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저스의 간판스타로 우뚝
최근 LA 다저스는 구단 공식 미디어 가이드북을 발행하며 표지에 12명의 선수들을 소개했다. 선발 투수 중에는 클레이튼 커쇼, 잭 그레인키, 류현진이, 불펜 투수 중에는 켈리 젠슨과 브라이언 윌슨이, 야수 중에는 맷 켐프, 핸리 라미레즈, 야시엘 푸이그, 애드리안 곤잘레스, 칼 크로포드, 안드레 이디어, A.J.엘리스가 이름을 올렸다. 류현진이 지난해 성적을 바탕으로 구단의 간판 선수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을 미디어 가이드북 표지만으로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 애리조나 캠프에서 만난 류현진은 어느 때보다 편안한 얼굴로 취재진을 상대했다. 1회만 되면 수난을 당하는 ‘1회초 징크스’에 대해서도, ‘2년차 징크스’를 거론하며 공격적인 질문을 해대도 특유의 긍정적인 마인드로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시범경기 현장에서 류현진의 경기를 직접 관전한 MBC스포츠플러스 허구연 해설위원은 “류현진처럼 자신감 있게 피칭하는 선수도 흔치 않다. 메이저리그 2년차가 한 10년은 넘은 선수마냥 영리한 마운드 운용을 해 보인다”며 혀를 내둘렀다. 이에 대한 류현진의 생각이 궁금했다.
“사람들은 나더러 ‘영리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러나 난 내가 그리 영리한 스타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난 포수를 믿고, 포수가 사인하는 대로 공을 던질 뿐이다.”
류현진은 자신도 또 선수들도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됐고, 이해심이 높아지면서 다저스 생활이 지난해보다 훨씬 편해졌다고 말한다.
“이젠 메이저리그 취재 기자들도 나에게 담배 피운다고 뭐라 하지 않는다. 담배를 피우고, 불펜피칭을 걸러도 잘 던진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스프링캠프에서 달리기부터 시작해 여러 가지의 문제점이 언론을 통해 불거졌다. 아무래도 그런 부분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그런 얘기가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기자들도 나에 대한 이해의 폭이 커졌다는 걸 의미한다.”
# 홈런 울렁증
류현진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피홈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고 말한다. 지난해 초반에는 컨디션이 다 올라오지 않은 상태에서 등판해 홈런을 맞아 가니까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또 맞으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이 생겼다는 것. 그런데 올해 시범경기를 치르는 동안에는 “그냥 쳐봐라” 하는 마음으로 공을 던진다고 한다. 그랬더니 결과가 더 좋게 나왔단다.
류현진은 “처음엔 타석에 서는 게 어색했지만 안타를 칠수록 점점 재미가 붙는다”고 말했다. 홍순국 사진전문기자
“투수는 마운드에 서면 누구에게 기댈 수가 없다. 오로지 포수의 사인에 맞게 제구가 되는 공을 던져야 한다. 그러나 실투가 생기고, 그게 홈런으로 이어지면 순간 멍해진다. 얻어맞는 데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 지난해 몇 차례 그런 경험을 했었다. 올해는 가급적 편하게 생각하고 내 자신과의 싸움에 집중하려고 한다. 자신감 있게 승부하는 게 최고 아니겠나.”
류현진은 자신의 구속이 얼마 나왔는지에 대해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점수만 안 주면 되지, 구속이 많이 나오고, 적게 나오고는 자신의 스타일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한마디 던진다. “난 스피드가 높은 투수가 아니지 않나.”
# 야구보다 어려운 인간관계
류현진의 야구인생은 아마도 LA 다저스 입단 전과 후로 나뉠 것이다. 한국에서 활약할 때도 최고의 좌완 투수로 손색없는 모습을 선보였지만, 메이저리그 데뷔 후에는 이전 한화 이글스 때의 인기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초특급 스타플레이어로 떠올랐다.
“미국에 있을 때는 사인요청을 받을 때나 인기를 실감하지만, 한국에 가면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할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게 된다. 덕분에 좋은 일들도 많았고, 사람들과 힘든 일도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내 마음 같을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오랫동안 인연을 맺은 사람들 중에서 몇몇이 ‘류현진이 변했다’라고 ‘뒷담화’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통화가 어렵다고, 문자해도 답장이 없다고, 만나기가 힘들다는 이유들로 서운함을 표했던 얘기들이 류현진의 귀에 들렸던 것이다.
“난 이전 한화 이글스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단, 환경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내가 공식적으로 가야 할 곳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다 보니 이전처럼 개인 시간을 갖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은 나의 그런 상황에 대해 이해하기보다는 사람이 변했다고 뭐라 한다. 가끔은 기다려줄 줄 아는 배려도 필요한 거 아닌가. 많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 김인식 감독과의 라면 CF
류현진은 지난 연말, 한국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안 여러 개의 CF를 찍었다. 휴대폰, 은행, 치킨, 라면 등 종류도 다양했다. 그중에서 류현진은 최근 방영되고 있는 김인식 감독과의 라면 광고 촬영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광고 콘셉트가 재미있었다. 내가 라면을 먹고 있으면 감독님이 오셔서 내 등을 탁 치신다. 그때 내가 ‘오 감독님?’ 하고 놀라서 쳐다보면 감독님께서 ‘야, 라면 맛있냐?’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먹던 그릇을 내밀며 ‘감독님, 드셔보실래요?’ 하면 감독님이 ‘새로 끓여’라고 대답하는 내용인데, 감독님이 촬영 내내 애드리브를 많이 치셔서 웃느라고 촬영이 지연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8시간가량 찍으면서도 감독님 덕분에 훨씬 재미있고 수월하게 진행됐다. 나한테는 감독님 이전에 아버지 같은 분이시고, 그런 분과 CF까지 찍었으니, 금상첨화였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광고 촬영이다.”
# 마운드보다 타석이 재밌다?
내셔널리그에 속한 LA 다저스는 투수들도 타석에 선다. 지난해 헬멧을 쓰고 방망이를 든 류현진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봤던 팬들이 한두 명이 아닐 것이다. 류현진의 지난 시즌 타율은 리그 투수 중 8위인 2할7리의 타율을 기록했다.
왼쪽부터 클레이튼 커쇼, 잭 그레인키.
과연 올해는 어떻게 될까?
“난 타석에 서는 게 재밌다. 한국에 있을 때도 타격 훈련하는 선수들 보면서 ‘아, 나도 타격 훈련해봤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소원을 미국에서 풀게 됐다. 처음에는 타석에 서는 게 어색하고 쑥스럽기도 했지만, 안타가 터지면서 점점 재미를 붙이는 것 같다. 우리 팀의 맥과이어 코치가 나한테 올 시즌 홈런 1개를 기대한다고 말씀하시더라. 그래서 내가 홈런은 무리라고 말씀드렸다. 홈런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류현진은 커쇼, 그레인키 등 선발진 5명이 타격 점수를 매기면서 내기를 벌인다는 얘기도 털어 놓았다.
“선발투수들끼리 안타, 번트, 볼넷,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등을 구분해 점수를 매긴다. 번트를 실패하거나 삼구 삼진을 당하면 오히려 마이너스 점수가 붙는다. 반면에 공을 7개 이상 보면 점수가 플러스되기도 한다. 이렇게 점수를 매겨서 합계를 내 제일 높게 나온 선수에게 100달러씩을 걷어 500달러를 전달한다. 지난해 난 딱 한 번 그 돈을 받았다.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이 그레인키였다. 올해는 두 번 정도 받는 게 목표다. 내년에는 세 번이고. 5명의 선발투수들의 사적인 게임인데, 은근히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한다(웃음).”
애리조나에 있는 동안 몇 차례 류현진이 머물고 있는 숙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부엌. 각종 그릇들과 냄비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전날 저녁을 해먹었다는 가스레인지와 싱크대는 사용 흔적을 못 찾을 정도로 반짝반짝 빛이 나 있었다. 식기세척기 안에 놓여 있는 그릇들이 크기별로 정리돼 있는 장면에선 류현진의 솜씨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혹시 우렁각시를 키우는 거 아니냐”는 농담에 류현진은 “내가 다 한 거다. 다른 데는 지저분해도 상관없는데, 부엌은 깨끗한 상태가 돼야 마음이 편하다”며 보기와는 다르게(?) 깔끔한 면모를 내보였다.
여자친구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아직 없다”는 단답형이, 결혼은 언제쯤 할 것 같으냐고 물으면 “갈 때 되면 가겠죠”라는 말로 심드렁해한다. 아직은 이성에 대한 관심보다 야구에 더 집중하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범경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골프를 치며 여가 시간을 보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못하고 있다는 류현진. 그는 17일 콜로라도를 상대로 시범경기 마지막 경기를 치른 뒤 23일 호주 시드니의 시드니 크리켓 그라운드에서 열리는 정규시즌 개막 두 번째 경기에 선발로 등판할 예정이다.
“호주 개막전을 떠올리면 가슴이 설렌다. 남들은 힘들다 어쩌다 하지만, 난 기분 좋게 보내고 올 것이다. 개막 2연전에서 커쇼 다음으로 나선다는 게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 빨리 시즌이 시작됐으면 좋겠다. 그래야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도 다가오는 거니까(웃음).”
애리조나=이영미 스포츠전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