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영 대법원장(왼쪽·합성사진)이 양승태 특허법원장(오른쪽)과 이공현 법원행정처 차장을 각각 신임 대법관과 헌법재판관으로 내정하자 개혁진영이 반발하고 있다. | ||
그러나 이번 전격작전으로 대법원이 당장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켰을 수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더 큰 저항을 불러오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사법부가 스스로는 변화할 수 없다는 증거를 보여준 것으로 여권은 받아들이고 있다. 여권은 사법부 개혁을 위해 강도높은 외부 충격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는 듯하다.
최종영 대법원장은 지난 19일 다음달 임명될 신임 대법관으로 양승태 특허법원장(사시 12회)을 선정, 노무현 대통령에게 임명제청했다. 같은 날 최 대법관은 또 오는 3월 퇴임하는 김영일 헌법재판관의 후임으로 이공현 법원행정처 차장(사시 13회)를 내정했다.
법원 안팎에서 양승태 법원장의 대법관 제청은 어느 정도 예상이 돼 왔다. 지난해 7월 사법부 개혁의 목소리에 굴복, 김영란 대법관(사시 20회)을 제청하는 파격을 보여준 최대법원장이 이번 새 대법관에는 법원 조직의 안정을 위해 기존 서열을 감안한 인사를 선택할 것으로 예측됐던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두 달이나 시간이 남은 신임 헌법재판관 지명도 마찬가지로 서열을 그대로 따르는 인사를 내정한 것은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헌재는 지난해 수도이전과 국가보안법 등과 관련된 각종 결정에서 보수 일변도의 성향을 보여줌으로써 여권과 시민단체들로부터 물갈이 압박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대부분 보수적인 고위 법관 출신들로 채워진 헌법재판관에 사회적 소수자들을 대변하고 개혁성향을 가진 법조인도 임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따라 오는 3월에 바뀌는 새 헌법재판관 지명 때부터 우리 사회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의 힘겨루기가 예상돼 왔다. 그러나 최 대법원장은 이 같은 논란이 시작되기도 전에 기존 관행을 따른 보수적 법원 고위 인사를 내정해 버린 것이다.
최 대법원장의 허를 찌르는 작전에 놀란 참여연대는 뒤늦게 성명을 내고 “과거 대법원이 보여준 서열위주 관행으로 완전히 회귀해 나온 결론으로 실망감을 금할 수 없다”고 비난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대법원의 이번 서열에 따른 인사 작전은 마치 배구 경기의 시간차 공격 같은 정교함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최 대법원장은 대법관제청자문위원회가 신임 대법관 후보로 3명의 인사를 추천한 지 단 이틀 만에 양승태 법원장을 대법관 후보로 임명제청했다. 지난해 7월 김영란 대법관 등이 후보로 추천돼 1주일이 지난 뒤에나 임명제청된 것에 비하면 이례적으로 신속한 결정이다. 후보가 결정된 이후 시간을 끌면 끌수록 언론 등에서 후보들에 대한 평가가 이어지고 사회적 논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대법관제청자문위에 참여했던 한 외부 인사는 지난 17일 후보를 선정하는 회의가 끝난 직후 “법원이 이번에는 내부 안정을 위한 인사를 뽑으려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사실상 양 법원장의 신임 대법관 임명제청을 결정해 놓은 뒤 이를 추인하기 위한 요식절차로 대법관제청자문위를 진행시킨 것으로 보인다.
시간차 공격의 결정타는 양 원장의 대법관 제청 결과를 밝히면서 동시에 이공현 차장을 신임 헌법재판관으로 지명했다고 전격 발표한 것이다. 9명으로 구성된 헌법재판관의 지명권은 대통령과 국회, 대법원장이 각각 3명씩 나눠 갖고 있다.
이중 3월 중순 퇴임하는 김영일 재판관의 후임에 대한 지명권은 최종영 대법원장의 몫이다. 그러나 대법원장 지명 헌법재판관의 경우 국회 청문회 절차도 없기 때문에 선임자가 퇴임하기 열흘 정도 이전에만 발표해도 시간적으로 충분하다.
실제 최 대법원장은 2003년 전효숙 헌법재판관에 대해서는 선임 재판관 임기만료 6일 전에 지명했다. 그러나 최 대법원장은 이 같은 통상 일정보다 한달 반이나 앞서 차기 헌법재판관 내정자를 발표했다.
오는 9월 퇴임하는 최 대법원장에게 이번 인사는 법원 내부도 달래고 자신의 사람들도 챙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이공현 차기 헌법재판관 내정자가 현 법원행정처 차장인 것은 물론 양승태 차기 대법관 지명자도 전임 법원행정처 차장이다. 둘다 최 대법원장 재임시 법원의 안살림을 맡으며 지근에서 보좌했던 참모들이다.
더군다나 둘은 나란히 사시 12회와 13회로 지난해 김영란 대법관 임명으로 흔들렸던 법원내 승진 질서를 회복시킬 수 있는 서열위주의 인선이다. 김영란 대법관을 제외하고 대법관 중 막내 기수인 김용담 대법관(사시 11회)의 바로 뒤를 잇는 것이다.
이 같은 최 대법원장의 인선에 대해 법원 내부에서는 “순리대로 됐다”며 환영하고 있다. 특히 “이번 인선은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고 있는 대법원장의 지명권을 정당하게 행사한 것”이라며 이에 대한 비판을 묵과하지 않겠다는 분위기다.
그러나 법원이 마냥 좋아할 만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 법조계의 분석이다. 재야의 한 법조인은 “최 대법원장이 임기를 마치면서 외부에서 ‘욕먹을 각오’를 한 것 같다”고 촌평했다. 이어 이 법조인은 “이로써 사법부 개혁을 위해서는 대법원장이 누가 돼야 하는가가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됐다”고 지적했다.
대법관 13명 전원과 헌재재판관 3분의 1에 대한 지명권을 가진 대법원장에 개혁적 인사가 임명되지 않고는 도저히 대법원과 헌재의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결국 이는 오는 9월 있을 노무현 대통령의 신임 대법원장 지명을 놓고 더욱 치열한 사회적 논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해 주고 있다.
이번 신임 대법관과 헌법재판관 인선을 놓고 아직 여권에서는 별다른 얘기가 나오지 않고 있다. 사실 신임 대법관이 임명되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국회 제청과 국회 청문회, 본회의 의결 등이 필요하고 신임 헌법재판관도 대통령이 정식 임명하는 절차가 남아 있다.
그러나 여권이 이번 인선에 불만이 있더라도 최 대법원장 결정의 뒤집기에 나설 가능성은 매우 적다.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대법원장의 지명권을 무산시키는 것은 정치적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여권은 이번만은 그대로 넘어가되 9월 신임 대법원장 임명부터는 사법부에 대해 본격적인 반격을 벼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최 대법원장의 이번 인선은 사법부에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도 있는 셈이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