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면적인 이유는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사개추위)에서 마련한 형사소송법 개정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정부 들어 본격화된 검찰 개혁에 대한 전방위적인 압박으로 쌓여왔던 불만이 한꺼번에 터지는 양상이다. 사개추위가 형소법 개정 시안에 검찰 의견을 상당부분 반영하자 검사들의 움직임도 일단 관망세로 돌아섰지만 건들면 터져버릴 듯한 폭풍전야의 분위기는 아직 계속되고 있다.
지난 2일 밤 긴급 소집됐던 서울지검 평검사회의는 1999년 2월, 2003년 3월에 이어 검찰 사상 세 번째 파문이다. 평검사회의의 기원은 1999년 1월 이른바 ‘대전법조비리’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전지역 이아무개 변호사가 판·검사들에게 떡값 등의 명목으로 돈을 뿌렸다는 혐의를 수사한 검찰은 검사들 중에서도 심재륜 당시 대구고검장 등 6명이 돈을 받았다는 발표를 했다.
이에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은 심 고검장의 사직을 종용했고 심 고검장은 “마녀사냥”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그는 같은 달 27일 저녁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 기자들을 만나 “검찰수뇌부는 검찰조직과 후배검사들을 담보로 권력에 영합해 개인의 영달을 추구해왔다”는 ‘직격탄’을 날렸다. ‘상명하복’을 신주단지처럼 받들던 검찰조직에서 이 같은 ‘항명’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는데, 뜻밖에도 이에 평검사들이 동조하고 나선 것이다.
당시 평검사들의 주장은 “심 전 고검장이 돈을 받았다는 것은 단지 이 변호사의 진술 외에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검찰 수뇌부가 정권의 지시를 받아 존경받는 선배를 친다”는 것이었다. 부산지검과 인천지검 평검사들이 먼저 회의를 열어 심 전 고검장 처리의 부당성을 주장, 사태는 불이 붙기 시작됐다. 이어 평검사회의는 서울지검으로 옮아가며 일파만파로 파장이 커졌다. 서울지검 평검사 70여 명은 장시간 토론 끝에 ‘수뇌부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는 연판장에 서명, 대검에 제출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결국 이원성 당시 대검 차장은 2월2일 밤 전국의 평검사 대표들을 대검으로 불러 토론회를 열었다. 다음날 새벽 2시까지 무려 11시간 동안 계속된 토론회에서는 분위기가 격앙되면서 평검사들이 그동안 쌓여왔던 수뇌부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회의는 결국 ‘총장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자’는 다소 엉뚱한 결론으로 매듭지어지는 한계를 보였고, 심 전 고검장도 그대로 면직되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평검사들이 사상 처음으로 단체행동에 나섰지만 수십년 동안 몸에 배어온 상명하복의 틀을 깨진 못한 것이다.
두 번째 평검사회의 파동은 노무현 정부가 정식으로 출범하기 직전인 2003년 초에 발생했다. 그해 2월 노무현 대통령은 정식 취임하기 전에 신임 법무장관에 강금실 변호사를 내정했다. 최초의 여성 법무장관이라는 것도 파격이었지만 기수와 서열을 중시하는 검찰 조직에서 당시 지방검찰청 부장검사급(사시 23회)이었던 강 변호사의 장관 임명은 검찰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이어 강 장관은 정식 취임 후인 3월 초에 검찰 고위직에 대해 파격인사를 단행했고 이에 평검사들이 다시 들고 일어난 것이다.
먼저 서울지검 평검사들이 3월7일 긴급 평검사회의를 열었다. 다음날 새벽 3시까지 계속된 회의에서 평검사들은 새 정부와 강 장관이 단행한 검찰 인사를 비판하며 ‘다시 한번 올바른 검찰개혁을 촉구하며’라는 제목의 건의서를 채택했다. 이 같은 반발 분위기는 다른 지방청들로도 확산됐고, 특히 대검 과장급 중견간부 40여 명도 회의를 가진 뒤 ‘검찰 인사의 독립이 이뤄져야 한다’는 내용의 건의서를 작성,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에게 전달했다.
파문이 확산되자 노무현 대통령은 바로 다음날 우리 검찰사와 정치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검사와의 대화’를 제의했다. 평검사들은 이를 받아들일지 고민하다 결국 수용해 9일 노 대통령과 젊은 검사들이 전 국민을 관중으로 하는 한판 격돌을 벌이게 된 것이다.
검찰사의 한 장을 장식한 이 같은 세 차례의 평검사회의는, 발생 시기는 각각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 이러저러한 인연으로 엮여 있다. 먼저 2003년과 이번 평검사 회의는 직접적인 촉발 이유만 다를 뿐 사실상 노무현정부에 대한 검찰의 반발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만큼 현 정부의 검찰 개혁에 대해 일선 검사들의 위기의식이 깊다는 증거다.
하지만 무엇보다 묘한 것은 5년여의 시차가 있는 1999년 첫 번째 평검사회의와 이번 사태와의 ‘인연’이다. 우선 겉으로 보이는 인연은 이번 사태에서 평검사들의 집중 타깃이 되고 있는 김승규 법무장관이 99년 사태 때는 대검 감찰부장이었다는 점이다.
이번 사태에서 평검사들은 김 장관이 지난 3일 밤 한승헌 사개추위 위원장과 전격 회동, 형소법 개정에 협조하자고 약속한 것에 대해 “국민들이 배제된 타협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비판했다. 언뜻 보면 항명에 가까운 수준이다. 99년 사태 때 대검 감찰부장으로 일선 검사들의 비위를 감독하는 총책임자였던 김 장관은 당시 이원성 대검 차장과 함께 파문을 가라앉히는 핵심 임무를 맡고 있었다.
반면 99년 사태와 이번 사태는, 어찌 보면 검찰이 비슷한 사안에 대해 정반대의 논리를 내세운 것이어서 더욱 아이러니하다.
99년 당시 평검사들은 검찰 수뇌부가 이아무개 변호사(참고인)의 말(진술)만 믿고 심재륜 당시 고검장(일종의 피의자)을 처벌하려 한다며 반발했다. 이처럼 참고인(뇌물 공여자)의 진술로 피의자(수뢰자)를 기소하는 것은 사실상 뇌물수사에서 검찰의 정착된 관행이다. 결국 당시 심 고검장은 면직됐지만 이후 면직취소 행정소송에서 승리해 부산고검장으로 복직, ‘돈을 받았다’는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를 받은 셈이 됐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서는 평검사들이 수사·재판 시스템 개편이 잘못됐다며 반발하고 있다. 그 중에는 ‘참고인’이 수사기관에서 한 ‘진술’이 법정에서 증거로 전혀 받아들여지지 못하게 돼 뇌물 수사가 불가능해진다는 비판도 들어 있다. 99년 평검사들이 잘못됐다고 주장하며 들고 일어났던 자신들의 수사관행을 이번에는 지키려고 애쓰는 셈이 된 것이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