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옥천 육영수 여사 생가는 현재 건물터만 남아있다. 아래 사진은 복원 조감도. | ||
부친에 대한 추모 사업이 난항을 겪고 있는 데 반해 모친인 고 육영수 여사 추모 사업은 ‘소리없이 순조롭게(?)’ 진행중이다. 2월28일 육 여사의 생가 복원사업을 위한 기공식이 충북 옥천에서 있었고, 정부와 충북도청 옥천군청은 90억원에 이르는 사업비를 공동으로 기꺼이 부담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박 대표는 옥천 근처엔 얼씬도 않고 있다. 여전히 박 대표를 ‘육 여사의 분신’으로 여기고 있는 옥천 현지에서조차 “어머니 추도 사업을 고향에서 이렇게 하는데 한번쯤은 내려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원망 섞인 목소리가 나올 정도. 하지만 박 대표측은 “그것은 옥천군에서 하는 사업일 뿐”이라며 애써 거리감을 두고 있어 그 배경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육 여사의 생가 복원사업이 ‘소리없이 순조롭게’ 진행중이라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서울의 시각이다. 옥천 현지의 사정은 좀 달랐다.
사실 옥천 현지에서 육 여사의 생가 복원사업이 추진된 것은 90년부터였다. 당시에는 옥천 육씨 종중에서 시작됐다. 이어 94년께 육영재단이 나섰다. 하지만 모두 무산됐다. 그러던 것이 DJ정권이 들어선 이후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박정희 기념사업관을 지원하겠다고 나서면서 옥천 현지에서 다시 육 여사 기념사업 움직임이 불거졌다. 이번에는 옥천군에서 직접 나섰다. 군은 2000년 9월 생가복원 계획을 정하고, 2001년 2월부터 공식 활동에 들어갔다.
이때만 해도 지역 여론은 잠잠했다. 그러던 것이 지난 2월의 옥천 교동리 생가터에서 충북 부지사, 옥천군수, 박지만씨 등이 참석한 기공식 행사가 알려지자 외부에서부터 비난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그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는 육 여사의 생가 복원사업을 왜 국민의 혈세로 지어야 하느냐”는 것.
지역 정서를 살피던 옥천군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옥천신문사’의 오한흥 대표는 “육 여사 생가 복원사업을 문중에서 한다면 반대하고 말고 할 이유도 없다. 문제는 정부가 나서서 공공예산으로 이 일을 추진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자면 역사적 평가와 전 국민의 동의가 뒤따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자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실제 이 사업은 현재 전적으로 군청에서 주도하고 있다. 육씨 문중에서도 관심있게 지켜만 보고 있을 뿐이다. 박 대표측도 “옥천에서 하는 일”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일부의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이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나선 옥천군의 입장은 크게 두 가지. 군청의 한 관계자는 “육 여사의 생가는 사실 문화재 차원에서도 대단한 의미가 있다. 그곳은 1600년대 지어져서 정승만 세 분을 배출했기에 ‘삼정승집’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서 깊은 곳”이라고 전했다. 이 때문에 충북에서 이 터를 지난 2002년 4월 도기념물 123호로 지정하기까지 했다는 설명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인 찬성 여론 때문. 지역 여론을 수렴해야 하는 민선 군수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일은 오랜 숙원 사업이라는 설명이다.
▲ 박근혜 대표가 모친인 육영수 여사(오른쪽) 생가복원사업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인 찬성 여론에 대해서도 <옥천신문>의 이안재 편집국장은 “군청에서 제대로 여론 수렴 작업이나 했는지 의심스럽다”고 비판했다. 이 국장은 “사실상 이번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옥천군의 노림수는 육 여사 생가와 인근의 정지용 생가 등을 한데 묶어서 패키지 관광사업으로 상품화하겠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기자가 현지를 방문한 결과, 주민들의 오랜 숙원이라는 군청의 설명과는 달리 이 사업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도 상당했다. 눈에 띄는 것은 일부 현지 주민들이 감정을 내비치는 대상은 박정희 육영수 부부가 아니라 육 여사의 부친인 육종관씨라는 점이다.
기자가 교동리 생가터를 방문했던 지난 15일, 인근 두릉리의 한 주민은 “옥천 일대에서 육씨 땅 안 밟고는 못 지나갈 정도로 그는 떵떵거리는 대지주였다”면서 “그 많은 재산을 가졌고, 사위가 대통령까지 됐으면 좀 인정을 베풀만도 한데, 국가가 인정해준 소작농들의 땅까지 다시 강탈해 갔다”며 독설을 퍼부었다. 대체 무슨 사연일까.
두릉리 이해준 이장(70)이 기자에게 전해준 50년 전 이야기는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해방 직후 정부의 토지분배 특별법으로 합법적으로 취득한 토지를 한국전쟁 이후 옛 지주였던 육씨에게 다시 빼앗겼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에 대해 육씨 후손들은 “이미 오래전에 대법원 판결까지 다 받고 끝난 일”이라며 반박하고 있다. 하지만 이씨가 꺼내든 빛바랜 판결문과 토지계약서, 진정서 등의 자료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토박이 주민들의 ‘앙금’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육씨에 대한 지역의 곱지 않은 여론은 다른 이에게서도 감지됐다. 한 주민은 “육씨는 1920년대 당시 2만5백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삼정승집을 사들인 것은 물론 외제 승용차를 타고 서울을 오갈 정도로 엄청난 지주였다. 정미소와 금광 사업 등 돈 되는 사업도 엄청나게 벌였고, 족족 돈을 모았다”면서 “왜정 시대에 그만한 사업을 하면서 재산을 유지할 정도였으면 굳이 말 안해도 알 수 있는 것 아니냐. 당시 육씨네 집안의 세력은 웬만한 일본 관리나 순사도 굽실거릴 정도로 대단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서는 지역 언론인 <충청리뷰>에서 지난 3월19일자로 보도한 내용이 흥미롭다. 이 기사는 ‘육종관의 맏형은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했고, 둘째형은 일본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법률을 공부해 해방 전 국내에서 판검사를 지냈다. 구한말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쳐 육씨 형제들의 삶은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비화가 발견됐다. 바로 육 여사가 부친인 육씨에 대해 평한 부분이다. 72년 당시 한 일간지에 김아무개씨가 글을 기고하면서 육씨에 대해 ‘충북 옥천의 토호인 육씨는 천성이 착하고 후덕하여 같은 마을에 사는 어려운 사람들을 늘 보살피고 도와주어 인심을 크게 얻었다’고 썼다. 다분히 대통령 장인에 대한 예우 차원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육 여사가 김씨의 지인을 불러서 “우리 아버지는 결코 후덕한 분이 아니다. 아버지를 잘 아는 옥천 사람들이 이 글을 읽으면 뭐라고 하겠는가. 김씨에게 전화해서 글을 써준 것은 고맙지만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었다고 바로잡아주어라”라고 말했다는 것.
전하는 바에 따르면 육씨는 딸의 결혼을 끝까지 반대했고, 이 때문에 부인인 이경영 여사와도 별거를 하며 사망하기 전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육 여사의, 부친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그 딸인 박 대표에게도 전해졌던 것일까. 박 대표 역시 <나의 어머니 육영수> <내 마음의 여정> 등 수기집에서 어머니와 외할머니에 대한 진한 사랑만 나타낼 뿐 옥천 외가와 외할아버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었다.
현지 관계자에 따르면 박 대표가 최근 들어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옥천을 방문한 적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지난해 총선 때 전국을 돌며 유세 행진을 하던 박 대표가 보은과 대전을 오가면서도 옥천은 들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표의 한 측근은 “의원님은 육 여사의 생가 복원사업에 대해서 그 어떤 특별한 언급도 없었다”고 밝혔다. 이 사업에 대해 박 대표가 그나마 속내를 내비친 것은 2001년 8월15일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있던 육 여사 추도식에서 한 언론과의 인터뷰 때 밝힌 내용이다.
당시 박 대표는 “(옥천 외가는) 틈틈이 가 본다. (생가 보수에 대해서는) 최근 복원추진위원회가 결성된 것으로 안다.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 옥천군에서 주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다소 소극적인 대답에 그쳤다. 오히려 기자의 질문이 시종 “아버지(박 전 대통령)의 재평가에는 적극적인 것 같은데 어머니에 대해서는 소홀한 것 같다”며 공격적이었다. 박 대표의 옥천 행보는 왜 그렇게 조심스러운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