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영철 검거 당시 유전자정보가 결정적 증거가 됐다. | ||
그러나 진술조서의 증거능력이 법정에서 인정되지 않고 강압수사가 불가능해지면서 검찰에게도 수사 과학화가 사활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예전처럼 그저 피의자의 자백만 받아내서는 기껏 기소를 해봐야 법정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다는 위기감의 발로인 것이다.
송광수 검찰총장도 지난달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과학수사 기반 확충이 올해 가장 역점을 두는 분야라고 말할 정도다. 검찰은 이를 위해 유전자정보은행의 설립 및 첨단 뇌파분석기 도입, 신문과정의 녹음·녹화 등 수사과학화를 위한 각종 첨단 기법을 개발하고 있다. 특히 올 4월부터는 대검찰청에 과학수사기획관실이 신설되는 등 검찰조직까지 과학수사 위주로 개편되고 과학수사 방식을 연구하는 검사들의 전국 모임까지 만들어지고 있다.
우선 검찰 수사과학화의 10년 숙원 사업인 유전자정보은행이 올해는 설립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유전자정보은행은 과거에도 추진된 적이 있지만 시민단체 등에서 인권침해라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번번이 좌절됐다.
그러나 지난해 희대의 연쇄 살인마 유영철 수사에서 유전자 정보가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는 데 기여하면서 유전자정보은행의 설립은 대세가 됐다.
검찰은 이미 유전자정보은행 설립을 위한 법안을 완성해 놓은 상태로 이 법이 올해 안에 국회에서 통과되면 하반기부터는 본격 가동될 것으로 보인다.
유전자정보은행에는 성폭력·강도·살인 등 강력사건의 피의자와 수감자들 수만명의 유전자 정보가 모아진다. 이는 다른 범죄 현장에서 채취된 유전자 정보와 비교, 분석해 동일인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수사에 활용된다.
지난해 말 도입된 첨단 ‘뇌파 분석기’는 검찰의 수사과학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비다. 뇌파 분석기는 피의자들의 머릿속에 잠재돼 있는 범죄와 관련된 기억을 잡아내는 기구다. 예컨대 범행을 인정하지 않는 살인사건 용의자에게 사건 현장에서 발견되 흉기를 화면으로 보여주면 자신도 모르게 뇌파가 작동하게 되고 뇌파분석기가 이를 포착해 내는 것이다.
또 뇌물 혐의를 받고 있는 정치인도 돈을 담았던 가방 사진을 보면 뇌파가 움직이게 된다. 검찰 관계자는 “임상실험 결과 뇌파분석기의 정확성이 95% 이상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기존 거짓말탐지기보다 한층 성능이 뛰어난 이 기구는 강력사건과 뇌물사건 수사에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모든 조사과정이 디지털 방식으로 녹음·녹화되는 전자조사실이 서울남부지검 등에 설치됐다. 이 전자조사실은 수사 과정의 인권침해도 예방할 수 있고 검찰 수사과정에서 자백한 범행을 법정에서 부인하는 피의자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리고 있다.
검찰의 수사과학화를 위한 노력은 지난해 세계 최초로 ‘러미나’로 불리는 신종마약 복용을 적발하는 모발감식 기법을 개발하는 결실도 맺었다. 최근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러미나는 지금까지 소변 감식기법만 활용돼 왔는데 단속에 한계가 있었다. 소변감식기법으로는 러미나 복용을 3~4일 전까지밖에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검 과학수사과가 개발한 모발감식기법은 수개월 전에 복용한 것까지 잡아낼 수 있다.
실제 검찰은 이 방식으로 러미나를 상습적으로 복용한 피의자를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검찰은 지난해 4월 20대의 러미나 복용 용의자를 체포했으나 소변 감식으로는 복용 사실이 확인되지 않아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이에 새로 개발한 모발 감식기법을 처음 이용한 결과 6개월 전부터 지속적으로 복용한 중독자라는 사실을 확인해 기소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검찰은 또 컴퓨터 등 첨단 기기를 이용한 범죄 수사를 위해 네트워크, 인터넷 보안, 데이터베이스(DB) 등 각 분야의 컴퓨터 전문가 10여 명을 5~7급 수사관으로 특채, 수사 현장에 투입한다는 방침이다. 대검 관계자는 “첨단기술의 해외유출, 전자상거래 이용 사기, 개인금융정보 사냥 등의 범죄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과학수사 기법을 배우려는 검사들의 열기도 뜨겁다. 대검은 지난달 말 첨단범죄 수사와 관련된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고 대응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연구 모임인 `첨단범죄수사연구회’를 발족하고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갔다.
이득홍 서울중앙지검 컴퓨터수사부장이 초대 회장을 맡은 이 연구회는 전국 검찰청의 검사 7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이 연구회는 세미나를 통해 첨단기술유출 범죄수사를 위한 매뉴얼을 마련하고 첨단범죄수사 전문인력 양성 방안과 국가 첨단범죄수사센터 설치방안 등도 연구할 계획이다.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사부는 이달 초 `금융범죄 수사력 제고를 위한 워크숍’을 열었다. 이 워크숍에는 금융감독원 전문가 등이 강사로 초빙돼 검사와 수사관들을 대상으로 기업공시제도, 선물·옵션 이론 등 금융이론과 증권범죄 수사방법 등을 강의했다.
검찰 조직도 과학수사에 역점을 두는 방향으로 개편된다. 과거 대검의 핵심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공안부와 중앙수사부가 축소되는 대신 과학수사 관련 부서가 대폭 확대되는 것이다. 오는 4월 출범하게 될 대검 과학수사기획관실은 피의자의 심리·음성 분석과 문서감정 등 각종 과학수사 기법을 연구·개발하고 일선 지검의 과학수사를 지원하게 된다. 서울지검의 컴퓨터수사부도 첨단범죄수사부로 확대 개편된다.
이처럼 검찰의 과학수사 역량이 강화되면서 일선 검사들 사이에서도 컴퓨터수사부 등 과학수사 분야가 인기부서로 급상승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실제 서울중앙지검이 최근 전국 검사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임관 9년차 이내의 소장검사 수십명이 컴퓨터수사부 근무를 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검사들이 출세의 지름길로 공안부와 특수부만을 쫓아다녔던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현상이다.
서울지검의 한 소장검사는 “기술이 급속히 발달함에 따라 주먹구구식 수사는 더이상 설자리가 없어졌다”며 “예전에는 검사의 능력이 피의자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압박해 자백을 받아내는가로 좌우됐다면 앞으로는 얼마나 풍부한 과학수사 기법을 활용할 수 있는가가 결정적 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