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대선자금의 광풍이 지나간 뒤 몰아칠 중수부발 후폭풍에 세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안대희 전임 중수부장이 지난해 3월13일 부임한 이후 1년3개월여 동안 나라종금 수사, SK·현대 비자금 수사, 불법 대선자금 수사 등을 통해 상당한 양의 사정파일을 축적, 박상길 신임 중수부장에게 넘겨줬기 때문이다.
박 중수부장도 지난 1일 부임하자마자 전임 수사팀이 남긴 각종 사건처리 내역 및 그에 따른 각종 첩보부터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종전까지는 불법 대선자금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고위공직자에 대한 기획사정이 있을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검찰은 당장 공기업부터 손을 볼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번 공기업 사정은 일상적인 엄포로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 검찰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대검 및 일선 검찰청의 수사를 보면서 사정의 기류를 감지하는 것과 달리 이번에는 송광수 검찰총장이 드러내놓고 경고성 메시지를 보냈다. 송 총장은 지난 3일 기자간담회를 자청, 공기업 비리에 대한 수사를 부정부패 척결 및 민생분야 수사 등과 함께 3대 과제로 삼겠다는 점을 강조했다. 송 총장이 평소 입이 무겁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일임은 분명하다.
송 총장의 이런 언급은 최근 감사원이 한국자산관리공사의 공적자금 관리부실 문제를 검찰에 수사의뢰한 사안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감사원이 수사의뢰한 것은 자산관리공사가 정부가 보증하는 한 건설사의 부실채권 99억원을 미국계 투자회사에 단돈 100원에 매각한 단일 사건이지만 자산관리공사 전반의 비리로 수사를 확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서울중앙지검 조사부도 최근 한국자산관리공사 관계자가 대우건설 출자전환주식 매각주간사 선정을 위한 공개입찰 과정에서 특정업체에 편의를 봐줬다는 취지의 내부인 고발을 최근 접수, 수사에 나선 상태다. 서울중앙지검 조사부는 이에 앞서 한국감정평가협회 공금 61억원을 자신의 은행대출 담보로 사용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로 협회 전임 회장 송아무개씨(53)를 구속하기도 했다.
이처럼 검찰이 공기업의 인사청탁 비리, 납품비리, 회사자금 유용 비리 등에 대한 본격적인 사실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는 후문이다.
검찰 주변에서는 이번 공기업 사정이 단순히 공기업 비리를 척결하려는 의도만 있지는 않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현재 임기가 남은 공기업 사장이나 임원들의 인사 문제와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의 공기업 인사는 당시 정권의 핵심 실세와 관련된 인사들이 포진해왔다. 이들 공기업 임원들은 비록 임기가 남아있더라도 정권이 바뀌면 스스로 자리를 물러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공기업 인사와 관련해 이상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일부 임원들이 임기를 이유로 버티는 것이다.
그러자 정찬용 대통령 인사수석비서관은 지난달 중순 공기업과 정부투자기관 임원 인사와 관련, “어지간히 하신 분들은 스스로 거취를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뼈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정 수석비서관은 “노무현 대통령은 문제가 없는 경우는 웬만하면 임기를 존중해 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전제했지만 이는 사실상의 선전포고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알아서 사임하지 않으면 수사를 통해 강제로 공직에서 밀어내겠다는 것이다.
물론 검찰은 이 같은 사정파일의 존재를 시인하지 않고 있다. 단서가 포착되면 수사를 할 뿐 축적된 사정파일을 갖고 수사의 속도를 조절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수사기법의 획기적인 발전도 대대적인 사정 움직임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대검 중수부는 지난 9개월여 동안 대선자금을 수사한 끝에 계좌추적만큼이나 채권추적에 대한 노하우를 쌓았다. 한 검찰 관계자는 “큰 전쟁을 치르면 의학기술이 발달하는 것처럼 대형 비리사건을 맡다보니 그동안 베일에 가려있던 사채시장의 흐름을 파악해낸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그룹과 한화그룹,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불법 대선자금을 밝혀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채권추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들 기업에 대한 채권추적은 상당부분 끝났지만 중견건설업체 ㈜부영의 채권추적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검찰은 부영으로부터 임의제출 형식으로 압수한 채권만도 5백80억원대에 육박하고 있다.
그러나 검찰은 인력과 수사기간 등에 대한 제약 때문에 5백80억원의 채권의 행방을 다 쫓지 못했다. 일부만 확인한 상태에서도 검찰은 봉태열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이 지난 2002년 7월 부영에 대한 세무조사에 대한 청탁명목으로 부영 이중근 회장으로부터 1억3천만원 어치의 채권을 받은 사실을 확인했다. 김영희 전 남양주시장도 이중근 회장으로부터 수억원의 채권을 받은 사실도 밝혀냈다.
부영측이 철저히 채권을 통해 각종 인·허가 로비를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채권추적 여하에 따라서는 정·관계 인사들의 비리가 줄줄이 드러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안대희 전임 중수부장이 수사 막판에 “부영은 게이트 수준”이라고 언급한 것도 이 같은 배경 때문으로 풀이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추정되는 괴자금의 꼬리가 드러난 것도 채권 추적 때문에 가능했다. 기업들이 정치권에 건넨 채권을 쫓기 위해 명동의 사채시장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지고 수많은 계좌를 쫓다가 출처불명의 괴자금을 포착한 것이 전씨 비자금에 대한 수사 재개의 도화선이 됐다.
이처럼 큰 자금의 흐름을 끝까지 추적하다보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범죄의 단초를 발견하게 마련. 안기부 예산 전용 전용사건인 이른바 안풍사건도 고속철도 로비스트의 자금흐름을 찾는 과정에서 나왔다.
검찰은 그동안의 기업 수사를 통해 고위공직자에 대한 비리파일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군검찰과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했던 전·현직 군장성들의 군납비리 및 군인사 비리 수사도 그동안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잠시 묵혀뒀던 사정파일에 따른 것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박 중수부장과 새롭게 짜여진 중수부 수사팀이 숨고르기를 거쳐 어떤 비리파일부터 꺼내 사정의 칼날을 휘두를지 벌써부터 주목된다.
이진기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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