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에서 터져나온 한 의원 보좌관의 말이다. ‘썬앤문 그룹’의 문병욱 회장이 자신과 관련된 갖가지 비리가 불거질 만하면 어김없이 엉뚱한 곳에서 또다른 대형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늘 반사이익을 챙겼다는 점을 빗댄 표현이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의 고교 후배라는 점을 한껏 과시, 노 대통령 측근들과의 친분설 등 여러 구설수에 오르내려 야당으로부터 또 다른 ‘게이트’의 주인공으로 오래 전부터 지목되어 왔던 터. 여기에 지난 DJ정권의 실세와 가깝다는 소문이 난 김성래 전 썬앤문 부회장까지 가세, 썬앤문그룹의 여러 의혹은 어느덧 ‘권력형 비리’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지난 6월 썬앤문그룹 문병욱 회장이 국세청을 상대로 로비를 벌여 무려 1백57억원 상당을 탈세했다는 혐의로 구속되면서 이른바 ‘문병욱 게이트’의 비화 가능성은 불거지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상고 4년 후배라는 점과 함께, 그 주변에 대통령의 핵심 측근 이름이 자주 오르내린다는 소문이 나돌아 정가에도 관심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당시 대북송금 특검과 김영완씨의 현대 비자금 관리 사건이 정국을 온통 뒤덮으면서 문 회장 얘기는 쏙 들어가 버렸다.
4개월 만인 최근 다시 김성래 전 부회장에 의해 ‘썬앤문이 대통령 측근들에게 금품을 제공했다’는 내용이 불거졌으나, 이번에는 또 노 대통령의 재신임 정국이 몰아치면서 다시 한번 격랑의 파도 속에 잠기는 느낌이다.
하지만 썬앤문 사건을 예의주시하는 이들은 여전히 그 파장이 만만치않음을 확신하는 눈치다. 관련 당사자들이 모두 구속중인 가운데 현재 이 사건은 크고작은 갖가지 의혹들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첫 번째 의혹. 최근 최대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는 것으로 김성래 전 썬앤문그룹 부회장이 과연 이광재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에게 수백만원을 실제로 전달했는지 여부다. 문 회장이 자신을 농협 사기 대출 혐의로 고발하자, 이에 앙심을 품은 김 전 부회장은 측근 회의를 통해 당시 부하 직원들에게 “이광재 실장에게 자기앞수표 1천만원을 전달했다”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 이를 이준희 이사가 녹취해서 검찰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 실장은 “김 전 부회장을 알지도 못하며 돈을 받은 적도 없다”고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김 전 부회장의 최측근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청와대와 관련한 너무 민감한 사안이라 현재로선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며 여운을 남겼다. 김 전 부회장의 변호인도 언론과의 접촉을 애써 피하려 하지만, 이 실장에게 ‘용돈’이든 ‘청탁성 뇌물’이든 금품을 전달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고 있다. 현재로선 김 전 부회장이 문 회장을 골탕먹일 목적으로 다소 의도적으로 이 같은 내용을 녹음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하지만 허위 사실을 꾸몄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평소 자기 과시를 좋아했던 문 회장의 성향으로 보아 김 전 부회장이 어떤 식으로든 이와 비슷한 얘기를 전해듣고 옮겼을 것이란 관측도 나돈다. 두 번째, 검찰의 미온적인 수사태도 역시 의혹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나라당은 “그 흔한 계좌추적도 하지 않는 등 검찰 수사가 너무 느슨한 점은 분명히 있다”며 의심을 감추지 않고 있다.
반면 검찰은 김 전 부회장의 진술이 일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이 폭로 역시 대수롭지 않은 일로 넘어가려는 분위기다. 검찰은 “현재로선 이 실장을 소환 조사할 계획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검찰이 김 전 부회장의 진술에 신빙성을 두지 않는 부분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지난 1월 초 자신이 직접 문 회장과 노 대통령의 면담을 주선했다고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조사 결과 이미 노 대통령과 문 회장은 고교 선후배로 이전부터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굳이 김 부회장이 소개하고 말고 할 필요가 없었다는 설명이다.
다른 하나는 지난 대선 과정에서 썬앤문측이 여권에 95억원을 전달했음을 암시하는 듯한 대화 내용이 녹취록에 담겨 있다는 것인데, 이 역시 근거없는 소문을 언급한 것에 불과한 수준이라는 것. 썬앤문 관계자 역시 지난 5일 서울지검 기자실을 찾아가 “그룹 규모에 비추어볼 때 우리가 여권에 95억원을 전달했다는 것은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세 번째 의혹은 농협 대출 사기 사건의 석연치 않은 마무리에 있다. 농협은 김 전 부회장이 경기도 양평 TPC골프장 회원권을 담보로 1백15억원대의 사기 대출을 받은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골프장에 대한 가압류 조치를 스스로 말소시킨 점이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 지난 11일 국정감사에 출석해 질문에 답하는 이 광재 국정상황실장. 그는 1천만원 수수 의혹에 대해 “김성래씨를 알지도 못하고 받은 적도 없 다”며 부인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당초 농협은 문 회장측이 김 전 부회장을 사기혐의로 고소한 지난 4월 초, TPC골프장에 대해 가압류 조치를 신청했다. 대출을 받은 김 전 부회장의 공식 직함이 썬앤문그룹 부회장이었던 만큼 이 그룹의 재산인 골프장에 대한 압류조치는 당연한 수순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농협은 지난 7월 가압류 조치를 자진해서 해지시켰던 것. 그리고 1백억원이 넘는 손해를 고스란히 감수하겠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 이 사건은 농협의 고위인사 가운데 또다른 누군가가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 의문으로 남아 있다. 또한 문 회장 역시 농협 대출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과 함께 정치권 인사가 대출 과정에 개입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는 상태이다.
네 번째로 산업은행도 썬앤문 그룹에 특혜를 베풀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달 30일 산업은행 국정감사에서 민국당 강숙자 의원은 “구조조정전문회사인 썬앤문이 2001년 6월 서울 강남의 뉴월드호텔을 3백91억원에 낙찰받고 낙찰금 10%만 납부한 상태에서 산은이 2백억원을 대출했다”면서 “뉴월드호텔은 이미 하나은행에 14억원을 받을 채권이 있는 상태였는데, 또 대출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졌다.
그는 또 “산은은 썬앤문이 산자부로부터 시정조치를 받았고, 뉴월드비상대책위원회가 대출계획 철회를 요청했는데도 대출을 강행해 총 대출금만 4백83억원에 이르고 있다”며 “이는 부실여신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금융권 주변에서는 정치권의 외압으로 산은이 썬앤문에 특혜를 베풀었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이에 대해 산은의 한 관계자는 “잔액증명서를 잘못 발급한 것은 순전히 오퍼레이터들이 전산 입력하는 과정에서 실수한 해프닝”이라고 해명했다.
또 항간에 일고 있는 특혜 의혹에 대해서도 이 관계자는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특혜 대출 얘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다”며 “우리 은행에는 대출 심사 CEO 제도가 있어서 특혜대출이란 있을 수 없다”며 항간의 의혹을 일축했다.
그렇지만 한나라당 정의화 의원은 “잔액증명서 발급 당시 은행 관계자 세 명이 결재를 거친 점을 감안할 때 단순한 실수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반박했다. 다섯 번째로 썬앤문의 권력형 로비 의혹은 비단 현 정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업계 일각에서는 문 회장과 김 전 부회장의 만남이 절묘했다는 얘기가 오가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김 전 부회장은 지난 DJ정권의 실세들과 폭넓은 인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전 정권 실세인 P씨와 친하다는 소문이 오래 전부터 나돌았다. 썬앤문그룹이 97년부터 2002년 사이에 급속도로 팽창했음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항간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올해 들어 급격히 틀어지기 시작한 것도 자신의 고교 선배인 노 대통령의 당선으로 직접 권력층과 선이 닿는 것으로 자신한 문 회장이 이제 더이상 김 전 부회장의 도움이 필요없어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그래서 나온다.
김지영 기자 you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