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 김씨는 채권을 강탈당한 뒤 제권판결(유가증권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법원의 실권선언)을 통해 소유권을 인정받아 만기일인 2003년 10월31일 상환금을 돌려받을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그 뒤 이 채권을 사채시장에서 구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 상환금 회수가 지연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채권을 발행한 한국증권금융측이 김씨의 손을 들어줘 결국 32억원이 그의 손으로 다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증권금융채권의 경우 외환위기 이후 음성적 자금을 양성화하기 위해 발행된 것으로 금리는 낮지만 무기명인 데다 자금 추적 조사가 법적으로 봉쇄돼 있어 ‘검은 돈’의 관리 창구로 자주 이용돼 왔다.
그래서 지난해 ‘떼강도 사건’이 알려질 당시 강탈당한 거액의 채권이 김영완씨가 관리했던 제3의 비자금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돼 왔다. 하지만 돈의 출처와 채권 구입 경위는 하나도 밝혀지지 않은 채 결국 김씨의 손으로 32억원이라는 거액이 넘어가게 된 것이다.
대북 송금 사건의 핵심 인물로 꼽혀온 김영완씨. 그는 과연 숱한 의혹만을 남긴 채 역사의 뒤편으로 ‘조용히’ 사라질 것인가. 김씨의 강탈 채권 미스터리를 따라가봤다.
지난 2003년 6월 중순, 대북 송금 사건에 대한 특검 수사가 한창이던 가운데 김영완씨의 서울 평창동 자택에 9인조 떼강도가 들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큰 파문이 일었다.
이 사건은 지난 2002년 3월31일 서울 평창동 김씨의 자택에 흉기를 든 9인조 강도가 든 것으로 시작됐다. 당시 집에는 김씨와 가족, 가정부 등이 있었다고 한다. 강도들은 김씨를 협박해 10억원대의 현금과 달러, 그리고 90억원대의 각종 채권을 강탈해갔던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이 사건은 많은 의혹을 남겼다. 청와대와 경찰은 떼강도 사건을 보고받고도 쉬쉬하면서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했었다. 김씨 또한 1백억원대 금품을 강탈당했으면서도 피해내역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자신의 신분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등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을 보였던 게 사실이다. 그리고 범행에 가담한 운전기사를 위해 변호사를 고용해주고 재판과정에서 범인들의 선처를 호소하기도 했다.
이런 김씨의 아리송한 행적은 분실한 채권의 ‘보안’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김씨가 당시 강탈당했다고 경찰에 신고한 채권의 종류는 국민주택채권(39억원가량)과 증권금융채권(49억가량)의 두 가지 정도다.
액면가로는 90억7천만원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이 중 경찰 수사 과정에서 27억6천만원이 회수되었고 나머지 63억1천만원어치의 채권은 김씨에게 되돌아가지 못하고 시중에 유통되고 있었다.
국민주택채권의 경우 김씨는 사건 사흘 뒤 곧바로 증권 당국에 사고 신고를 했다. 금융전문가들은 국민주택채권이 유통될 경우 자금 출처가 추적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김씨가 서둘러 증권 당국에 신고해 유통을 막으려 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김씨는 2002년 12월2일 법원으로부터 제권판결을 받아 도난 채권들을 무효화시킨 뒤 만기 때 되돌려받을 수 있는 소유권을 법적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김씨는 오는 8월에 이 국민주택채권 25억원에 대한 만기가 끝나면 그 상환금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김영완씨의 평창동 저택(왼쪽)과 지난해 법사위 대검국감에 증인으로 출두한 권노갑(앞)과 박지원(뒤). | ||
김씨는 사건 발생 6개월 만인 2002년 9월에 서울지법으로부터 도난 증권금융채권 중 37억3천만원에 대한 제권판결을 받아 채권 회수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확보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김씨의 도난 채권을 사채시장에서 구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소유권 분쟁이 발생한 것. 이 증권금융채권의 만기일은 지난 2003년 10월31일이 이었다.
만기일 이후 김씨는 제권판결과 증권금융채권 복사본을 근거로 37억3천만원의 채권에 대한 원리금 상환을 한국증권금융에 청구했으나 김씨가 분실했다는 채권 원본을 가지고 실 소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면서 분쟁이 일어났던 것. 하지만 최근 한국금융증권은 이에 대한 ‘교통정리’를 끝내고 37억3천만원 가운데 32억2천만원을 김씨에게 되돌려주었다.
한국금융증권의 관계자 A씨는 이에 대해 “김씨는 채권 담당 변호인인 송기방 변호사 사무실의 직원들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지난 2003년 12월26일 31억원을, 올해 1월30일에 1억2천만원을 찾아갔다. 김영완씨가 위임장을 써 준 것으로 알고 있으며 금액은 전액 자동이체로 전달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나머지 5억1천만원에 대해선 김씨의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고 있는 상태다. 1억원은 한 개인이 증권금융채권 원본을 가지고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해 한국증권금융측에서 그 사람에게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원매자’라고 주장하는 2명이 1억9천만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해 현재 법원에서 주인을 가리는 재판이 진행중이다.
마지막 2억2천만원에 대해선 증권금융측이 김씨에게 상환금 지급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해둔 상태. 앞서의 A씨는 이에 대해 “혹시 나중에라도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날까봐 김영완씨에게 양해를 구하고 현재 우리가 보관중이다. 회사 입장에서는 이중지불이 되면 곤란하기 때문에 이 금액에 대한 소유권이 명확하게 가려지면 ‘주인’에게 상환금을 돌려줄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김영완씨는 대북 송금 사건의 핵심 관계자이지만 ‘실체’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다. 그는 현대 비자금 1백50억원을 돈세탁해 준 혐의를 받고 있지만 아무런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았다.
게다가 2000년 4월을 전후로 한 남북 정상회담 비밀 접촉 때 박지원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과 출입국 기록이 상당 부분 일치해 남북 관계에서 그가 모종의 비밀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왔지만 지금까지 이런 의혹이 해명된 적은 없다.
더구나 의문의 떼강도 사건을 당한 뒤 신고도 미루고 피해액도 상당 부분 축소 신고했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상태다. 이번에 그가 찾아간 증권금융채권은 지난 97년 외환위기 이후 음성적 자금을 양성화하기 위해 발행된 것으로 금리는 낮지만 무기명인 데다 자금 추적 조사가 법적으로 봉쇄돼 있어 ‘검은 돈’의 관리 창구로 주로 이용돼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이 돈이 김씨가 운용했던 제3의 비자금일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의혹은 일체 밝혀지지 않은 채 김씨는 도난 채권을 하나씩 회수하고 있다. 과연 이 거액의 채권은 김씨 개인의 돈일까.
대북 송금 사건을 수사했던 대검 중수부는 이런 의혹을 풀기 위해 지난 해 김씨의 강제송환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결국 ‘제스처’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법무부는 대검으로부터 김씨의 강제송환 절차를 의뢰 받은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김씨의 여권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는 ‘합법적으로’ 외국에 체류하고 있는 것이다.
대북 송금 사건은 1심에서 박지원 전 장관이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현재 항소심이 진행중이다. 박 전 장관은 지난 2월23일 열린 항소심 첫 공판에서 핵심 증인인 김영완씨에 대한 검찰의 향후 사법 처리 계획을 물었다.
박 전 장관의 변호인은 “김영완의 진술서가 1심 재판에서 중요하게 작용했다”며 “현재 검찰은 김씨에 대해 어떤 방법으로 어떤 추적을 벌이고 있는지 계획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도 현대 비자금 사건과 관련하여 김영완씨의 송환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김씨의 ‘진술’ 때문에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다며 그의 송환을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것.
하지만 검찰은 지금까지 어떤 ‘액션’을 취하고 있지 않다. 그가 미국에 있는 한 데려오기도 쉽지 않지만 만약 송환해온다고 하더라도 김씨의 ‘입’에 따라 검찰이 그동안 공들여 쌓은 ‘퍼즐’이 한꺼번에 흐트러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김영완씨의 법적 처리에 대한 검찰의 명확한 답변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