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8월 31일 프랑스 파리의 알마 터널에서 자동차 사고가 났다. 이 사고로 다이애나 비와 그의 연인 도디 파예드, 운전수 헨리 폴 등이 숨졌다. 오른쪽 사진은 다이애나의 장례식 모습.
줄기차게 음모론을 제기한 사람은 사고 당시 다이애나의 연인이었으며 함께 목숨을 잃은 도디 파예드의 아버지 모하메드 알-파예드였다. 그리고 2003년 10월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 <데일리미러>가 다이애나의 편지 하나를 공개하면서(그 진위는 확실하지 않지만) 음모론은 훨훨 타올랐다. 찰스 황태자와의 이혼 후 쓴 편지인데 “내 인생에서 지금은 가장 위험한 국면”이라며 다이애나는 “내 전 남편은 자동차 사고를 계획하고 있다”고 말한다. 카밀라 파커-볼스와의 재혼을 계획하고 있던 찰스에겐 다이애나의 존재가 껄끄러웠기에 그녀를 제거하려 한다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얘기처럼 들리지만, 이 편지 이후 점점 더 의혹은 짙어졌고 결국 2006년 재조사에 들어간다.
2007년 1월 8일 본격적으로 시작된 조사는 판사 출신인 스콧 베이커가 실무를 담당했고 총 20가지의 이슈를 뽑았다.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헨리 폴은 정말 음주 운전을 했는가? 사고에 영향을 준 다른 차량은 없었나? 파파라치 때문에 사고가 일어난 것인가? 터널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가? 응급 처치 과정에서 문제는 없었나? 당시 다이애나는 임신 중이었나? 다이애나와 도디는 약혼을 발표할 예정이었나? 사고에 영국의 정보기관이 관여했는가? 6개월 동안 250명의 증인을 동원해 조사가 이뤄졌고, 11명의 배심원단은 운전수의 과실 치사로 인한 죽음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 어떤 새로운 사실도 밝혀내지 못한 채 세금만 축낸 조사였다.
이에 수많은 음모론이 나돌았다. 가장 먼저 사고 당시 차를 몰았던 헨리 폴이 영국 정보기관의 끄나풀은 아닌지 의심됐다. 사망 당시 그의 계좌에 있었던 거액의 잔고와 적잖은 재산 규모도 의심의 근거였다. 알-파예드는 헨리 폴이 영국의 정보기관인 MI5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 어떤 증거도 나타나지 않자 알-파예드는 또 다른 증거를 들이댔다. 그는 개인적으로 법의학자를 고용했고, 사고 당시 헨리 폴이 취한 상태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근거는 사망 직전 리츠 호텔 엘리베이터에 설치된 CCTV였다. 그 화면엔 다이애나와 도디 그리고 헨리 폴이 있었는데, 폴의 모습은 너무나 멀쩡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프랑스의 법의학자인 로베르 포레스트는 헨리 폴처럼 대단한 내성을 지닌 알코올중독자는 술을 마신 상태에서 충분히 멀쩡하게 보일 수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알-파예드는 수긍하지 않았다. 게다가 헨리 폴의 부모도 그날 자신의 아들은 절대 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건 당시 프랑스 경찰의 조사서엔 허용치의 세 배에 달하는 혈중 알코올 농도가 검출됐고, 전문가의 견해에 의하면 평소에 즐기던 술인 리카르를 열 잔 정도 마신 상태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영국 해로즈 백화점 제단에 다이애나와 도디의 사진이 있다. 오른쪽은 도디 부친 모하메드 알-파예드.
이때 전직 MI6였던 리처드 톰린슨이 등장해 헨리 폴뿐만 아니라 다이애나의 보디가드였던 트레버 리스-존스(사고 당시 동승. 중상 입었지만 생존)와 케스 윙필드도 요원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운전수의 눈을 순간적으로 멀게 만드는 섬광등을 터트리는 방식으로 MI6가 사고를 조장했다고 말했다. 이에 영국의 정보기관인 MI5(국내 파트)와 MI6(해외 파트)에 대한 수사가 이뤄졌지만 톰린슨의 주장은 허위로 밝혀졌다.
도디 파예드와의 결혼설 혹은 임신설도 알-파예드가 끊임없이 주장했던 부분이었다. 당시 다이애나는 도디 파예드의 아이를 가진 상태였는데, 영국 왕실로서는 무슬림과 사돈 관계가 되는 것에 대해 언짢게 생각해 결국 암살을 기획했다는 것이다. 알-파예드는 2008년 법정 증언에서 이 일엔 엘리자베스 여왕과 그의 남편인 에딘버러 공작과 찰스 황태자는 물론, 다이애나의 언니인 레이디 새러까지 연루됐다고 말했다.
알-파예드에 의하면 두 사람은 사망 다음 날인 9월 1일에 약혼을 발표할 예정이었다고. 실제로 8월 30일 파리의 한 주얼리 샵 CCTV엔 도디의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반지를 사간 건 아니었고, 카탈로그를 가져갔을 뿐이지만).
하지만 약혼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부정했다. 그녀가 죽기 전 일주일 동안 통화했던 지인들은 다이애나에게 약혼이나 결혼에 대한 의지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다이애나의 전직 비서였던 패트릭 제프슨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CCTV의 다이애나는 평소 뭔가 불편할 때의 표정을 짓고 있는데, 이것은 도디와의 관계가 그다지 친숙한 단계는 아닌 걸 의미한다고 말했다(사실 당시 그들은 만난 지 두 달도 안 된 상태였다).
임신설도 신빙성이 없었다. 이미 검시관은 사망 당시 다이애나는 홀몸이었다고 검사 결과를 밝혔고, 주변 친구들도 그녀가 피임약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생리 주기도 일정했다고 증언했다. 알-파예드는 사망 당일 파리 근교의 아파트로 간 것은 장차 태어날 아이를 위한 방을 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근거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음모론은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 주엔 사라진 CCTV 화면과 파파라치의 자살 등에 얽힌 이야기를 하려 한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