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윤성 기자 kysplanet@ilyo.co.kr
세월호 침몰 직후 찍힌 한 장의 사진이 온 국민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 사고 당시 구명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배에서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하고, 창문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영상 캡처 사진이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면서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를 표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포에 떨며 창문 안에서 밖의 구조작업을 지켜보는 수많은 학생들의 눈빛은 자신들도 곧 구조될 것이라는 희망과 또 다른 절망이 교차했을 것이다.
단원고 학생의 119 구조신고에 의해 해경이 사고지점에 처음 도착한 시각은 오전 9시 30분께였다. 그런데 당시 최초 도착한 배는 목포해경 123함(110t)이라는 ‘경비함’이었다. 전문 구조선이 아닌 해안을 감시하는 경비함이었다. 당연히 특수구조요원이 없었고 장비도 없었다. 그들이 벌인 구조활동은 배에서 탈출한 사람들을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게 전부였다.
이에 대해 범정부 사고대책본부는 23일 브리핑에서 “사고 직후 도착한 선박은 일반 해양 경찰 직원이 타고 있었고, 바다에 떠 있는 사람들의 생명이 급박해 이들을 먼저 구조했다”고 해명했다. 또한 “당시 도착한 함정은 특수 구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일반 해양 경찰 직원이 타고 있어 창문을 깨는 등의 장비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고 밝혔다.
해경의 해명 기저에는 ‘당시 상황으로 그 정도 구했으면 된 것 아니냐’는 인식이 깔려 있는 듯하다. 하지만 ‘구조’라는 단어는 ‘재난 따위를 당하여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을 구하여 주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얘기다. 전문특수요원이 당연히 구조현장에 1착으로 도착해야 한다. 그것이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시스템이다.
하지만 해경은 구조신호를 받고 전문구조함이 아니라 ‘경비함’을 먼저 띄워놓고 “바다에 빠진 탑승객을 구조하는 데 신속한 출동이 한몫했다”며 자기방어를 하고 있다. 창문 깰 망치 하나, 구조자를 건질 밧줄 하나 챙기지 않고 무작정 현장에 ‘일찍’ 도착한 것이 그들이 말하는 구조의 정의다.
해군해상구조대가 구조장비를 점검하고 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하지만 장비도 없이 일찍 도착한 것에 위안을 삼는 그들의 구조상식으로는 창문을 깨고 밧줄을 던져주는 최소한의 기본 절차조차도 생소했을 것이다. 수색 및 구조에 대한 매뉴얼은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초기 대응이 미숙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만 구출하는 것도 버거웠을 것이다.
해경이 평소 매뉴얼, 또는 매뉴얼이 없으면 초동대처에 대한 최소한의 대응방식 정도만 몸에 익혀 놓았어도 세월호 침몰 뒤 초기 구조율 0%라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전문가는 “사건 발생 초기 맨 먼저 선체투입조가 선장실에 진입해 마이크로 승객들에게 비상탈출을 지시하고, 일부는 구명보트를 펼치며 갑판 위에서 구조 활동을 전개하고, 해상조는 수많은 바깥창문을 깨부수고 구명용 밧줄을 내려 보내는 정도의 기초적인 초기 구조 활동만 했어도 수십 명은 살려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경의 ‘준비되지 않은’ 무뇌 구조 활동에 국민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 해경의 초기대응이 이렇게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그 뒤의 구조 활동이 적극적이고 체계적이었다면 또 다른 결과를 낳았을 수도 있었다. 특히 침수가 진행된 후에도 완전 침몰 때까지 2시간 가까이 배가 수면 위로 떠 있었던 만큼 크레인이나 바지선 등을 동원해 더 이상 침몰되지 않도록 뜬 상태를 유지시켰으면 에어포켓을 확보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해경 지휘 라인이 한 일이라고는 가라앉는 배를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대표적인 것은 역시 해경 등 구조주체의 관료주의적 대응이다.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전문성 있는 민간인들을 전혀 활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효율적인 인력 운용으로 최선의 결과를 얻어야 하는데, 오히려 전문가들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그렇다고 특출한 대안을 내놓는 것도 아니다. 그냥 시간만 보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운 행태다.
해경과 어민들이 구조작업을 벌이는 모습. 정부와 해경의 초기대응 미흡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사진제공=해양경찰청
이런 관료들의 자기 밥그릇 챙기기 행위는 더 안타까운 점을 자아내고 있다. 해경이 침몰 직후부터 UDT 동지회의 인력과 장비를 적극 운용했다면 구조자를 확보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 때문이다. UDT 동지회 권경락 회장은 이에 대해 “선체가 수면 아래로 내려가기 전에 (사고 다음 날인) 17일부터 표면공기 공급방식을 통해 작업을 했다면 생존자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했을 것이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고 하더라도 작업을 했다면 시신 수색에도 조금이라도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UDT 요원들이 들어갔다면 초기 유리창을 깨서 진로도 수월하게 개척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실 UDT 동지회는 사고 해역 현장에 투입되는 군경 구조요원들의 선배라는 점에서 비난을 자제해왔다. 하지만 자체적으로 마련한 장비조차도 해경이 받아들이지 않고 ‘묵살’하면서 결국 1분 1초가 급박한 수색 구조 작업이 늦어졌다고 주장했다. UDT 동지회는 사고 해역이 조류가 세 일반 스크류 다이버 장비로는 수색 작업이 어렵다고 판단해 처음부터 표면공기공급 방식을 위한 장비를 준비했다. 표면공기공급 방식은 수중의 다이버들에게 수면 위에서 공기를 주입하는 방식으로 어선과 바지선이 필수적이다.
UDT 동지회는 17일 잠수 장비를 실은 민간 바지선 4척을 마련해 팽목항에 대기했지만 해경이 거부해 구조작업을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밝혔다. UDT 동지회는 3차례 해경에 투입을 요청했지만 그때마다 해경은 ‘기다려달라, 연락을 주겠다’고 하며 답을 주지 않자 UDT 동지회 측은 할 수 없이 철수를 결정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민간 구난업체인 언딘 마린 인더스트리(언딘)를 둘러싼 의혹도 증폭되고 있다. 이 업체는 세월호 선주사인 청해진해운과 계약을 맺고 수색에 투입돼 특혜 의혹을 받고 있다.
특히 해경이 수많은 민간전문가들을 물리치고 언딘에게만 목을 매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현재 해경은 청해진해운과 계약을 맺은 언딘 위주로 수색·구조 작업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국가적 재난 사태에 대해 과연 언딘이란 민간업체에 독점적 지위를 부여하는 게 합당하느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실제 언딘의 주요사업 내용을 보면 선체 인양, 기름 유출 방제 등이 기록돼 있을 뿐 인명구조에 관한 내용은 없다. 하지만 정부는 언딘이 국내 유일한 국제구난협회(ISU) 정회원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언딘의 주목적은 ‘구조’가 아니라 ‘인양’에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세월호 침몰 실종자 구조를 핵심적으로 담당하고 있는 해양경찰 지휘부가 경비함정 근무 경력이 없는 행정고시 출신들로 이뤄져 있어 구조작업 지휘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앞서의 관계자는 또한 “바다 사정을 모르는 해경 지휘부의 판단에 따라 구조 작업을 하는데 이 조직이 제대로 된 조직인지 의문이 든다”며 “해군 참모총장은 함장 출신이 하고 공군 참모총장은 전투기 조종사 출신이 하는데 해경은 그게 아니다. 야전(야외 전투)에 있는 사람들이 없고 책상머리에 앉아서 행정고시를 준비한 사람들이 본청 국장급에 앉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바다 사정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 지휘관 자체적인 판단은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해양경찰청 등에 따르면 해경 최고 수장인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은 행정고시 37회 출신으로 지난 1997년 경정 특채로 해경에 입문했다. 범정부 사고대책본부 대변인을 맡고 있는 고명석 장비기술국장과 김광준 기획조정관, 이용욱 정보수사국장도 경정 특채 출신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모두 조직에서 기획·행정 업무를 주로 맡아왔으나, 경비함정 근무 경력은 전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검경 합동수사본부 총괄책임자인 안상돈 광주고검 차장검사는 지난 24일 세월호 침몰 후 해경의 초기 대응 및 구조 작업과 관련, 공무원들을 수사할 뜻을 내비쳤다. 사실 정부는 해경의 사기를 고려하고 수습의 한 주체이기도 한 것을 의식, 해경을 수사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초기 무뇌 구조활동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자 법적인 책임을 묻는 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한편 관계당국은 사건 발생 10일여 만인 지난 24일 세월호 실종자 수색작업을 총괄하는 구조지휘본부를 해양경찰에서 해군으로 이관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까지 해왔던 구조활동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그 잃어버린 시간은 어디서 보상받을 수 있을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2번의 극적 구조기회 아!… 그때, 더 빨리 더 많은 유리창을 깨뜨렸다면… 8시 55분에 구조요청을 한 세월호는 9시 30분경 첫 구조가 시작됐다. 바로 이 과정에서 해경이 실질적으로 적극적인 구조활동을 해 벌인 실적은 단 6인의 탈출이었다. 123정을 타고 출동한 이형래 경사가 유리창 안에서 구명조끼를 흔드는 것을 보고 동료와 함께 망치로 유리를 깨뜨린 덕분이다. 오전 9시 54분 세월호의 좌현이 완전히 물에 잠긴 이후에도 상당수 승객이 선체 안에서 구조를 기다렸다. 배가 90도 이상 넘어간 후에도 침수되지 않은 우현쪽 객실에서 승객들이 구명조끼를 입은 채 살려달라고 외쳤다. 그들은 문을 열 수도 유리창을 깰 수도 없었다. 해경이 좀 더 빨리, 많은 유리창을 깨뜨렸다면 많은 사람들이 생존했을 것이다. 이때가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그리고 오전 10시 31분 세월호는 선수만 남긴 채 완전히 뒤집어져 물에 잠겼다. 이미 많은 어선과 헬기가 도착했고 그 후로 또 늘어났지만 물에 빠진 이들을 건져내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그나마 오전 11시 24분 목포 122구조대가 도착해 선체 내부로 잠수해 구조활동을 벌이려 했으나 조류가 강해 실패했다. 이때 다이버들을 집중 투입해 선체 내부 진입에 성공했다면, 다이빙벨 등 구조장비를 일찍 투입해 ‘시도’라도 해보았다면 결과는 또 달라졌을 것이다. 이렇게 2번의 결정적 구조 기회를 놓쳤고, 시간은 거센 물살처럼 속절없이 흘러가버렸다. 잠수인력이 선체에 진입한 것은 침몰 뒤 이틀이 지나서였다. 세월초 침몰 사건은 그 원인도 원인이지만 그 뒤의 구조 활동만을 볼 때 역대 최악의 구조실패 텍스트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