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의장 앞으로 전달된 이 탄원서는 유명 화장품사인 H사를 상대로 현재 법적 소송을 진행중인 ‘H화장품 피해방지위원회’(이하 피방위)가 보낸 것이었다. 탄원서에는 ‘H화장품의 상임고문 겸 사건해결사인 조○○씨가 P의원에게 부탁하여 검찰과 경찰에 압력을 넣거나 로비를 하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탄원서에 거론된 P의원은 열린우리당의 창당 공신. 그는 사실상 창당 작업과 당사 이전 등의 당내 살림을 맡아 처리한 당직자였다. 때문에 당시 언론에서는 열린우리당의 비례대표 후보를 거론할 때마다 그를 빼놓지 않았다.
열흘 뒤인 지난 3월29일. 열린우리당은 비례대표 명단을 확정 발표했다. 그런데 P의원의 이름이 명단에서 빠져 있었다. 당시 열린우리당 당직자들 사이에서는 뚜렷한 이유없이 그가 빠진 것에 대해 의문 또는 반발감을 표시하는 사람이 많았다.
열린우리당측은 이에 대해 특별한 해명을 하지 않았다. 비례대표 선정위원회 남궁석 간사는 “전체 2백여명에 달하는 선정위원들의 표결로 처리된 사항이기 때문에 비록 P의원의 탈락이 애석한 측면이 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초 당선 안정권인 상위 20번 순위 내 진입이 유력할 것으로 알려진 P의원이 비례대표 후보 명단에서 빠진 배경에 대한 의혹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아예 사전에 배제키로 한 것이 아니면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이 열린우리당 내 다수의 의견이었다.
왜 이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일까. H화장품 피방위측이 보낸 탄원서와 P의원의 공천탈락은 연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일단 열린우리당 관계자는 “P의원의 경우 당내 공헌도 많고 해서 김원기 상임고문 등 당내 인사들의 적극 추천했지만, 당외 선정위원들 가운데서 반대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 선정 과정에는 대다수를 차지한 당외 인사들의 목소리가 많이 반영되다 보니 그가 밀린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그가 과거 민주당 시절 이전부터 당 살림을 오랫동안 맡아오면서 여러 가지 자금유입설 등의 구설수에 오르내렸던 것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탓이 아니겠느냐”는 의견을 조심스레 피력했다.
그러나 남궁 간사는 “탄원서 등으로 인해 P의원이 공천에서 탈락한 것은 아니다”며 그같은 의혹을 일단 부인했다. P의원 역시 “조 상임고문과 개인적으로 친한 것은 사실이지만 H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H화장품 피방위측의 견해는 다르다. 피방위측은 막상 P의원이 공천에서 탈락했고, 이후에도 이에 대해 P의원측이나 열린우리당측에서 뚜렷한 해명이 없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피방위 관계자는 “H사 관계자들의 주변 증언을 통해서 로비 대상으로 정치인과 변호사, 검·경·세무 공무원 관계자들이 많이 거론됐지만, 그 중 가장 빈번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거명된 인사가 P의원이었다”며 “H사의 탈세에 정치권 인사가 연루된 의혹을 밝혀내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문제의 H화장품 사건의 진상은 무엇인가.
H화장품은 IMF 이후 화장품업계에서 급성장한 회사. 이 회사가 지난해 국세청에 신고한 매출액은 1천3백억원. 그러나 국세청 관계자는 “실제 이 회사의 매출은 6천억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이 회사의 매출이 국세청의 추정액과 실제 신고액이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 회사의 매출이 대부분 방문판매를 통해 이뤄지고 있기 때문. 방문판매의 특성상 정확한 매출을 파악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많이 있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전언.
이 회사는 지난해 상장사인 제조업체 K사를 전격 인수, 재계의 이목을 모았다. 이를 두고 업계 주변에서는 “중소 화장품 회사가 업계 1위를 달리는 기업을 인수,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며 놀라워하기도 했다.
이 회사는 또 지난 2001년 제 2금융권의 S저축은행도 유상증자를 통해 인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이 회사가 급팽창하면서 업계에서는 갖가지 루머가 나돌았다. 그중 가장 이슈가 됐던 내용은 이 회사의 급성장 비밀로 분석된 방문판매 영업이 실제로는 다단계 판매라는 것이었다. 물론 회사측은 이에 대해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 회사를 상대로 피해보상요구에 나선 피방위는 “방문판매가 아닌 다단계 판매 영업이었다”는 주장이다. 이 회사에서 임원으로 일하다가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의 빚을 떠안고 파산한 피해자들이 속출한 것도 이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피방위에 따르면 현재 이 회사를 상대로 피해보상을 요구하고 있는 피방위 회원은 1백44명. 이들의 피해 금액은 2백60여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피방위 관계자는 “우리는 회사를 상대로 빚진 돈 때문에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도 회사의 간교한 꾐에 빠져서 그곳이 늪인 줄 모르고 계속 빠져들고 있는 또다른 피해자를 막고자 함이다. 그래서 우리 단체 이름도 당초 피해대책위원회에서 피해방지위원회로 최근 고쳤다”고 밝혔다.
피방위측은 H사의 K회장과 P부회장을 지난해 11월 서울중앙지검에 사기 및 조세포탈혐의로 고소했다. 피방위측은 국세청에도 조세포탈과 횡령 혐의로 H사 사주를 고발한 상태.
그러나 이에 맞서 H사측도 피방위를 명예훼손 및 업무방해 신용훼손 등의 혐의로 맞고소했다.
H사의 주장에 따르면 피방위측이 근거없는 내용으로 국세청과 검찰에 고소해 회사의 명예를 크게 훼손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확인 결과 H사는 이미 지난해 8월 국세청 정기감사에 탈세 및 탈루 사실이 드러나 2백96억원의 세금이 추징된 것으로 드러났다.
피방위측은 “(국세청 감사에서 드러난 내역보다) 더 많은 탈세 혐의와 그 증거 자료들을 확보하고 있다”며 H사를 추가 고발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현재 국세청이 조사중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증거 자료들을 검토한 결과 일부 탈세 혐의가 인정되는 부분이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H사측은 “국세청 조사 결과를 지켜보고 이의 신청을 하겠다”며 “추가 조사에서 세금 탈루부분이 발견되면 당연히 낼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H사측은 “피방위측에서는 마치 우리가 정치인 등을 동원해 관계당국에 로비를 벌여 일부러 세금을 안낸 것처럼 근거없는 흑색선전을 하면서 회사로부터 돈을 뜯어내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 이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측은 “현재 계류중인 사건인 데다, 쌍방 고소건이기 때문에 좀더 신중히 조사를 할 필요가 있다”며 이 사건에 대한 자세한 언급을 꺼렸다.
하지만 H사와 일부 정치권의 유착설이 끊임없이 불거지고 있어 탈세 공방으로 번진 이 사건이 정치권으로 번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실제로 정치권에서도 H사와 친분이 있다는 몇몇 인사들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상황이다. 현재 의혹을 받고 있는 P의원도 그들 중 한 명이다.
이 사건이 불거지면서 가장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인물은 이 회사의 P부회장.
여성으로 호남 출신인 그는 H사의 평사원에서 출발, 부회장에까지 오른 화장품업계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P부회장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2년 무렵이었다. 그는 당시 A대학 최고경영자과정 등을 다니며 나름대로 경영인맥을 쌓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권 인사들과도 교분을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그가 친분을 쌓은 정치권 인사들 중에는 과거 민주당 출신 인사들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차세대 대권주자로까지 주목받던 김아무개 전 의원은 이 회사의 행사 때마다 자주 얼굴을 내밀 만큼 P부회장과 친분이 두텁기로 소문나 있었다.
그는 지난해 2월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때 초청을 받아 내외빈석의 맨 앞줄에 자리한 것을 무척 자랑스러워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는 현재 여권의 핵심 실세로 통하는 K의원, S의원과도 두터운 친분을 맺고 있다며 주변에 얘기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광주 지역 3선의원 출신인 C전 의원의 친동생도 H사에서 대표이사를 지냈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 일각에서는 P부회장의 정계 진출설이 나돌 정도였다.
P부회장의 법조계 인맥으로는 호남 출신으로 검사장을 지낸 L변호사가 오르내리고 있다.
한편 이 같은 상황 속에 호남 출신 조폭들이 대거 이 회사와 연루돼 있다는 소문이 나돌아 관심을 모으고 있다.
최근 이 회사의 상임고문으로 위촉된 조아무개씨와 이 회사에 맞서 법정 소송을 벌이고 있는 이아무개씨가 그 대표적 인물.
호남 주먹계의 대부로 통하는 조, 이씨는 과거 “형님”, “동생”하던 사이였다. 한때 이 회사의 이사까지 올랐던 것으로 알려진 이들은 이번 사태로 적으로 돌변했다.
이씨가 막대한 빚을 지고 회사를 물러난 뒤 H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하자 조아무개씨가 회사측의 입장에서 이씨를 막고 나섬에 따라 거물 조폭 간의 대결양상으로 번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