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두완씨가 최근 산문집에서 ‘거물’들과 관련한 옛날 얘기를 털어놨다. 왼쪽은 전직 대통령들. | ||
과거 70년대 각종 TV, 라디오 방송에서 구수하면서도 날카로운 입담으로 시사 프로그램 진행의 최고봉 자리에 올라선 ‘대한민국 앵커맨 1호’ 봉두완씨(69·현 천주교한민족돕기회 회장)가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품평’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봉씨는 지난 30년간의 언론인 생활을 정리해 최근 펴낸 산문집 <앵커맨>(랜덤하우스 중앙)을 통해 방송 활동 및 국회의원(11·12대) 시절 접촉한 거물급 인사들과 얽힌 뒷이야기를 공개했다. 자신의 삶을 ‘키워드’로 삼아 우리 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봤다는 봉씨의 눈에 비친 ‘거물’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봉씨는 우선 책 첫머리에서 자신이 민중의 인기를 얻게 된 비결을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의 애정 덕으로 돌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봉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정치, 경제 및 언론관에서 ‘노선’을 달리한 이 전 회장의 태도가 오히려 자신에게 ‘행운’을 불러왔다고 분석했다.
봉씨는 “삼성 소유의 동양방송(TBC)이 정부 여당에 대해 위험 수위를 오르내리는 비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박 전 대통령과 이 전 회장과의 ‘거리’ 때문이었다”며 그 덕에 TBC에서 방송을 시작한 자신도 서슬 퍼런 유신정권 아래서도 박 정권을 비판하고, 논평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봉씨는 박 전 대통령과 이 전 회장 사이에 틈이 생긴 계기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을 할애해 설명했다. 봉씨는 1966년 일어난 ‘한비사건’이 두 사람이 뒤틀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라고 못 박았다. 흔히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불리는 ‘한비사건’은 삼성이 세운 한국비료주식회사가 원료 수입 과정에서 사카린을 들여오다 정부의 제지를 받은 사건.
봉씨는 이 사건이 일어난 이후로 두 사람의 관계가 급속도로 나빠졌으며, 실제 박 대통령 재임 당시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자리를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일곱 번 연임하는 등 이 전 회장에 대한 박 대통령의 견제 심리가 꽤 감정적인 외부 대응으로 드러났다고 소개했다. 심지어 골프를 즐기는 박 전 대통령이 이 전 회장이 소유한 안양골프장에서의 ‘라운딩’은 유난히 꺼렸다는 후문도 소개했다.
봉씨는 하지만 박 전 대통령과 개인적으로는 무척 가까웠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박 대통령이 자신을 “깡패”라고 부르면서 청와대에 자주 초청을 했고, 둘이 함께 ‘대작’을 하는 자리에서는 박 대통령에게 “대통령 그만하시고, 제1야당의 당수나 하시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 박정희 전 대통령. | ||
반면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선 무능하면서도 부패한 권력자로 평가했다. 봉씨는 특히 90년 3당 합당을 언급하면서 “합당 과정에서 노 대통령의 우유부단하면서도 이중적인 성격이 드러났다. 합당 후에도 불분명한 태도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비자금 챙기기에 바빴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봉씨는 지난 88년 민정당 13대 국회의원(마포·용산) 후보공천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탈락한 바 있다. 그 때문인지 노 전 대통령에 대해서만큼은 ‘일인자의 자리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때의 일인자’라는 다소 감정적인 표현도 마다하지 않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선 함께 방송을 하다 벌어진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두 사람을 평했다. 그는 두 대통령에 얽힌 재미난 인연을 소개하면서도 문민정부나 국민의 정부 역시 청와대나 정당측의 ‘프로그램 중단’ 압박이 그치지 않았다며 다소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
우선 김영삼 전 대통령과는 70년대 초 자신이 생방송으로 진행하던 시사토크쇼 <동서남북>에서 벌어진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소개했다. 신민당 대표로 이날 토론 참가자로 나온 김 전 대통령이 방송 직전 모교(경남고) 야구팀 결승전이 열린 동대문야구장에서 후배들이 준 소주를 받아마신 것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카메라를 다른 참가자에게 돌려놓은 뒤 스튜디오 옆에서 김 전 대통령의 등을 두드려 구토를 하게 해 억지로 방송을 마친 ‘진땀 나던’ 일화를 공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이희호 여사의 막내 동생인 이성호씨와 경복고 동창이라는 이력 때문에 상당한 교감을 나눌 수 있었다고 밝혔다. 봉씨는 대통령에 당선된 DJ가 KBS <국민과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할 당시, 사회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진행하던 아무개씨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DJ가 자신을 진행자로 추천했다는 뒷이야기도 공개했다.
또한 DJ가 자신의 처남 친구인 김원기 의원(현 국회의장)을 통해 함께 일하자고 간청했으며, 심지어 이철 전 의원을 수시로 새벽에 집으로 보내 입당을 권유하는 등 자신에게 큰 애착을 보였다고 소개했다. 봉씨는 김 전 대통령은 언어 구사가 화려하고 논리가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사람으로 호평했으며, 단지 인간성 대해서는 ‘글쎄’라며 다소 애매모호한 반응을 드러냈다.
또한 그는 DJ가 집권한 후 김종필 국무총리의 인준이 한나라당에 의해 거부되는 것에 대해 “무슨 놈의 야당이 정쟁만 일삼느냐”고 몰아세우다 고교 동창인 당시 이한동 한나라당 대표위원과 고교 10년 후배인 맹형규 의원의 ‘맹공’에 시달린 일화도 소개했다.
이밖에도 봉씨는 ▲62년 장면 정부에 반대하는 신민당 김도연 위원장을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특종 기사를 쓴 뒤 장면 총리실로 불려가 호되게 혼난 기억 ▲68년 <한국일보> 재직 시절 이건희 현 삼성그룹 회장과 장타 골프 내기에 져 <중앙일보>로 이직한 에피소드 ▲97년 대선 당시 자신이 회장으로 있던 ‘천주교한민족복음화추진본부’의 고문인 DJ와, 자신이 재단이사장을 맡았던 가톨릭대학교의 발전후원회장인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결국 이 후보를 선택했다는 후일담도 이 책에서 공개했다.
또한 ▲자신이 11·12대 국회 외무위원장으로 재직하던 중 뉴욕에서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을 만나 그 뒤 20여년간의 우정을 이어온 인연 ▲광운대 신문방송학과 특임 교수 시절, 신방과 학생이었던 2002월드컵 스타 설기현(잉글랜드 울버햄튼)에게 F학점을 주려다 교무처의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D학점을 준 에피소드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