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정원 진실위원회의 과거사 의혹사건 목록에 포함된 ‘민감 사건’들. 위부터 지난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장면. | ||
당시 진실위원회는 “(진실위원회) 위원들이 제출한 진실규명 대상 사건 목록에 대해 면밀히 검토 작업을 벌였다”며 “국정원 홈페이지를 통한 제보 등을 통해서도 폭넓은 의견 수렴을 거쳐 신중하게 조사대상 사건 목록을 취합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모두 92건의 의혹사건에 대한 조사가 실시될 것이라고 밝혔다.
<일요신문>은 최근 진실위원회의 ‘과거 의혹사건 목록’ 92건을 단독 확인했다. 진실위원회가 1차와 2차 등 순서를 정해 진실을 규명하겠다는 목록인 것이다. 이 목록에 따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난 2000년 노벨상 수상을 둘러싼 공작 의혹에 대한 조사도 포함돼 있다. 또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과 관련된 사건이 전체 92건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 관련된 사건도 여러 건이어서 정치권에서도 논란이 일 전망이다. [관련기사 12면]
진실위원회는 지난 2월3일, 우선 조사대상 사건 7건을 선정해 발표,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우선 조사 대상 사건 7건은 ▲인민혁명당(인혁당)과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 사건(1974년) ▲김대중 납치사건(1973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옛 국정원장) 실종 사건(1979년) ▲KAL 858기 폭파사건(1987년)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1992년)▲부일장학회 강제 헌납 및 <경향신문> 강제 매각 사건(1962년) ▲동백림(동베를린) 유학생 간첩단 사건(1967년) 등이었다.
진실위원회는 또한 우선조사대상으로 선정한 7건 이외에도 10여건의 의혹사건에 대해서도 2차 조사를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2차 조사 검토 사건은 ▲이수근 간첩사건 ▲최종길·장준하 사망 사건 ▲국제그룹 해체 사건 ▲문세광 저격 사건 ▲7·4남북공동성명 ▲남파간첩 이선실 사건 ▲통혁당 사건 ▲삼청교육대 사건 ▲국풍81 등이다. 이밖에도 과거 대선과 관련된 안풍(安風)·세풍(稅風)·북풍(北風)·총풍(銃風) 사건, 대북송금 사건, 이한영 피살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국회의원 서경원 밀입북 사건, 10·27법난,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 강기훈 유서 대필, 언론인 강제 해직 사건, 민추위 사건 등도 추후 조사 대상으로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국정원은 지난 2월 조사에 착수하면서 “그동안 취합된 92건의 의혹사건 가운데 39건에 대한 기초조사를 완료했으며, 앞으로도 기초조사를 계속해서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우선조사대상 사건으로 7건을 발표한 것이다.
그런데 <일요신문>이 확인한 92건에는 이밖에도 민감한 사건이 포함돼 있어 향후 진실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라 정치권 등에서 큰 파장이 일 것으로 전망된다.
대표적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공작 의혹’을 들 수 있다. 지난 2월 전직 국정원 직원이 시민단체의 인터넷 게시판에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상을 수상할 목적으로 국정원을 동원해서 해외공작을 진행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는 약 2조원에 달하는 뇌물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논평을 통해 “국정원이 북한에 뇌물을 바쳐가며 남북정상회담을 서둘러 추진했고, 그 이면에는 노벨평화상을 노린 탐욕과 충성경쟁이 개재됐다고 확신 한다”며 “국정원 같은 해외업무를 맡은 정부기관이 조직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면 돈세탁부터 전달까지 신속하게 이뤄질 수 없었을 것”이라면서 DJ의 노벨상 수상에 대한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국정원은 노벨상 수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에 국정원이 노벨상 수상을 위해 대북 자금 지원 등 로비 활동을 전개했다는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무맹랑한 것이다”고 강하게 반박했다. 그러면서 국정원은 DJ의 노벨상 수상 의혹을 제기한 전직 국정원 직원에 대해 “국정원 재직 때부터 성격이 매우 불안정해 단기간 재직중 근무부서를 자주옮겨 다니는 등 정보 업무에 적응하지 못함으로써 해외 정보 분야 업무를 제대로 알 수 없는 위치였다”고 주장했다. 결국 DJ의 노벨상 수상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게 당시 국정원의 입장이었다.
▲ 1970년 정인숙씨 피살사건 현장과 생전의 정인숙씨 얼굴(오른쪽) <보도사진연감> | ||
지난 1961년 2월13일 창간한 <민족일보> 발행인 ‘조용수 사건’에 대해서도 조사될 것으로 보인다. <민족일보>는 5·16군사쿠데타로 창간한 지 3개월여 만에 종간됐던 석간신문. 이 신문은 남북 협상과 남북 경제교류, 남북 학생회담 개최 등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논조로 인해 군부세력의 눈엣가시였다. 당시 군사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계엄사령부는 조용수 발행인이 신문 창간 자금을 북한에서 받았다는 혐의로 재판에 회부, 그해 연말에 사형이 집행했다. 우리나라 언론인 사상 처음으로 사형에 처해졌던 것이다. 또한 당시 감사였던 안신규와 논설위원이었던 송지영 등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그런데 당시 조용수 발행인에게 북한 공작금을 전달했다며 간첩으로 지목됐던 이아무개씨는 지난 90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을 받았다. 결국 이 사건은 당시 군부 세력에 의한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셈이다. 이 사건은 또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배석판사로 관여해 많은 논란을 남기기도 했다.
진실위원회는 언론과 관련해서 이밖에 ▲언론윤리위원회 파동 사건 ▲<경향신문> 강제매각 사건 ▲언론인 강제 해직 사건 ▲언론사 기자 해직 및 언론사 통폐합 사건 등도 조사할 예정이다. 이들 사건에 대한 조사는 현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언론사들과 또한번의 일전을 예고하고 있다.
또한 진실위원회는 당시 세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현재도 소문만 무성한 ‘정인숙 피살 사건’의 전모도 파헤칠 예정이다. 정인숙은 지난 1970년 3월17일 서울 강변도로에서 자신의 코로나 승용차에서 살해된 채 발견됐다. 당시 경찰은 살해 현장에서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었던 정씨의 오빠인 운전기사 정종욱씨를 병원으로 옮긴 뒤 수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경찰은 정씨의 오빠가 살해범이라고 발표했다. 여동생의 문란한 사생활에 격분한 오빠 정종욱씨가 권총으로 살해했다는 것.
하지만 정인숙의 수첩에서 당시의 권력 핵심 인사 26명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 국회에서도 쟁점화됐다. 당시 세간에선 정씨의 세 살배기 아이의 친부가 누구냐를 놓고도 화제가 됐다. 정씨의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를 정일권 당시 국무총리라고 지목하면서 친자확인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아직까지 이 사건의 전모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 이 사건은 DJ 납치사건과, 김형욱 실종 사건 등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3대 미스터리로 꼽히고 있는데, 진실위원회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펼칠 예정이어서 세인들의 관심이 또 한 번 쏠린 것으로 보인다.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사건’도 진실위원회의 조사 목록에 올라있다. 지난 1973년 군부의 실력자였던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업무상 횡령 혐의 등으로 징역 15년에 벌금 2천만 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해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괘씸죄’를 적용했다는 시선이 적지 않았다. 윤필용이 사석에서 “지도자를 바꿔보자”고 했던 발언으로 된서리를 맞았다는 것. 이 사건의 여파로 <대한일보> 사주가 수재의연금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나 폐간되기도 했다.
‘코리아게이트’의 주역이었던 박동선 사건도 그 진실이 밝혀질지 관심이다. ‘코리아게이트’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지난 70년대 중반, 박동선씨가 박정희 정권을 지지해줄 것으로 요청하면서 미국 국회의원들에게 뇌물 로비를 펼쳤다는 사건. <워싱턴포스트>가 지난 1976년10월 이를 보도하면서 미 의회에서 2년 이상 청문회가 진행됐다. 그리고 1백20여 명의 상하원 의원들이 청문회에 출석했으며, 당시 미 정부는 우리 정부에 박씨의 신병을 인도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우리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이로 인해 한때 한미 관계가 악화됐지만, 박씨는 1978년 사면을 받는 조건으로 미 하원 청문회에 자진 출두해 32명의 전·현직 의원에게 85만 달러를 제공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79년 기소면제를 받았다.
또 박씨는 지난 15일 사담 후세인 통치시절 이라크 정부를 위해 유엔에서 불법 로비를 펼친 혐의로 미국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는 상태다. 박씨가 후세인 정부로부터 2백만달러를 받아 상당액을 유엔 관리들에게 제공했다는 것. 현재 일본에 체류중인 것으로 알려진 박씨는 ‘박정희의 로비스트’에서 ‘후세인의 로비스트’로 탈바꿈한 셈이다. 그런 그에 대해 진실위원회가 ‘코리아게이트’ 전모를 파헤칠 예정인 것이다.
아직까지 진실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문세광 저격 사건’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등에 대한 조사도 병행될 예정이다.
그런데 진실위원회의 의혹사건 목록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 시절에 발생한 사건이 전체 92건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이 공화당 창당에 필요한 정치자금을 모으는 과정에서 불거진 ▲증권파동 사건 ▲회전 당구기(빠찡고) 사건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등도 조사 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따라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부친과 관련된 과거사 진실 규명에 대해 어떤 입장을 보일지도 주목되고 있다.
재계에도 불똥이 튈 전망이다. 진실위원회가 80년대 이후 벌어진 재계 관련 사건도 파헤칠 예정이기 때문이다. 조사 대상 사건으로는 ▲부실기업 통폐합 사건 ▲국제그룹해체 사건 ▲포철 민주노조 와해공작 사건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사망 사건 등이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다.
김지영 기자 you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