴이었다.
특검팀은 수사 기간 중에도 정몽헌 회장의 일시 방북을 허용하는 등 남북경협에 대해 배려해주기도 했다. 그 덕에 정 회장은 개성공단 착공식 협의를 위해 지난 6월10일부터 13일까지 북한을 방문할 수 있었다.
▲ 난 2월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선영에 들른 정 회장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문화일보 | ||
이러한 과정에서 특검 기한 연장은 대통령의 거부로 무산됐고, 1백50억 제공 의혹사건은 대검이 맡게 됐다. 정몽헌 회장은 최근 몇 차례에 걸쳐 대검 중수부의 집중적인 소환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대검에서 대북송금과 관련, 조사를 받은 바 있는 박지원 전 실장의 한 측근은 “특검 때보다 더 강도 높은 조사였다”며 “대북송금과정은 물론, 1백50억원과 관련해 DJ정부와 현대, 그리고 김영완씨와의 관계를 샅샅이 파헤치려는 것 같았다”고 대검의 강력한 수사의지를 전하기도 했다.
정 회장은 자살 하루 전인 2일에도 12시간에 걸쳐 강도 높은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결국 그가 거듭되는 검찰조사에 심한 심리적 압박을 느껴, 자살을 감행하지 않았느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개성공단 차질 의혹]
지난달 29∼31일 사흘 동안 북한 개성에서 열린 남북경제협력실무협의회 제2차 회의에서는 몇 가지 중요한 조치들이 합의됐다. 남북이 ▲투자보장 ▲이중과세 방지 ▲상사분쟁 조정절차 ▲청산결제 등 4대 경협합의서의 발효에 필요한 각자의 내부절차를 마쳤음을 확인한 것.
청산결제은행 지정, 상사 중재위 설치 문제, 원산지 확인 등은 2000년 12월 4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합의한 4대 경협합의서를 실질적으로 뒷받침할 중요한 조치들이다.
그러나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지역 왕래시 신변보호를 위한 민간인 통행문제는 양측의 의견차이가 커 합의에 진통을 겪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즉 남북경협 실무회담을 통해 남북경협에 관한 주요 의제에는 가시적인 진전이 있었지만, 정작 남북경협을 주도해 온 정몽헌 회장의 역점사업인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사업에 관한 협상은 난항을 겪으면서 전도가 여전히 불투명했던 것이다.
실제로 정 회장은 근래 들어 금강산관광 누적 적자 문제와 개성공단 국내 기업 참여 등의 문제로 심각한 고민을 거듭해 온 것으로 알려진다. 올해 초부터 정부의 지원이 끊긴 금강산관광사업은 매월 20억원에 이르는 적자를 낳았고, 또 개성공단에 대한 국내 기업의 투자나 참여도 기대와는 달리 미미하기만 해 정 회장이 노심초사했다는 것.
주변에 따르면 정 회장은 그간 개성공단 개발에 운명을 건 듯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공단의 성공적인 개발을 통해 적자 등 자금 문제의 숨통을 트고 지지부진한 경협사업의 새 전환점을 마련하려 했다는 것이다.
재계 일각에서는 그런 배경에서 볼 때 정 회장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것은 외부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개성공단 개발 사업에 심각한 암초가 돌출됐기 때문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결국 평소 대북 경협사업을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유업으로 여기고 성공을 다짐해 온 그가 좀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경협 피로감’에 휩싸여 지내다가 운명을 걸었던 개성공단 개발이 또 다른 벽에 부딪치자 최후의 선택을 한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다.
▲ 지난 6월30일 오전 북한 개성에서 열린 개성공업지구 (개성공단) 착공식에 참석한 정몽헌 회장(오른쪽)이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리종혁 부위원장과 대화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
정몽헌 회장은 대북송금 특검팀에 의해 6월24일 남북교류협력법과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됐다.
특검팀 기소로 시작된 재판에서 정 회장은 대체로 공소사실을 인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달 21일 2차 공판에서 정 회장은 공소사실을 대체로 모두 인정하면서도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하지만 대북송금은 냉전의 긴장관계를 해소하고 대북사업에도 보탬이 되리라는 경영적 판단이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정 회장은 투신 직전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김윤규 사장에게 보내는 유서에서 ‘명예회장(고 정주영 회장)님께서 원했던 대로 모든 대북 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기 바랍니다’라며 자신의 사후에도 대북 사업이 지속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으로 나타났다.
즉 거듭된 검찰 수사와 남북협상 난항 등에 발목이 묶여 지지부진한 대북 사업이 자신의 사후에라도 본 궤도에 오르고, 더욱 활성화되기를 최측근 인사에게 당부한 것이다.
자신이 전력을 다해 매달리고자 한 대북사업이 사법처리 대상으로 전락하고 비자금과 정치자금 제공 의혹으로 훼절된 데 대한 항의와, 자신이 목숨을 내던짐으로써 대북사업을 본 궤도에 오르게 하려는 함의(含意)가 정 회장의 자살에 담겨있지 않느냐는 분석도 가능하다.
특히 정 회장은 가족에게 남긴 유서에서 ‘나의 유분을 금강산에 뿌려주기 바랍니다’고 밝혀 그가 얼마나 금강산관광 등 대북사업에 강한 집념을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북핵 등 주변 환경도 최악]
정몽헌 회장은 정주영 명예회장 타계 이후, 사운을 걸고 줄곧 대북사업에 전력투구해왔다. 그러나 특검법 통과 등으로 대북관계에 제동이 걸리고, 대북송금 문제로 사법적 처벌대상으로 몰린 데다, 1백50억원 정치자금 제공 의혹 등으로 회사 비자금 전반에 대한 검찰의 강도 높은 수사가 시작됐다.
게다가 북핵 문제로 냉기류가 확산되면서 대북 경협의 최일선에 섰던 그는 회사 경영 및 미래와 관련, 심각한 위기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대북사업 성과를 바탕으로 회사를 회생시키겠다는 복안을 지니고 있던 정 회장으로선 말 그대로 사면초가에 빠져 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