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초빙교수(75)의 ‘역사’회고록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 ||
심지어 서울시내 지하도 공사까지 그에게 보고한 뒤 굴착되었고 수많은 도로의 신설·확장 또한 모두 그에게 보고된 후에 착수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시로 현지시찰을 나가 세세한 것까지 지적하는 통에 아랫사람들은 죽을 맛이었다.
하루는 박 대통령이 헬리콥터를 타고 서울 상공을 돌다가 시장실에 무선전화를 걸어 “지금 정릉 뒷산에 무허가건물 두 채가 지어지고 있어. 빨리 철거하도록 하시오”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
이처럼 권력과 도시 개발에 얽힌 ‘비사’가 최근 책으로 발간돼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70년대 서울 강남 등의 서울 개발 실무를 담당했던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초빙교수(75)의 ‘역사’회고록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한울·전 5권)가 바로 그것.
손씨는 이 책에서 박 대통령의 과도한 ‘현안 챙기기’가 때로는 아랫사람들의 ‘과잉충성’으로 연결됐고, 그 결과 ‘1백년 대계’인 도시계획도 틀어지거나 왜곡됐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에 대해 “오늘날에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과감하다고 할까, 대담하고 무모하다고나 할까. 나쁘게 말하면 ‘폭력’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해괴’한 일이라고도 할 수도 있는 일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진행됐다”고 회고하고 있다.
과연 그때 그 시절 서울시 도시개발을 둘러싸고 어떤 ‘황당한’ 일들이 벌어졌던 걸까. 당시 내로라하는 유력인사들이 얽히고설킨 비사를 중심으로 ‘공룡도시’ 서울의 뒤안길을 살펴봤다.
워커힐호텔 건설은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즉흥적인’ 작품이었다. 김 부장은 61년 7월 하순 어느 날 멜로이 유엔군사령관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다가 그에게서 ‘주한미군과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위락시설을 갖춘 대규모 호텔 건설’을 제의받았다. 그는 곧 호텔 건립 결심을 굳히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설득해 승낙을 받게 된다.
입지 장소 선정도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다. 접근성 주변환경 등 정밀한 실사작업을 거치지 않고 박정희 의장, 김종필 부장, 송요찬 내각수반 등이 이승만 박사의 ‘별장’(지금의 워커힐 자리)에서 휴식을 취하다 ‘누군가’의 권유로 그 자리에 관광휴양시설을 짓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62년 1월5일 기공식이 거행됐고 그 후 2년여 만인 63년 4월 워커힐호텔이 문을 열었다. 자연 박 대통령은 워커힐의 단골손님이 됐다. 박 대통령의 최다 동선이 워커힐 나들이길이 되자 서울시장들의 관심도 자연히 그곳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 대통령의 눈에 쉽게 띄는 곳만이라도 잘 꾸며야 한다는 군대식 전시행정의 표본이었던 셈이다.
대통령의 워커힐 나들이는 갑자기 이뤄지기도 했지만 대개는 하루 전에 결정됐고 경호 필요상 서울시 경찰국장을 통해 시장에게도 알려졌다. 대통령 행차가 오후에 있을 때는 거의 예외 없이 ‘헬멧 쓰고 작업복 입고 지휘봉을 손에 든 채’ 공사현장을 감독하는 시장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서울시 도시계획은 박 대통령과 권력자들의 즉흥적 구상과 아랫사람들의 ‘전시행정’으로 누더기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서울시장들의 ‘대통령 나들이길 포장공사’는 곳곳에서 벌어졌다. 대표적인 것은 성동교에서 워커힐 입구에 이르는 광나루길 공사였다. 너비 10m의 좁은 길이 총 연장 7천3백40m에 너비 30m의 대로로 거듭나게 됐다. 불도저도 많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에 괭이와 삽 등으로 불과 7개월 만에 공사를 마무리지었다고 하니 군사정부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청계고가도로도 이 시기에 지어진 ‘작품’이었다. 당시 김현옥 시장은 ‘도심 한복판에 고가도로 건설은 말도 안된다’는 반대에도 부딪쳤지만 끝까지 밀어붙였다. 박 대통령의 워커힐 내왕을 쉽게 하기 위한 ‘충정’에서 우러나온 결과였다.
[정치자금위해 강남 토지 투기]
66년 7월 윤진우라는 인물이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으로 부임해왔다. 제3한강교가 완공되고 난 뒤인 70년 1월께 당시 김현옥 시장은 윤 과장을 불러 서울의 강남지역을 헬리콥터로 함께 살펴보았다고 한다. 이들은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과천 사당 잠원 양재 등지의 강남지역이 가장 발전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점쳐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대를 둘러봤던 것이다.
그 후 이들은 용산구 한남동 유엔빌리지에 있는 박종규 경호실장 집으로 향했다. 당시 박종규는 김종필 이후락과 함께 3대 실권자로서 막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박 실장은 개발열풍이 불 조짐을 보이던 강남을 천천히 내려다보며 윤 과장에게 물었다.
“헬리콥터로 돌아본 지역 중에서 어느 곳이 가장 장래성이 있고 투자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탄천을 경계로 한 그 서부지역 일대 같습니다(오늘날 강남구가 된 일대의 지역).”
“그러면 그쪽 땅을 사 모으지.”
그리고 약 2주일이 지난 후, 윤 과장이 그 일을 거의 잊고 있을 무렵 시장실에서 연락이 왔다. “제일은행 고태진 전무실에 가면 돈을 줄 테니 받아와서 우선 그 돈으로 땅을 사모으라”는 것이었다.
윤 과장이 찾아가자 고 전무는 책상서랍에서 적금통장 한 개를 꺼내주었다. 원금 3억원짜리였다. 당시는 얼마든지 전매도 가능했고 가명도 쓸 수 있던 시대였기에 윤 과장이 체결한 토지 매입계약서에는 실로 다양한 주소와 가명이 사용됐다.
이 과정에서 자금이 달리자 윤 과장은 김현옥 시장을 찾아가 대책을 세워달라고 했다. 며칠 후 김 시장은 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성곤을 찾아가면 자금을 빌려줄 것이라고 했다(필자 손씨는 김 시장이 김정렴 비서실장에게 협의를 했고 비서실장이 김성곤 위원장에게 돈을 좀 빌려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 뒤 김성곤 위원장이 두 차례에 걸쳐 2억5천만원을 입금시켰다. 그 뒤 더 이상의 자금 공급은 없었다고 한다.
필자 손씨는 71년 윤진우 과장이 청와대 정치자금을 만들 요량으로 매입한 토지가 23만여 평이고 그 결과 20억원에 가까운 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71년 당시 20억원이라는 돈은 지금의 화폐가치로 5천억원을 훨씬 넘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 지난 70년 영동신시가지개발지구를 시찰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 ||
하지만 거대한 정치프로젝트에 관여했던 일개 공무원은 끝내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윤진우 과장은 74년 유신정부의 고급공무원 숙정작업 대상자 명단에 올라 비운의 길을 걷게 된다. ‘강남의 토지매매를 둘러싼 잡음’을 이유로 내걸었다. 실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동물원이 된 핵개발 기지]
박정희 대통령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핵심인물 중 한 사람이 김재춘 대령이었다. 그는 김종필 중심의 ‘주류’와 맞선 ‘비주류’의 우두머리로서 박정희와 한때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그 뒤 공화당 의원을 지내는 등 활발하게 정치활동을 했다.
68년 5월 박정희는 ‘측근’ 김재춘을 조용히 불렀다.
“핵무기 문제를 연구하는 전쟁과학연구소 설치를 위하여 과천면의 청계산 서북쪽 산허리 약 2백만 평을 시급히 구입해야 해. 그런데 이것을 정부에서 구입하면 미국 정보기관 등에서 눈치를 채서 기밀이 누설될 우려가 있지. 그러니 김 장군이 자기 농장을 확장하는 것으로 위장하여 비밀리에 땅을 구입하시오.”
김재춘은 박 대통령 지시에 따라 67년부터 68년까지 청계산 허리에 있는 1백36만 평의 토지를 구입했다.
그런데 뒤늦게 미국에서 데려온 과학자들이 현지답사를 해본 결과 그 곳이 적지가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적의 ‘훌로구미사일’ 등의 유효사정거리 내에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신무기 연구 생산기지는 그 뒤 대전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5공이 수립되면서 미국의 압력으로 이 기지는 사실상 없어졌다.
문제는 거액의 자금을 들여서 구입해둔 1백36만여 평의 땅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였다. 설상가상으로 그 일대가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버렸다. 은행에서 빌린 토지 매입대금의 이자도 엄청나게 불어나고 있었다. 그러니 박 대통령도 방관만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73년께 박 대통령은 김재춘을 데리고 과천면 청계산 자락을 찾았다. 박 대통령은 당시 시찰에서 “이곳을 공원으로 개발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결국 과천 청계산 일대는 대통령 말 한마디에 핵무기연구소에서 동물원으로 용도가 뒤바뀌게 됐다.
그 뒤 김재춘 전 의원은 대공원 건립사업을 시작했으나 석유파동과 부채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서울시가 김 전 의원으로부터 사업권을 넘겨 받아 지금의 서울대공원이 탄생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