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부 A씨는 “아무것도 모르고 발을 들여놓은 티켓다방의 선불금이 이렇게 족쇄가 될 줄은 몰랐다”며 기막힌 사연을 털어놓았다. | ||
성매매 업소를 탈출해 소중한 가정을 일궜다가 끝내 과거가 밝혀져 위기를 맞은 한 여성의 사연이 주변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사연의 주인공은 전남의 한 작은 도시에서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던 A씨(23). 그녀의 과거가 드러난 것은 공교롭게도 잃어버린 지갑 때문이었다. A씨는 지갑을 분실했다고 파출소에 신고했다 되레 사기죄로 긴급체포되는 의아한 일을 겪어야 했다. 자신이 3년 전 일하다 탈출했던 성매매 업소의 업주가 자신을 사기죄로 신고해 놓았던 것.
이 사실을 안 남편은 가출했고 A씨는 충격을 받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현재 A씨의 어린 두 아이는 A씨의 할머니와 A씨의 시어머니가 맡아서 돌보고 있다.
A씨를 지난 6년 동안 괴롭힌 잘못된 운명의 굴레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마침 지난 9월21일 경찰청 성매매피해여성 긴급지원센터의 간담회를 마치고 여수로 돌아가던 길의 A씨를 만날 수 있었다. A씨가 가슴으로 토해낸 기막힌 사연을 육성고백 형식으로 담았다.
내가 처음 티켓다방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고등학교 2학년인 1998년이었다. 어릴 때 어머니가 가출하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나는 여수에서 큰오빠와 단 둘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오빠가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책을 불태우기도 하는 등 잦은 불화를 겪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제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나는 결국 집을 나와야 했다. 친구가 (티켓)다방에 다니고 있었는데 좋은 옷을 사 입고 현금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 막연히 돈을 잘 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는 친구가 들고 다니던 돈을 고스란히 일하는 아가씨의 몫으로 여길 정도로 업계의 생리에 대해 무지했었다. 그러나 일을 시작한 뒤에 내가 깨달은 업계의 질서는 생각한 것 이상으로 가혹했다.
아침 8시30분부터 밤 12시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해야만 했다. 밤에 손님들과 술을 마시고 늦게 잠들어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면 꼬박꼬박 지각한 벌금을 물었다. 5분만 늦어도 1시간에 해당하는 벌금 3만원을 내야 했다.
일을 나가면 시간당 3만원을 받는데 업주에게 60∼70%를 떼였다. 게다가 커피 등의 재료비를 내가 물어야 했고 두 달에 한 번씩 사는 옷값, 화장품값 그리고 숙식비를 내다 보니 빚은 점점 늘어갔다. 처음 1백만원을 선불금으로 받고 일을 시작한 뒤 두 달이 되자 빚은 어느새 2백만원으로 늘어 있었다.
티켓다방은 소위 ‘물갈이’를 위해 업주들끼리 한두 달마다 서로 아가씨들을 교환하는데 그럴 때마다 소개비 등 경비 명목으로 다시 1백만원이 빚으로 불어났다. 업주들끼리 선불금을 받아내기 위해 여자들을 돌리기도 한다. 나는 여수와 고흥을 오가며 8곳의 가게에서 일을 했다. 어떤 때는 전에 일했던 업소로 다시 가기도 했다.
업주들은 항상 우리들에게 “너희가 도망가도 어떻게든 다 알아내서 잡아온다. 섣불리 도망갔다가는 뼈도 못추린다”고 겁을 주곤 했다.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아직 어린 나는 그런 말이 무서워서 도망갈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내 삶은 이렇게 정지돼 있었지만 무심한 세월은 그저 흐르기만 했다. 1999년 나는 법적인 성인이 됐다. 하지만 늘어난 것은 나이뿐만이 아니었다. 성인이 되자 이젠 직업소개소를 통해 업소를 옮겨다니게 되었다. 그동안은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소개소를 거치지 않고 업주들을 통해서 옮겼던 것이었다. 소개소를 통하게 되자 소개비 등의 경비로 옮겨다닐 때마다 빚이 더 불어났다.
일을 하면 할수록 삶의 희망이 보여야 하는데… 갈수록 느는 것은 빚과 고통뿐이었다. 내가 옮기고 싶다고 옮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기 싫다고 안 갈 수도 없었다. 어떤 때는 50평이 넘는 가게에서 나 혼자 손님들을 받아야 했다. 노예와도 같은 생활이었다.
빚의 규모가 커지면 티켓다방 업주들은 으레 여자들을 ‘3종 업소’로 보낸다(다방이나 룸살롱처럼 식품위생법으로 관리되는 업소를 속칭 ‘1종 업소’라고 부르고, 윤락업으로 분류되는 업소를 ‘3종 업소’라고 한다). 빚이 적으면 감시를 잘 안하는데 빚이 커지면 도망갈 염려가 있어 감시가 철저한 3종 업소로 보내는 것이다. 2001년 1월 나는 순천의 직업소개소를 통해 익산에 있는 ‘유리집’ 형태의 업소로 옮겼다.
가기 싫었지만 나에게 선택의 기회는 없었다. 소개소 업주는 출퇴근이 가능하고 숙소도 잡아주고 손님과 2차 나가면 70만원도 받을 수 있다고 회유했다. 소개소 업주는 결국 버티던 나를 성폭행한 뒤 3백만원의 소개비를 받고 유리집 업소 주인에게 넘겼다.
이곳에 온 손님들은 4∼5명이 맥주 한 박스 가격으로 20만원을 냈다. 우리 같은 종업원에게는 여기서 5만원가량이 떨어지지만 술값과 안주값 등의 재료비를 제외하면 내 손에 들어오는 돈은 고작 5천원이었다.
그나마 손님이 계산하지 않은 담배값까지 업주에게 물어줘야 했다. 생활에 필요한 세제나 반찬값, 밥값을 제외하면 손에 남는 게 하나도 없었다. 무료봉사나 다름없었다. 살찐다는 이유로 밥도 하루에 한 끼밖에 먹지 못하게 했다.
가게 주변에선 아가씨들이 도망갈까봐 항상 감시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다. 모든 문은 이중으로 설치돼 안쪽뿐 아니라 바깥에서도 잠글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손님이 오면 우린 그들의 노예였고, 손님이 없을 땐 우리에 갇힌 짐승일 뿐이었다.
이곳으로 옮긴 지 어느 새 35일이 흐른 그해 2월15일. 아침 7시께 여느 때처럼 화장을 지우고 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우연찮게 뒷문이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지키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아마 일이 끝날 때라 모두 자러 간 모양이었다.
‘뛰자’. 한순간도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안 한 적이 없었다. 나는 입고 있던 추리닝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지갑만 달랑 들고 바로 뛰쳐나왔다. 곧장 택시를 타고 순천의 아는 언니를 찾아갔다. 그렇지만 그 언니 집도 불안했다. 유리집 사람들이 바로 뒤에서 쫓아오는 듯했다.
하루 뒤 다시 집을 나섰다. 급히 나오느라 돈을 미처 준비하지 못해 차비를 구걸해야 했다. 그 돈으로 전북 정읍에 있는 범적사를 찾아갔다.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지만 언젠가 절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밥을 해주며 10개월을 지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밥을 준비해야 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엔 오랜만에 평온이 찾아왔다.
그 해 추석이 지난 뒤 이제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하산을 결심했다. 구미에 있는 고모를 찾아갔더니 그곳의 ○○제품 공장을 소개시켜줘 일을 시작했다. 일한 지 한 달이 지난 뒤였다. 그곳에서 일하던 지금의 남편 친척 되는 분이 남편을 소개시켜 주었다. 남편은 나와 동갑이었는데 역시 같은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남편을 만나 그나마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누군가 날 알아보고 잡아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떠나질 않았다. 사람이 많은 곳은 되도록 피해다녔고 외출도 삼갔다. 외출할 때는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쓰고 다닐 정도였다. 여수에 있는 친할머니를 만나러 갈 때도 밤늦게 택시를 타고 갔다가 5분 정도 얼굴을 보고 다시 돌아오곤 했다.
그러다 임신을 하게 되어 임신 9개월째에 남편의 집으로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예전에 업주들이 “도망가면 너희들은 주민등록등본도 못 떼고 병원도 못 다닌다. 기록이 뜨기 때문에 다 알아낼 수 있다”고 한 말이 떠올라 임신중독일 때 병원도 제대로 가지 못했다. 임신 뒤 아이를 낳기 전까지 딱 두 번 쫓기듯 병원에 갔을 뿐이었다.
남편과 나는 나이도 어린 데다 서로 부담감을 주기 싫어서 임신 1개월 전까지도 일을 했다. 나는 옷가게로 직장을 옮겨서 일하고 있었는데 한 달 월급이 80만원이 안 되었지만 힘든 줄도 모르고 열심히 일했다. 이제 나도 행복을 꿈꿀 수 있는 듯했다.
그러다 지난해 3월 누군가가 나의 과거를 흘깃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얘기가 들렸다. ‘사기를 치고 도망중’이라고 누가 찾아와 시댁에 말했다는 것이다. ‘혹시 그들이 아닐까.’ 겁이 덜컥 났다. 시댁에서는 오히려 “동명이인인가 보다. 누군가 널 괴롭히려는 모양이다”는 반응이었다. 남편과 나는 전남의 다른 도시로 옮겨갔다. 가구나 가전제품도 다 버리고 박스 4개가 이삿짐의 전부였다.
그곳에서 나는 매실이나 감꽃을 따는 일을 3개월간 하다 세차장 일을 시작했고 남편은 자동차 정비를 배우기 시작했다. 올해 4월에는 둘째 아이를 출산했다.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고 열심히 살면서 애를 키우고 싶었다.
그러던 지난 8월1일이었다. 구미에 있는 시댁에 가기 위해 대구에서 버스를 갈아타다 지갑을 잃어버렸다. 남편에게도 연락이 안되어 파출소에 가서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는데, 파출소에서 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묻더니 갑자기 나에게 “여수에 갈 차비 없어도 되겠는데요. 내일이면 모시러 올 겁니다”라며 날 긴급 체포한다는 것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재차 묻자 경찰은 김아무개라는 사람이 나를 사기죄로 신고를 해 기소중지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날 사기죄로 신고했다니, 아니나 다를까 김아무개라는 사람은 내가 탈출한 업소의 주인이었다.
어떻게 하든 가정을 지키고 싶었다. 경찰서로 찾아온 남편에게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 남편을 잘 설득해 돌려보냈다. 그러나 정작 나를 고소한 업주는 경찰서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야 그가 남편 회사에 찾아간 사실을 알게 됐다. 업주가 남편에게 ‘돈을 갚으라’며 협박을 해 남편이 그간의 일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불구속으로 당일 풀려나 여수에 있는 친할머니 집에서 지내는데 남편의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남편이 출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안한 마음에 집에 갔더니 남편이 편지를 한 장 남겨놓고 나갔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하고 앞이 보이지 않았다.
편지에서 남편은 “그런 일 때문에 그동안 외출도 잘 안하고 모자랑 선글라스를 쓰고 다녔구나. 불안에 떨었을 당신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더러운 돈을 왜 아직 갚지 않고 놔두었느냐. 내가 벌어서 그 돈을 빨리 갚아 버리겠다. 기다려라. 사랑한다”라는 글을 남겼다. 순간 눈물이 앞을 가렸다. ‘미안합니다. …정말 사랑합니다.’
남편이 날 변함없이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충격을 받았을 남편을 생각하니 아직도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제발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업주들은 친할머니와 남편에게 찾아가 돈을 갚지 않으면 가족들에게 모든 사실들을 알리겠다고 협박하고 괴롭혔다고 한다.
이번 일로 경찰서에서 예전의 업주들을 만나게 됐다. 그들이 나에게 욕설을 퍼붓고 멱살을 잡고 상처를 내자 갑자기 내가 지금까지 떨쳐버리려고 애썼던 예전 상황으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결혼했다는 것도 남편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닌 것 같고, 아이들도 내가 낳은 아이가 아닌 것 같이 느껴졌다. 갑자기 예전에 성매매 업소에서 일했던 때의 괴로운 심정이 되살아나고 불안감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고 발을 들여놓은 티켓다방의 선불금이 이렇게 평생 따라다니며 족쇄가 될 줄은 몰랐다. 나의 과거 때문에 힘들어하는 남편과 아들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나 같은 여인은 사랑할 수도, 다시 행복할 수도 없는 걸까.’ 누군가에게 묻고 싶다.
A씨는 현재 불안증세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는 중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3개월 전 TV를 보고 알게 된 경찰청 성매매 피해여성 긴급지원센터의 소개로 여수의 성폭력 상담소와 인연을 맺고 활발하게 상담활동을 벌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