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9년 현상공모에서 당선된 남산 국회의사당 건립안 모형 | ||
의원 개개인들이 바랐던 가장 절실한 새 국회 건물의 입지조건은 중앙청과 가까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 의원들의 눈에 띈 곳이 종로 3가와 4가 사이의 종묘 앞이었지만 문화재관리국이 딴죽을 걸고 나섰다. 종묘는 중요한 문화재인데 그 앞에 고층의 중후한 국회의사당을 지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반대로 종묘계획이 백지화된 뒤 58년에 남산이 국회의사당 신축부지로 결정됐다. 59년엔 현상공모를 통해 건립안을 확정지은 뒤 기공식도 하기 전에 약 63%의 정지공사가 진행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울창한 산등성이 벌거숭이가 되고 고요한 산책길이 요란한 발파소리에 허물어지면서 주민들의 불만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언론도 가세해 공사의 폐해에 대해 직격탄을 날렸다.
그런데 이 비난에 공사장에 동원된 장병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그래서 60년 6월 장병들이 일손을 놓아버리는 사상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육군공병단이 “군부대를 공사현장에서 철수시켜야 하겠으니 승낙해달라”며 국방부 장관에게 공문을 보낸 것.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그때는 장면 내각이 군부를 장악할 실질적인 힘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5·16쿠데타가 일어나 남산의 국회의사당 건립 계획은 취소되기에 이른다. 결국 국회의사당 터는 여의도로 결정되고 윤중제 공사가 끝나는 60년대 후반까지 그 건립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