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천 회사의 최초 설립자이자 사실상의 대표였던 김각노 전 사장은 최근 <일요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최근 문제 되고 있는 문명욱 썬앤문 회장간의 관계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특히 김 전 사장은 문 회장에 대해서는 “장수천 사업의 전망이 불투명하자 도중에 발을 뺐다”고 주장했다. 또한 김 전 사장은 문 회장이 대선 때 노 대통령을 적극 돕게 된 것은 “생수사업 당시 동문으로써 (노 대통령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전 사장은 그동안 장수천의 주요 인물로 언론에 공개된 뒤 취재진들의 집중적인 취재 대상이 되었으나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싫다”는 이유로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해왔던 터였다.
<일요신문>을 통해 처음 말문을 연 김 전 사장은 “나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장수천이 마치 정치 비리의 원흉인 양 비치는 것이 가슴 아프다”고 털어놓았다.
그동안 언론을 통해 김 전 사장은 장수천의 이사 겸 사업본부장으로 알려져왔다. 하지만 그는 지난 93년 장수천을 설립한 사실상 장수천의 창립자였고, 95년 10월 설립된 장수천의 첫 대표이사였다.
지난 96년 노 대통령이 이 사업에 뛰어들면서 그는 정확히 50 대 50의 지분을 나눠갖는 계약과 함께 노 대통령과 동업자가 되었다. 이후 노 대통령의 측근 인사들이 속속 이 회사 주변에 포진하면서 장수천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노무현 인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김 전 사장 역시 자연스럽게 여기에 편입된 채 6년간 그들과 운명을 같이 했다.
당초 취재 요청에 “나는 부산상고 동문도 노무현 캠프 인맥도 아닌 순수 생수 사업가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한사코 고사하던 그는 “내가 말을 안해도 나와 관련된 기사가 자꾸 나가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하겠다”며 인터뷰 의사를 밝혔다.
그는 “나는 아무런 정치적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할 수 있다”며 “노 대통령측 사람들이 열심히 했지만, 경험이 적고 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뛰어들다 보니 체계화된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 김각노 전 사장은 이기명씨가 장수천 빚 18억원을 갚아준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으나, 검찰은 강금원씨가 무상대여해줬다고 발표했다. 이종현 기자 | ||
―노 대통령과는 어떤 인연으로 함께 사업을 하게 됐나.
▲그에 앞서 우선 장수천의 역사부터 간단히 설명하겠다. 공장이 있던 옥천군 청성면 장수리의 땅은 우리 선조 대대로 내려오는 이름난 약수터였다. 고향 이름을 따서 내가 ‘장수천’이라고 하는 이름을 짓고 생수사업을 위한 첫 개발의 삽을 든 것이 93년이었다. 95년에 시설이 미비하다는 이유로 환경부로부터 보완명령이 떨어졌고 그러면서 추가 자금이 필요하게 되었다. 노 대통령과의 인연은 그때 시작되었다. 매제인 이성면 민주당 구미지구당위원장이 내 사업에 보증을 서게 되었는데, 거기에 매제의 부탁으로 노 대통령도 연대보증을 서 주면서 첫 인연을 맺었다. 그런데 이후 장수천의 생수사업 전망이 밝다는 정보를 들었는지 현장을 직접 방문하는 등 보다 더 구체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추가 비용에 대해 본격적으로 투자를 하기 시작했고, 나와 동업계약을 맺었다. 96년 당시에는 회사 사정이 어렵다 좋다 말할 단계도 안된다. 그때는 사업을 처음 시작하는 준비 단계였다.
―97년 장수천의 대표이사 자리를 노 대통령의 비서인 홍경태씨에게 넘겨준 이유는.
▲솔직히 당시 노 대통령은 전직 국회의원이었지만 어느 정도 알려진 인물 아니었나. 사업을 하다보면 여러가지 면에서 배경이 필요한 측면이 있다. 나는 사업 자체에 목적이 있었지 자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동업 형식이지만 명목상 대표는 그쪽(노 대통령측)에서 맡고 나는 사장으로 실질적인 일선 업무를 맡겠다고 했다. 또 사실 투자 금액도 그쪽이 나보다 훨씬 컸고. 그래서 대통령의 대리인격인 홍씨가 대표이사를 맡고 난 사장을 맡았다.
―사업 전망이 밝다고 해서 뛰어들었는데 왜 처음부터 어려움을 겪었나.
▲결정적인 어려움은 사업시작 단계에서 장수천의 판매회사로 나서기로 했던 P사와의 OEM계약이 무산되면서부터였다. 당시 전국적인 생수 판매망을 갖고 있던 P사는 직접 현장을 방문한 뒤 ‘반자동식의 현 기계설비로는 너무 조악하니까 전자동 시스템으로 해서 제대로 하자. 월 30만 통은 소화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난 사실 그냥 안전하게 갔으면 했다. 하지만 정치하는 양반들은 확실히 통이 좀 크더라. 노 대통령도 그때 P사의 확신에 찬 전망을 접하고 자신감을 가졌던 것 같다. 하긴 당시 이론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기계 설비 자금 30억원은 은행 리스로 가능했고, 공장 시설만 갖춰지고 본격 생산이 이뤄지면 P사에서 OEM계약 보증금조로 20억∼30억원을 내놓겠다고 했으니 그것으로 변제가 되는 것이다. 이후 월 30만 통만 소화하면 최소 월 1억5천만원 이상 수익이 떨어지는 셈이다. 그래서 당초 97년 7월까지 모든 준비를 끝내고 8월부터 생산에 들어가기로 했으나, 그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준공허가가 97년 10월31일에야 났으니. 그러자 P사에서는 장수천 대신 다른 생수 제조회사와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당시 OEM계약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약속된 보증금 20억∼30억원만 들어왔어도 지금의 문제가 생길 까닭이 없었다.
―문병욱 썬앤문 회장이 생수사업에 뛰어든 것이 98년 4월인데, 혹시 장수천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문 회장의 ‘명수참물’은 사실 P사와의 계약이 틀어지면서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다. 장수천으로서는 새로운 판매회사가 필요했고, 당시 대표였던 홍씨가 이 일에 나서게 됐다. 명수참물의 공동대표인 전아무개씨와 문 회장 모두 홍씨의 부산상고 선배들 아닌가. 특히 호텔업을 하는 문 회장은 현금 동원력도 뛰어나고, 또 관련 사업 기반으로 인해 생수 판매망에도 뛰어난 수완을 발휘할 수 있는 것처럼 들었다. 하지만 실제 사정은 전혀 달랐다. 문 회장측의 당초 약속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또한 실제 재무상태를 알아보니 듣던 것과는 달리 상당히 열악했다. 판매망도 허술했고, 결정적으로 문 회장이 그다지 이 사업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OEM계약 보증금에 대한 기대는커녕 제대로 판매망을 갖출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런 마당에 뜻하지 않은 악재가 또 터져나왔다. 98년 8월 중부지방에 수재가 일어나면서 공장의 원수통에 그만 뻘 물이 들어간 것이다. 생산라인은 다시 중단되는 치명타를 입었고, 그러자 명수참물도 곧바로 돌아서 버렸다.
―안희정씨에 의해 99년 설립된 ‘오아시스 워터’사는 어떤 계기로 만들어졌나.
▲자꾸 악재가 겹치면서 사업이 크게 흔들리자 노 대통령측에서 ‘이거 큰일 나겠다’ 싶었는지 98년 11월 보수공사를 마친 뒤 노 대통령의 친구인 선봉술씨가 대표이사를 맡으면서 이때부터 대통령측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안희정씨도 이때부터 자주 만났다. 문제는 판매회사였다. 나는 ‘좀 어렵더라도 판매노하우를 갖춘 제대로 된 판매회사와 OEM계약을 맺자’고 주장했으나, 그쪽에서 좀 욕심이 난 듯싶다. 아예 판매회사도 직접 설립해서 운영해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99년 7월에 만들어진 것이 안씨가 직접 대표이사로 뛰어든 ‘오아시스 워터’였다.
▲ 지난해 5월28일 장수천에 대해 해명회견을 하는 노무현 대통령, 지난달 2일 검찰에 출두하는 선봉술씨, 지난달 14일 구속수감된 안희정씨(왼쪽부터). 청와대사진기자단 ·임준선·이종현 기자 | ||
▲결정적으로 30억원의 리스에 대한 이자가 너무 부담이 되었다. 98년 종로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노 대통령도 ‘정 안되겠으면 더 이상 큰일 나기 전에 빨리 정리하자’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내가 당시 대표이사였던 선씨에게 ‘이대로 접기에는 너무 아까우니 조금만 더 해보자’고 설득, 현지 공장을 선씨에게 맡기고 나는 서울로 올라와서 사업본부장을 맡아 안씨와 함께 직접 판매현장에 뛰어들었다. 그래도 2000년 한 해는 가장 활발하게 공장을 움직였다. 당시 생수 판매업계 1인자라고 하는 최아무개씨도 내가 어렵사리 영업전무로 영입했다. 하지만 제대로 사업다운 사업을 한 해는 그 해 일년이 전부였다. 밀려드는 은행빚을 감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노 대통령 역시 당시 언론에 의해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면서 골치아픈 사업을 빨리 정리하고 싶었던 듯싶다. 결국 2001년 10월경에 공장을 경매로 넘기면서 정리수순에 들어갔다. 당시 명륜동 자택을 방문했던 내게 노 대통령이 반농담조로 ‘으이그, 이 웬수땜에 내가 생수사업에 뛰어들어가지고 이 고생이야’라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결국 실패한 사업인 이 장수천의 빚 변제 문제가 지금 대통령 측근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는 것 아닌가.
▲사실 내가 사업본부장으로 나서서 서울에 뛰어든 이후부터는 선씨가 모든 경영을 맡아 했다. 하지만 처음 내가 장수천 간판을 걸었듯이 마지막 간판 내리는 일도 내가 했다. 그래서 빚 변제에 대해서는 나도 대략은 안다. 당시 34억원의 빚 가운데 4억원은 공장경매로 조달했고, 12억원은 원래 선씨가 보증을 선 것이 있었다. 16억원은 2002년 초까지 다 해결이 되었다. 나머지 18억원이 지금 문제가 되는 듯한데, 원래 이기명씨도 처음 노 대통령이 사업에 뛰어들 때 직접 현장을 같이 방문하는 등 많은 관심을 보였다. 나중에 언론에 의해서 이씨의 용인땅 문제가 불거지길래 ‘후원자인 이씨가 노 대통령의 빚 변제를 도와줬구나’ 하고 생각했다.
―노 대통령은 당시 사업에 어느정도 관여했나. 그리고 이광재 강금원씨 등도 관여했나
▲노 대통령은 처음 사업에 뛰어들던 때인 96년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이후 대리인격으로 후배인 홍씨를 내세웠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각종 선거를 치르는 등 정치 일정 때문인지 직접적으로 사업에 뛰어든 적은 거의 없다. 다만 사업에 자꾸 악재가 겹치면서 잘 풀리지 않자 걱정하는 말을 여러 차례 전해듣기는 했다. 이광재씨는 안희정씨 등을 통해서 몇 번 봤고, 노 대통령의 개인 연구회 사무실에서도 몇 차례 가서 본 적이 있다. 강금원씨는 선봉술씨의 친구 정도로 알았다. 하지만 이들은 당시 생수사업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