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화교는 정경유착을 토대로 대규모 국가사업에 자본을 대고 있으며, 당국이 주관하는 각종 행사에 귀빈으로 참석하고 있다. 중국의 화물트럭이 꼬리를 물고 압록강철교를 건너 북한으로 가는 모습. 연합뉴스
복수의 대북 소식통이 전한 바에 따르면, 지난 5월 13일 발생한 평양 평천구역 충복아파트 붕괴사고로 인한 투자 피해자들이 평양 주재 중국대사관에 대거 몰려 피해 보상을 위한 민원을 제기했다고 한다. 이들이 중국대사관에 몰린 이유는 그들이 북한에서 대를 이어 오랜 기간 거주하고 있는 화교들이기 때문이다. 민원 창구로 몰린 화교들 중에선 직접 붕괴사고를 겪지 않았지만, 인근 지역 아파트 건설에 투자해 손해를 본 이들도 섞여 있었다고 한다.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은의 치적사업인 평양 10만 호 건설에 따른 투자금 유치에 난항을 겪자, 북한 당국이 지난 2년간 이른바 ‘신흥귀족’ 혹은 ‘큰손’으로 통하는 북한 화교에 손을 벌렸다는 것. 하지만 사업 부진과 사고로 인해 제때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한 화교들이 단단히 ‘뿔’이 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지금까지 비교적 주목을 덜 받았던 북한 화교들의 영향력이 그것이다. 김정은이 주관하는 대형 토목사업에 다름 아닌 북한 화교가 상당수 자본금을 댔다는 것, 그리고 이에 결과가 좋지 못하자 평양 한복판에서 대놓고 불만의 목소리를 냈다는 것은 그들의 힘이 북한 사회에서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준다.
한국에선 최근까지 ‘간첩 혐의’로 재판을 받았던 탈북자 유우성 씨가 화교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한 대북 소식통은 “한때 조총련 자본과 연결된 북한 재일동포들의 경제력이 지하시장은 물론 당국에도 큰 영향을 끼쳤지만, 2000년대 이후엔 화교들이 그 자리를 꿰찼다”라며 “인구만 따지면 재일동포보다 훨씬 적지만, 현재 시장 장악력만 따지면 화교들이 우위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19세기 후반부터 한반도에 들어오기 시작한 화교는 1921년 중국 산둥성 지역에 대기근이 발생하면서 정점을 찍게 된다. 이후 중일전쟁과 중국정권 수립,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그 수가 줄긴 했지만 여전히 북한 지역에 터를 잡은 화교들이 지금까지 대를 이어 살고 있다.
지금은 신흥귀족으로 불리고 있는 북한 화교지만, 예전만 하더라도 그들은 북한 사회에서 소외계층이었다. 북한 관련 서적과 국내 논문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건국 시기 북한의 공민증(북한 화교들은 ‘시민권’ 개념의 북한 공민증을 소지하고 있지만 국적은 중국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 중국 여권을 동시에 소지하고 있다)을 소지한 화교들에게 토지 분배를 제외했다. 다른 인민과 똑같이 국가가 지정하는 일자리를 주고 극히 일부에겐 당 가입도 허용했지만, 대부분의 화교들은 당국의 조직 활동에서 철저하게 소외됐다.
일반 인민들 사이에서도 화교는 차별의 대상이었다. 화교들이 북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당국이 지정해 준 일자리 외에 뙈기밭에 근근이 농사를 지어 장에 내다파는 정도였다. 인민들은 화교를 두고 똥지게를 진다고 하여 ‘똥떼놈’으로 불렀다.
이렇게 천대받던 화교가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북한 경제가 악화일로를 걷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다. 그 배경은 ‘이동권’, ‘밀매’ 그리고 ‘결탁’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설명 가능하다.
다른 인민처럼 똑같이 이동의 자유가 없었던 화교들은 1980년대 북-중 협정에 따라 연 2회 중국 방문이 허용된다. 이는 화교들의 자산 축적에 있어서 큰 메리트로 작용한다. 개혁개방으로 인해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인 중국의 재화를 북한으로 들여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동권을 바탕으로 화교들은 북한에 시장 거래가 불가능한 금을 ‘밀매’하거나, 중국의 공산품을 밀수해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자본축적은 자연스레 북한 당국 핵심 관계자들과 ‘결탁’으로 이어지게 됐고, 그들의 경제적 장악력은 점점 견고해 진다.
무엇보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화교들의 자본축적은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북한 내부의 소비재 생산이 사실상 중단됨에 따라 화교들이 들여온 중국제 소비재들이 시장을 장악한 것이다. 북한이 당시 처한 고난의 시기, 오히려 화교들의 본국인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폭발적인 고도성장으로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북한은 이때부터 중국과의 정치적 예속은 약화돼도 경제적 예속관계는 오히려 강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들이 북한 화교들의 성장을 부추긴 것.
반대로 경쟁관계에 있었던 재일동포의 경우, 조총련 자본의 약세와 북일관계 경색으로 인해 시장의 중심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한때 ‘똥떼놈’으로 불렸던 북한 화교의 사회적 지위는 2000년 대 이후 ‘신흥귀족’으로 탈바꿈됐다. 앞서 대규모 토목사업의 예와 같이 북한 화교는 정경유착을 토대로 각종 대규모 국가사업에 자본을 대고 있으며 이젠 당국이 주관하는 각종 행사에 귀빈으로 참석하고 있다. 심지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생전인 2002년 <노동신문>을 통해 화교를 직접 지칭하며 감사의 표시까지 했다. 이젠 평양 한복판인 문수거리에 ‘차이나타운’을 형성하며 그 세를 과시하고 있다.
앞서의 대북소식통은 “이제 화교가 없이는 북한 시장이 돌아갈 수 없을 지경이다. 이는 본국과의 끈끈한 꽌시(關係·중국 특유의 연줄 문화)를 토대로 한다”며 “밀수와 밀매를 포함한 상품의 거래, 북한의 무너진 중앙은행을 대신하는 여신업, 고용창출, 심지어 유우성 씨가 현재 혐의를 받고 있는 외부에서의 송금 분야까지 화교의 영향력은 대단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만 북한 입장에선 다소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북한 화교의 존재는 당국에 있어선 양날의 칼”이라며 “국가사업 진행에 있어서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됐지만, 외부 정보의 통로 역할도 하고 있다. 2004년 룡천역 폭발사고 당시 내부의 정보를 외부로 유출시킨 것은 화교들이었다. 어쩌면 화교가 북한 개혁개방의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는 한국 입장에서도 눈여겨 봐야할 점”이라고 지적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