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준비생 중에는 대기업이 아니면 입사 원서도 쓰지 않고 자발적인 재수, 삼수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진은 이미지 합성.
“대기업 간판 자체가 스펙이다. 어디 가서 중소기업 다닌다고 말하기도 쪽팔릴 것 같다. 대기업 취직은 일종의 관직이다.”
거침이 없었다. 올해로 3년째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김 아무개 씨(29)는 자신이 ‘대기업 3수생’임을 당당히 밝혔다. 김 씨의 스펙은 나쁘지도, 그렇다고 뛰어나지도 않은 평범한 수준이다. 수도권 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김 씨는 상위 30% 수준의 성적, 토익 890점(990점 만점), 관련 자격증 2개 보유, 대기업 인턴 2개월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인문계열보다 취업문이 넓은 편이기도 하다.
다만 졸업예정자 신분이 아니라는 점이 가장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김 씨는 “대기업에선 취업재수생들을 꺼린다는 얘길 들었다. 3년째 지원하고 있는 나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1년 휴학도 하고 졸업유예도 한 번 했지만 매번 취업(대기업)에 실패했다. 오전 8시부터 자정까지 밥 먹는 시간 외에는 영어, 직무적성검사, 면접 스터디를 하면서도 늘 불안하다. 똑같은 조건인데 졸업예정자인 어린 후배들이 합격하는 걸 보면 씁쓸하긴 하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건물 전경. 일요신문DB
대기업 재수를 거친 끝에 지난 하반기 삼성 계열사에 취업한 이 아무개 씨(여·29)도 중소기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 씨는 “집안형편이 좋지 않아 몇 년씩 취업준비를 한다는 게 힘들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삼성 입사가 목표였기 때문에 다른 회사엔 죽어도 가기 싫어 원서도 안 냈다. 대충 조건에 맞춰 취직하면 평생 그저 그렇게 살 것 같았다. 성공하기 위해선 삼성 취직만이 답이라 생각했기에 미친 듯이 공부만 했다”고 말했다.
열심히 한 만큼 스펙은 화려했다. 서울 소재 한 사립대 경영학과 출신인 이 씨는 전 학년 4.0 이상의 성적, 마케팅 관련 공모전 수상, 유통 관련 자격증 보유, 오픽(OPIc)은 IH등급, 대기업 인턴 경력까지 어느 하나 빠지는 부분이 없었다. 이 씨는 “대학 내내 제대로 놀아본 적이 없다.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하다 보니 정신없이 4년이 흘렀다. 하지만 취업은 되지 않았다. 좀 뚱뚱한 외모가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성형수술을 받을 순 없으니 스펙 쌓기에 더욱 열중했다. 아르바이트로 매달 80만 원을 벌었는데 생활비 20만 원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자격증, 어학능력(중국어)에 집중적으로 투자했고 재수 끝에 합격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이 씨는 지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단다. 이 씨는 “성공을 위해서는 처음부터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소기업과 대기업은 출발선부터 다르다. 일이 고되긴 하지만 그만큼 보상이 있다. 성과급만 받아도 차 한 대가 생긴다. 중소기업에선 꿈도 못 꿀 일”이라며 “나중에 무얼 하든 삼성 출신이라는 점은 훌륭한 스펙이 될 것이니 지금 힘든 건 상관없다. 삼성에 취업했다니 벌써부터 선 자리도 많이 들어온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 모두 현실로 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 취업박람회에 참석한 취업준비생들이 이력서 등 원서를 쓰는 모습. 박은숙 기자
이 씨의 솔직한 의견에 거부감을 가지는 이들도 있겠으나 이것이 현실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대부분의 취업준비생들이 이 씨처럼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 인해 ‘대기업 재수생’의 길로 빠져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경영자총협회가 발표한 ‘노동시장 미스매치 현황과 개선방안’에 따르면 4년제 대학 취업준비생들이 기대임금, 직장소재지, 기업규모 등의 분야에서 현실과 괴리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중 임금에 대한 차이가 상당했다. 취업준비생들의 기대임금 평균은 3329만 원이었으나 실제는 무려 286만 원이나 낮은 3043만 원에 그쳤다. 특히 서울 소재 주요 대학의 기대임금은 3633만 원으로 현실과의 차이가 590만 원을 넘었다. 즉 기대임금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대기업 혹은 공공기관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경쟁도 치열하다. 국내 노동시장의 70~80%는 중소기업이 차지하며 대기업 일자리는 불과 10%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취업이 눈앞에 닥친 25~29세 청년 구직자들은 대부분 고학력화 등으로 눈높이가 높아져 대기업에 대한 선호도가 더욱 강해 원하는 회사에 취업하는 일이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고 한다.
지난달 13일 치러진 삼성그룹의 입사 필기시험인 직무적성검사(SSAT) 현장에서도 대기업을 향한 치열한 경쟁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전국 85개 고사장에서 실시된 SSAT 응시자는 10만 명에 달했는데 최종합격을 위해선 20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지난해에 이어 3번째 SSAT에 응시한다는 김 아무개 씨(28)는 “보통 한 반에 3~4명씩 결시생이 생기는데 이번엔 1명뿐이었다. 몇몇은 낯익은 얼굴도 있었다”며 “갈수록 대기업 취직이 어려워지고 있지만 이제 다른 곳은 성에 차지도 않는다. 이만큼 준비해놓고 중소기업에 가는 게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까진 대기업이 아닌 곳에는 원서를 쓸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