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금실 법무장관, 송광수 검찰총장 | ||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법무부 업무보고를 하는 자리에 강금실 법무장관이 화사한 분홍색 옷과 스카프를 입고 들어섰다. 손에도 연분홍색 가방을 들고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강 장관 옆에는 송광수 검찰총장이 감색 양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둘 사이에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촛불시위 관련자에 대한 체포영장청구 문제로 법무부와 검찰이 갈등을 빚다 소강상태로 들어간 첫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무부와 검찰 식구를 제외하고 다들 두 사람의 무표정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언론에는 두 사람의 갈등이 전면전으로 확대됐다고 보도됐기 때문이다.
송 총장이 지난달 30일 출근하면서 기자들에게 법무부의 검찰조사방침에 대해 “차라리 나를 조사하라”고 직격탄을 쏜 바로 다음날이었다. 회의실에는 카메라 기자들이 장사진을 이뤘고, 두사람의 무표정한 얼굴을 연신 카메라에 담았다. 마지못해 송 총장이 입을 열었다. “이런 보고를 안해봐서…. 상당히 어색합니다.” 강 장관이 말을 받았다. “글쎄요, 1년에 한 번 하는 거잖아요.” 그게 다였다. 두 사람의 어색한 표정은 다음날 각 언론에 큼지막한 사진으로 장식됐다.
강 장관과 송 총장 두 사람의 갈등이 이렇듯 언론에 알려진 것은 지난 3월26일 검찰이 촛불시위와 관련, 시민단체 간부 4명에게 적용할 체포영장을 청구하면서부터다. 통상 검찰은 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공안사건 처리문제를 법무부에 보고해야 하는데 이를 보고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처음에는 총선을 앞두고 공직기강 해이 차원에서 문제를 파악했다.
그런데 송 총장이 이 보고를하지 말라고 검찰에 지시했던 것으로 법무부가 파악하면서 문제가 꼬였다고 한다. 송 총장의 ‘도발’로 여기게 된 것이다. 당연히 강 장관측이 반발했고 일각에서는 ‘인사조치’라는 강경한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법무부가 체포영장 보고 누락에 대한 진상조사에 들어가려고 움직이자 송 총장은 지난 3월30일 출근길에 기자들에게 “아랫사람을 조사하지 말고 나를 조사하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검찰측은 ‘체포영장은 구속영장과 다르며 단순 조사를 위한 검찰의 조치인데 이를 왜 법무부에 보고하느냐’고 반발했다. 또 ‘보고주체는 서울지검인데 왜 대검을 걸고 넘어지냐’고 쏘아붙였다.
검찰 반발이 이처럼 거세지자 법무부는 “진상조사란 무시무시한 말 자체를 쓴 적이 없다”며 “관련자를 문책하려고 경위파악을 하는 게 아니다”라며 톤 다운에 들어갔다.
이후 대검측도 이와 관련,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양측은 오히려 31일부터는 관련 기사를 쓴 언론을 문제 삼았다. ‘한 배를 탄 장관과 총장의 사이를 언론이 이간질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양측이 쉬쉬하고 언론이 입을 닫는다고 해서 두 사람의 갈등이 3박4일 만에 봉합될 성질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양측은 이번 기싸움으로 상대편을 탐색한 다음 서둘러 칼을 접은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앞으로 더 큰 싸움이 남아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촛불집회로 드러난 강 장관과 송총장의 기싸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강 장관과 송 총장은 1년 남짓한 기간에 무려 여덟 번이나 힘겨루기를 한 것으로 알려진다. 인사문제를 둘러싼 세 차례 대립과 검찰운영을 둘러싼 다섯 번의 신경전이 그것이다. 양쪽의 입장 관철 여부를 기준으로 승패를 굳이 따지자면 4승4패. 호각세다(표 참조). 국지전 성격의 입장 차이를 포함하면 물론 이것보다 훨씬 많다는 관측도 있다. 이번 체포영장 파문도 이런 싸움의 연장선상에서 봐야 한다는 게 법무부·검찰 주변의 시각이다.
검찰 인사는 지난해 3월, 8월, 올해 2월 등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올해 2월 인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강 장관측의 일방적인 승리로 비쳐졌다.
지난해 2월에는 검찰의 고위직들이 줄줄이 옷을 벗었다. 옷을 벗은 검사장 가운데는 당시 인사에 독설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다. 검사들이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는 지난해 3월에 있었던 ‘대통령과 검사와의 대화’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검사들은 “인사권을 총장에게 넘겨 달라”고 대통령에게 떼를 쓰듯 요구했으나 노 대통령이 한마디로 거부했다. 특히 지난해 8월 인사는 송 총장으로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 관측될 만하다. 자신이 아끼던 후배들이 줄줄이 지방으로 좌천됐다. 대신 시골검사들이 서울로 대거 올라왔다.
법무부-서울지검-대검을 왔다갔다하는 엘리트 검찰들이 죄다 지방으로 쫓겨가듯 내려갔다. 송 총장은 이 인사에 관여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 총장으로서는 완전히 체면을 구긴 것으로 분석됐다.
이후 검찰은 지난해 8월 ‘검찰 설립 이후 가장 뜨거운 국민적 호응을 불러온 불법대선자금 수사’에 들어갔다.
검찰 인사를 흔들던 정치인들이 줄줄이 수사대상에 올랐고 구속되기까지 했다. 심지어 검찰 인사를 여러 번 좌우했다는 소문이 있던 노 대통령의 측근까지도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송 총장을 임명한 노 대통령마저 검찰 눈치를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일각에서 제기됐다. 이런 와중에 2월 검찰인사가 있었다.
강 장관은 대대적으로 검사장급 인사를 단행하려고 했지만 검찰은 대선자금 수사를 이유로 이를 꺼렸다. 결국 청와대는 ‘불법대선자금 수사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는 송 총장의 손을 들어줬다. 이때부터 강금실 장관 한쪽에 쏠려 있던 힘이 슬금슬금 검찰로 옮겨가면서 호각세를 이뤘다.
그 와중에 청와대 민정수석과 비서관 두 명이 일신상의 이유로 청와대를 떠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송 총장이 강 장관 인사를 막은 것은 검찰이 대선자금 수사를 성공적으로 하며 여론의 엄청난 지지를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평가된다.
참여정부 핵심관계자조차 출범초기 검찰을 의심하던 삐딱한 시각을 존경과 경의로 바꿨다. 개혁대상이던 검찰이 개혁의 주체로 바뀐 것이다. 강 장관에게 한동안 쏠려있던 무게중심은 자연스럽게 검찰로 옮겨졌다. 이후로 검찰 주변에서는 “이제 송 총장이 강 장관보다 더 세다”라는 말도 나왔다.
인사를 제외한 다섯 번의 신경전 가운데 가장 하이라이트는 법무부 전 간부의 감찰을 놓고 벌어졌다. 대검 감찰부는 이 간부의 징계를 줄기차게 요구했고 법무부는 이 간부를 감쌌다. 대검은 계좌추적을 통해 서울 용산경찰서 법조브로커의 수표가 이 간부에게 흘러들어갔다는 물증을 잡았다.
결국 이 간부는 징계위원회에 회부됐지만 무혐의 처리됐다. 검찰 일각에서는 이 간부가 강 장관의 검찰 인사 및 개혁을 코치한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강 장관은 한술 더 떠 검찰의 감찰권마저 법무부로 가져가겠다는 주장을 폈다.
또 검찰은 일선 지청에서 하던 법무부 보고를 대검으로 일원화해야 한다고 아이디어를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무부는 대검이 정보를 독점하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 하지만 대검은 일선 지청에서 일일이 정보보고를 하면 검찰이 정치권력에서 독립할 수 없다는 논리로 맞섰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송두율 교수나 한총련 사건에서 검찰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강 장관이 시대변화에 맞는 법 집행을 요구했지만 검찰은 실정법 위반을 이유로 이들을 구속시켰다. 강 장관은 특히 송 교수를 불구속 기소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검찰은 송 교수를 구속기소했다.
또 검찰은 검찰청법 개정안에 “인사와 관련, 장관과 총장이 협의한다”는 문구를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 원래 검찰 인사권은 장관이 가지고 있지만 지금까지 장관과 총장이 어느 정도 협의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 검찰은 실무를 잘 아는 검찰쪽 의견이 반영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법무부를 설득했고 이 설득은 결국 받아들여졌다. 법무부가 ‘수사는 검찰이, 인사는 법무장관이 한다’는 제1원칙에서 한발 물러난 셈이다.
그러나 강금실 장관과 송광수 총장 간의 싸움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촛불시위 주도자 처리문제와 검찰간부 인사가 곧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 처리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옷을 벗을 가능성마저 있다는 관측이 나돌고 있다. 한마디로 밀리면 끝장인 데드매치(dead match)를 예고하고 있는 셈이다. 이 싸움으로 두 사람이 지금까지 쌓아놓은 공적이 한순간에 날아갈 수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번 싸움은 단순한 감정싸움이 아니라 치열한 논리싸움이나 막무가내의 힘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돈다. 촛불시위 문제는 논리싸움, 간부인사는 힘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