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 | ||
지난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돼온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해오면서 처음 낸 병가다. ‘무쇠돌이’라고 불릴 정도로 쉬지 않았고 ‘저돌적’으로 ‘저인망’수사를 해온 안 부장의 돌연한 병가는 확실히 눈에 띄는 행동이었다.
‘오십견’이란 별다른 원인없이 통증을 수반해 어깨 관절의 회전이 제약을 받는 증상으로 심하면 뒷목이나 팔까지 저려와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운 일종의 노인병이다. 그러나 안 부장의 나이는 49세이지만 얼굴이 홍조일 정도로 건강 체질이다. 그동안 기자들에게 오십견을 호소해온 적은 없다. 따라서 기자들은 안 부장의 오십견은 어깨관절탓이 아니라 심리적 원인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공교롭게 이 추측을 뒷받침하듯 그 전날인 9일 안 부장은 “불법 대선자금 연루 기업인에 대한 처벌 범위와 기준을 논의중인데 불법자금 제공에 직접 관여한 정황이 없는 기업인은 입건유예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안 부장은 또 “정치자금 수사가 본류고 기업인은 어떻게 보면 피해자”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런 말은 안 부장이 그동안 해왔던 말과는 상반된다.
안 부장은 그간 대기업 총수일지라도 비자금 액수가 크면 처벌해야 한다고 말해왔으며 총수의 공개소환까지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혀왔다. 그런 안 부장이 총수들을 아예 입건하지도 않겠다고 말한 것은 분명 ‘이변’이었다.
실제로 기업인 처리 완화 방침을 밝힌 다음날 병가를 낸 4월10일 LG그룹 구본무 회장이, 4월12일 롯데 신격호 회장과 신동빈 부회장이 불입건됐다. 불입건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이 강유식 엘지그룹 전 구조본부장과 신동인 롯데쇼핑 사장에게 대선자금 전달을 지시하거나 사전보고를 받은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어서 수사를 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불입건이란 형사소송법상 인지는 했으나 여러 이유로 수사를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검찰의 이런 결정은 극단적인 찬반 양론을 불렀다. 찬성하는 쪽은 경제를 생각해서 검찰이 판단을 잘했다는 칭찬이었고 반대하는 쪽은 재벌개혁을 안하려는 것이냐는 비판이었다. 언론도 양쪽으로 확 갈렸다.
매파와 비둘기파의 대립인데 일선 수사팀은 비자금을 조성, 정치자금을 전달한 대기업 총수를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던 반면 수뇌부는 경제를 고려해야 한다는 신중한 입장이었다.
수사팀 중심의 매파는 대기업 구조본부장이 총수 허가없이 1백억원 이상의 정치자금을 건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주장해왔다. 총수가 분명히 개입했을 것이고 이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지금도 불법대선자금 수사의 백미인 삼성과 현대차 등에 대해서도 원칙대로 처리해야 한다고 버티고 있다. 반대로 대검 수뇌부 주축의 비둘기파는 대기업 총수를 계속 수사하면 수사가 장기화되는 데다 법정에서도 유죄를 인정받을 만한 증거확보가 어렵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명해왔다.
이런 매파와 비둘기파의 갈등이 있다는 것은 과거 권위주의 검찰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그만큼 검찰이 건강해졌다는 것을 반증하는 측면이 있다. 검찰도 심지어 이를 갈등이라고 하지 말고 토론 혹은 의견조율이라고 표현해달라고 기자들에게 부탁할 정도다.
그러나 강·온파간의 갈등은 부영 이중근 회장 구속을 놓고 불꽃을 튀긴 것으로 전해진다. 이 회장은 무려 1천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인물. 혐의를 보면 구속영장 청구는 당연하게 보였다.
그러나 비둘기파는 매파의 이 회장에 대한 영장청구를 2월과 3월 두 번이나 말렸다. 2월에는 일괄처리하자는 주장으로 버텼고 3월에는 도주의 우려가 없는 만큼 불구속수사를 주장했다. 2월에는 비둘기파 주장이 받아들여졌으나 3월에는 혐의가 중해 구속이 불가피하다는 매파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3월30일 법원은 이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결과적으로 검찰이 망신을 당한 셈이다.
매파의 중심은 당연히 안대희 부장이었다. 강경론자였던 안 부장은 비둘기파의 요구를 놓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안 부장은 ‘법대로 살자’가 좌우명인 사람으로 범법자를 지나치지 않는다. 검찰에서 그는 사자사냥을 가서 사자만 잡는 것이 아니라 토끼도 사슴도 잡고마는 저인망 수사의 대가로 소문날 정도. 따라서 그가 비둘기파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특히 이 요구를 받아들이면 지금 수사중인 삼성 현대차 동부 등의 수사에도 영향을 받기 때문에 안 부장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안 부장은 삼성과 현대차가 정치권에 제공한 자금의 출처를 소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 이들 기업 비자금에 대한 본격수사 여부를 놓고 고민해왔다.
그러나 이들 기업은 이른바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이었다. 이들 기업에 대한 본격수사는 자칫 그나마 한국 경제를 먹여 살리고 있는 수출에도 큰 타격을 줄 수도 있어 안 부장은 고민을 거듭해왔다.
실제로 이 지청장은 총선을 코앞에 둔 4월13일 현대차 계열사에 사람을 보내 한 계열사의 합병자료를 요구하기도 했다. 수사상 꼭 필요한 자료수집보다는 수사를 계속하겠다는 메시지를 검찰과 기업에 던지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나왔고 업계가 다시 긴장하기도 했다.
이 청장뿐 아니라 다른 수사과장들도 비슷한 반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특히 삼성 현대차 총수의 선처에 반대했다. 매파의 논리는 “전교 1, 2등이라고 잘못을 했는데도 처벌하지 못하면 형평성 시비가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 부장은 비둘기파 의견을 받아들였다. 기업인보다 더 문제가 심각한 정치인 처리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총선으로 미뤄온 정치인 수사를 총선 이후 본격 재개해야 하는 검찰로서는 기업인 수사가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었다.
또 기업수사의 핵심인 총수를 수사하려면 총수가 개입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나와야 하는데 여러 차례의 압수수색에도 불구, 그런 딱 떨어지는 증거는 나오지 않은 점도 부담이었다.
안 부장은 3월 초 중간 수사 발표 이후부터 이를 고민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중간 수사 발표 이후 휴가까지 다녀온 안 부장의 표정이 오히려 무거웠던 것은 이런 부담감 탓이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안 부장은 3월 말경 심사숙고 끝에 비둘기파 의견에 동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강경파였던 안 부장의 입장정리는 기업인에 대한 선처로 바로 이어졌다. 곧바로 삼성과 현대차 총수에 대한 선처가 예측됐고 주가도 뛰어 900선을 돌파했다. 하지만 저인망 수사의 대가인 안 부장은 심리적인 스트레스를 받아왔고 이는 오십견의 한 원인이 됐을 확률이 높다.
그래서 기업인 선처는 정치인에게는 날벼락이 될 전망이다. 안 부장과 수사팀은 기업인에 대한 선처로 구겨진 자존심을 정치인 수사로 회복하겠다고 벼르고 있는 탓이다. 안 부장은 총선이 끝난 4월16일 “이제 우리에게 형평성으로 시비를 거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정치인 수사에 대해 17대 국회 개원 전에 끝내겠다”라고 총선운동기간 내내 벼려온 결의를 내비쳤다. 기업인들은 정치인 덕분에 구사일생한 데다 검찰이 자신들을 괴롭혔던 ‘가해자’들을 응징해주는 ‘복수혈전’을 느긋하게 보는 1석2조를 취하게 됐다.
그러나 기업인들의 느긋함이 얼마나 계속될지는 미지수다. 대검 중수부가 이번 대선자금 수사로 확보한 상당수의 기업에 대한 내사파일을 일선 지청에 내려 보냈기 때문이다.
또 안 부장은 대선자금 수사가 끝나는 대로 중수부 본연의 일을 하겠다고 강조해 이 ‘본연의 일’의 범주에 기업비리가 속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와 기업이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다.
박태수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