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기사내용과 관련 없음.
“그날 지유가 다치지만 않았더라면…. 꼭 제 탓인 것 같아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지난 11일 천안시 서북구 와촌동의 한 초등학교에서 만난 지유의 담임선생님이었던 강 아무개 교사는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지유가 팔을 다친 건 지난달 16일 학교 운동장에서였다. 2교시 후 중간놀이시간에 아이들과 선생님은 비석치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유는 제 차례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구름사다리에 매달려 놀다가 떨어졌다. 강 교사는 “팔이 아프다고는 했지만 별다른 외상은 보이지 않았다. 3교시 수업을 하고 지유가 계속 아프다고 하기에 그제야 병원으로 옮겼다”고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강 교사는 학교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A 정형외과로 지유를 데려갔다. 인근에서 가장 큰 정형외과이기에 천안주민 사이에선 유명한 곳이었다. 인근 병원 중에 유일하게 마취전문의가 상주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연락을 받은 아이의 부모님이 급히 달려왔다. 학교에서 다쳤지만 지유의 부모님은 선생님을 일체 책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괜찮다”며 강 교사를 안심시켰다.
19일로 수술 일정을 잡아두고 지유는 병원에 입원했다. 금방 나을 걸로 생각했다. 지유의 아버지 서 아무개 씨는 17일 자신의 SNS에 “큰 딸래미 팔 부러져서 입원. 수술까지 해야 한단다. 푸닥거리라도 해야 하나?”라는 말과 함께 지유가 환자복을 입고 팔 보호대를 한 채 동화책을 읽고 있는 사진을 올렸다.
그런데 3일의 입원 기간 동안 병원의 처치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지유가 평소 없던 코피를 흘리고 몸에 열이 있었다. 담당의에게 이를 알렸지만 “아동용 약(해열제)이 없으니 필요하면 집에서 가져다 먹여라”는 대답을 들었다. 병원은 아동골절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다. 해준 처치는 간호사가 병실에 가습기를 가져다 놓은 게 전부였다. 지유는 다친 날이 금요일이었고 주말이 끼어 있어 월요일 수술 전까지 병원에서 그냥 기다려야 했다.
수술 당일 아침.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진행한다”는 마취전문의의 얘기를 듣고 지유 아버지는 내심 불안했다. “부분마취를 하면 안 되냐”고 물었지만 담당의사는 “그러면 아이 아파서 죽어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오전 9시 20분으로 예정된 수술을 앞두고 지유는 수술실 앞 침대에 누웠다. 수술실장이 다가와 지유에게 주사를 놓았다. 지유의 어머니는 “마취하는 거예요?”라고 물었고 “네”라는 대답을 들었다.
11시 20분. 수술을 마친 집도의는 회진을 돌며 지유 부모에게 다가와 “수술은 잘 마쳤다”고 전했다. 그러나 지유는 여전히 수술실에 있었다. 전신마취는 길어야 한 시간이면 깨어나지만 지유는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회복실로도 옮겨지지 않은 채 계속 기다리기만 했다. 오후 2시가 다 되도록 깨어나지 않자 지유 부모가 “대학병원으로 옮겨야 하는 것 아니냐”고 병원에 물었다. 마취담당의는 “아이가 체력이 약해서 좀 늦어지는 거다. 괜찮다”며 부모를 안심시켰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지유 부모는 수차례 대학병원 이송을 요구했지만 병원 측은 “좀 더 기다려보자”는 대답만 되풀이했다.
오후 4시가 지나자 지유의 상태는 더욱 불안해졌다. 맥박, 혈압은 점점 떨어져만 갔다. 하지만 5시가 돼 가도 부모는 여전히 의사를 믿고 있었다. “부작용이나 후유증이 있으면 어쩌죠?”라는 아버지 서 씨의 물음에 의료진은 “그런 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불과 30분 후 의료진이 급박하게 움직였다. 수술실로 부모들을 불렀다. 수술실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지유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아이의 심장에 제세동기를 이용, 심폐소생술을 시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병원은 그제야 “대학병원에 이송요청을 했다”고 말했다. 지유는 심폐소생술을 받으며 인근 순천향대학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오후 8시 48분 결국 짧은 생을 마감했다.
아버지 서 씨는 자신의 SNS를 통해 지인들에게 지유의 장례일정을 알리며 “동생들에게 양보하느라 사랑을 독차지한 적이 별로 없었다. 이렇게 허망하게 갈 줄도 모르고 입원한 며칠 동안 엄마를 독차지할 수 있다고 너무나 좋아했다”고 딸을 회상했다. <일요신문>은 지유의 부모님에게 수차례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마취의사 사망으로 너무 충격이 크다”며 응하지 않았다.
한편 유가족은 의료사고를 주장하며 경찰의 수사와 부검을 요청했다. 지난달 23일 발인을 마친 후 지유의 외삼촌 이 씨와 지인들은 A 정형외과를 찾아가 진료기록을 확보했다. 이 씨는 <일요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진료 기록을 검토했는데 형편없었다. 제대로 기록된 게 없었다. 조작한 부분도 있는 것 같지만 급했는지 그마저도 처치시간 등이 전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부모를 아연실색하게 하는 사실은 또 있었다. 외삼촌 이 씨는 “지유에게 마취주사를 놓았던 수술실장은 간호조무사였다”고 주장했다. 의료법상 간호조무사는 의료인이 아니므로 진료보조업무만 담당할 수 있다. 마취주사는 의사의 업무다. 이 씨는 이어 “병원에는 정식 간호사가 한 명도 없었다. 모두 간호조무사였다. 병원 관계자로부터 들은 녹취록이 있다”고도 말했다.
의료법에는 병원은 연평균 1일 입원환자를 2.5로 나눈 수만큼 정식 간호사를 고용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단, 50%를 간호조무사로 대체할 수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A 정형외과는 29병상을 갖췄다. 간호사를 적어도 5명 이상은 고용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유족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명백한 의료법 위반이다. <일요신문>은 A 정형외과에 간호사가 고용돼 있는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확인 요청을 했으나 “특정 의원의 의료인력 고용현황은 개인정보에 해당돼 공개하기 어렵다”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사고 후 유족들은 집도의도, 마취전문의도 만날 수 없었다. 병원의 사과는 일체 듣지 못 한 채 3주가 흘렀고 유족은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지난 9일 오전 마취전문의가 병원 내 침상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됐다는 소식이었다. 마취의 김 아무개 씨(49)는 이날 오후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천안서북경찰서에 출석해 지유의 부모와 대질심문을 할 예정이었다. 오전에 출근한 김 씨는 “피곤하다”며 동료들에게 링거주사를 놔달라고 요청했다. 경찰 조사 중 병원 관계자는 “김 씨가 일어나지 않아 상태를 확인하러 갔는데 호흡이 없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씨는 인근 종합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전 10시 10분경 결국 숨졌다.
김 씨는 의료사고 담당 경찰과 자신의 부모님 앞으로 유서를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지유의 아버지 서 씨가 13일 남긴 SNS글에 따르면 김 씨는 지유의 부모 앞으로도 유서를 작성했다. 서 씨는 “마취의사가 사망하고 경찰로부터 ‘지유양 부모님’이라는 봉투에 담긴 그의 유서를 전달받았다”고 적었다. 기자는 천안서북경찰서 수사과장에게 유서의 내용이 지유 사망사건과 관련이 있는지 물었으나 “(의사의) 유족들이 많이 힘들어한다. 수사진행 중인 사안이라 말할 수 없다”는 답을 들었다.
한편 두 사람이 사망했지만 병원은 영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기자가 지난 11일 병원을 찾았을 때, 해당 정형외과 주변에서 휠체어를 끌거나 목발을 짚은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의료사고로 추정되는 사망사고가 있더라도 별도의 행정처분이 내려지지 않는 한 병원은 영업을 지속할 수 있다”며 법적으로는 문제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지유의 아버지는 SNS에 “사람이 또 죽었는데 병원 측은 아직도 입장정리를 하지 않는다. 사죄하고 하늘로 가신 마취의사 때문에 며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쉬고 있지만 상황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글을 남겼다.
기자는 해당 병원에 유족 측이 제기한 의혹에 대한 해명을 들으려고 했지만 “담당자가 자리에 없다”는 말만 되돌아왔다. 그 뒤 수차례 통화를 시도했지만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아 더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는 없었다.
천안=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