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율 스님은 지난 2003년부터 천성산 터널공사 문제로 정부와 마찰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세 차례나 ‘곡기’를 끊고 도롱뇽을 원고로 하는 이색 소송을 제기하면서 언론의 지면에 자주 오르내리곤 했었다. 그러나 이번처럼 모든 언론이 스님을 예의 주시하고 온 국민이 지율 스님의 안위를 걱정했던 때도 없었다. 급기야 단식 1백일째를 앞두고 지율 스님의 장례를 논의하는 상황에 이르자 ‘중립’을 고수하던 뭇 여론도 가만있질 않았다.
불교계와 일부 시민단체, 일부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스님을 살리자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야를 초월한 국회의원 91명도 ‘지율 스님 살리기와 천성산 환경영향평가 공동조사 촉구결의안’의 심사를 촉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율 스님 역시 목숨을 담보하면서 끝까지 초심을 굽히지 않자 정부는 지난 2월3일 결국 스님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한 발 물러났다.
생과 사의 선택의 기로에 이를 때까지 천성산의 꽃과 새들에게 했던 약속을 굳게 지키려 했던 지율 스님. ‘자연 보호’과 ‘자연 개발 ’, 이 두 필연적 갈등을 화두로 던진 지율 스님의 어제와 오늘을 되돌아봤다.
지율 스님은 1957년 경남 산청에서 12남매 중 둘째로 출생했다. 속세 이름은 경숙. 집 주변에 지리산이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던 때문이었는지 경숙은 유난히 산과 강, 그리고 자연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매일 개울에 발을 담그고, 꽃과 곤충들을 벗삼아 밝은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를 따라 가족이 서울 상도동으로 이사를 온 후부터 경숙은 눈물이 많아졌다. 6명의 동생이 잇따라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어린 경숙은 자신도 모르게 눈에서 흘러내리는 비통의 눈물을 자주 경험한 것이다.
일찌감치 삶과 죽음의 경계를 접한 그녀는 어린 나이에 이해하기 힘든 음악과 미술 세계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중·고교 시절 어린 동생들을 업어 키우고 집안의 궂은일을 도맡아하면서도 늘 손에는 문학책이 쥐어져 있었다.
특히 미술에 대한 관심은 누구보다도 강했다고 한다. 유명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은 으레 한 번씩은 경숙의 붓을 통해 또 다른 생명이 불어넣어졌다. 특히 경숙은 풍경 수채화나 난 그림에 유난히 애착을 보였다.
자연히 학교에서 주는 미술상은 모두 경숙의 몫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그림은 교실이나 학교 복도를 연일 장식하곤 했다. 이 때문에 미술에 관심이 많던 주변 친구들도 경숙을 꽤 따랐으며 친구들의 마음을 헤아린 경숙도 보답으로 자신이 직접 그림을 친구들에게 자주 선물했다고 한다. 손 감각이 보통 수준을 넘어서다보니 한 번은 병풍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병풍은 아직도 그의 어머니가 보관하고 있다.
어머니 임옥달씨(71)는 중대부고에 진학한 둘째 딸이 당연히 미대 진학을 꿈꾸는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아 어머니는 내심 일반 학과에 진학하기를 원하기도 했다. 도저히 미대 등록금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만을 졸업한 큰딸처럼 둘째 딸도 보통 대학을 나와 그저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갔으면 하는 것. 그것이 어머니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대학 입시를 앞두고 경숙은 홀연히 사라진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입시 준비에 매달리겠다면서. 경숙의 부모는 딸이 ‘미대 진학이 그저 꿈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여겼다. 어머니는 딸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멀리 떠나는 딸의 옷깃을 잡지 못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에 여비조차 쥐어주지 못했다.
경숙은 “6개월만 공부하고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긴 채 오대산에 위치한 한 사찰의 선방(禪房)을 찾는다. 참선하는 스님들의 뒤에서 매일 부처님과 눈빛을 마주한 경숙. 서서히 가슴 속으로 젖어든 불심 때문이었을까. 6개월 후 ‘입시생’은 ‘절반의 스님’이 되어 부모님 앞에 섰다.
대학에 입학하고서도 항상 불심을 가슴에 품었던 경숙은 80년대 초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불교에 귀의하기로 마음먹는다. 특히 원효 스님의 ‘대승기신론소’를 읽고 삶과 죽음의 근원적 문제와 자연의 질긴 이치에 관심을 갖고 어머니의 반대에도 오직 수행에만 전념했다.
결국 지난 92년 출가를 결심한 경숙은 경남 통도사에서 조계종 전계대화상을 지낸 청하스님 아래서 본격적으로 수행을 시작 했다. 그 후에도 매년 여름 대원사, 화운사, 수덕사, 동화사 등에서 머물며 불도에 심취했다.
97년 비구니승의 계를 주로 내리는 통도사에서 구족계(출가한 비구·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고 비로소 ‘지율’로 태어났다. 1년 후 통도사 말사로 천성산 기슭에 있는 내원사로 입사한 지율 스님은 천성산 산감(山監)으로 임명돼 산림 훼손, 밀렵 등을 감시하는 스님으로서 소임을 다했다.
절 밖의 일은 무심할 정도로 외면하던 그가 다시 속세로 나온 것은 지난 2001년 4월. 천성산 터널공사 현장에 집결한 굴삭기와 레미콘 소리들이 이미 자연과 ‘물아일체’된 지율의 가슴을 헤집고 만 것이었다.
공사 노선 변경을 위해 동료 비구니 스님 등을 동참시켜 반대 투쟁에 나서기를 수차례, 결국 지난 2002년 10월26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 후보가 ‘공사 백지화’ 공약을 선포하는 성과를 얻었으나 대선 이후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천성산의 도롱뇽을 살려야 한다”는 조그만 중얼거림으로 시작한 두 번의 단식도 소용없었다. 내리쬐는 햇살 아래서의 삼보일배, 17만 명의 국민들이 원고인 도롱뇽이 되어준 ‘도롱뇽 소송’도 대세를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대통령의 측근인 문재인 현 청와대 민정수석의 방문에 조그만 희망을 갖고 허기짐 정도는 부담되는 것이 아니라고 자위했던 지율 스님. 그는 단식 도중 청와대 앞을 지나다니다가 주변 주택에서 풍기는 콩나물국 냄새가 유난히 거슬렸으나 꾹 참고 또 참았다.
일말의 기대감에 지율 스님은 2004년 8월24일 또 다시 자신의 두 손을 잡은 문 수석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지율 스님에게 돌아온 것은 “공사 이야기는 이미 다 끝났다”라는 정부측 말뿐이었다.
사탕을 달라고 우는 아이가 된 기분에 원칙주의자라고 자부했던 지율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 해 10월 도롱뇽 소송 항고심에서 “도롱뇽을 천성산에서 전혀 보지 못했다”는 전문가들의 증언이 법정에서 받아들여지고,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 주변을 청와대와 경찰 정보과, 고속철도 공단 관계자들이 수시로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한 지율 스님은 청와대 앞에서 목숨을 담보로 내놓았다.
하루 하루 버틴 나날이 어느 새 1백일을 향했다. 이미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지율의 몸 전체에는 오랜 단식으로 인한 영양 부족으로 검버섯이 가득했다. 여름장마 기간 동안 얻은 피부병도 호전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율 스님은 단식 기간 중 여러 한방병원에서 자신을 걱정하며 보내준 녹용 등 한약을 모조리 다 어머니에게 보냈다. 말라가는 딸의 모습을 TV로 나마 지켜본 어머니는 딸의 모진 의지에 한약을 채 펴보지도 못한 채 눈물만 흘려야 했다. ‘그래도 물이나마…’라는 생각에 둘째 딸이 좋아하던 동치미를 정성스럽게 준비했으나 “어머니는 오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둘째 딸의 얘기를 막내에게서 전해 듣고는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청와대 앞 단식이 해를 넘기면서 지율 스님은 날짜가 얼마나 지났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위태로워졌다. 급기야 1월30일 서초동 정토회관에 지율 스님은 몸져누웠다. 몸은 차츰 싸늘하게 경직됐다. 의사들도 ‘의학적으론 기능 정지 상태’라고 말했다. 심지어 지율은 “꿈에 염라대왕을 봤다며 자신이 죽으면 시신에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하고 꼭 가족장으로 해달라”는 말까지 남겼다. 지율의 어머니는 며느리들에게 설 제사 음식도 차리지 못하게 한 뒤 매일같이 소리 죽여 통곡했다.
그러나 2월3일 저녁 정부가 지율 스님의 주장을 받아들이기까지 기적적으로 그의 숨은 멈추질 않았다. ‘친구들아, 너희를 지켜주마.’ 천성산의 법수 계곡, 간천골의 피나무 군락, 그리고 노루귀와 얼레지, 제비꽃, 그리고 자신이 제일 아낀 도롱뇽과 한 약속이 오히려 지율의 숨을 붙들고 있던 것이었다.
그는 깨어났지만 다시금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자신이 단식을 얼마나 했는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뒤에 있는 본질이 무엇인지 깨달을 때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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