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일 전국 특수부장회의에서 김종빈 검찰총장(왼쪽) 등 참석자들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왼쪽은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장검. | ||
마치 공판중심주의와 형사소송법 개정, 수사권 조정, 공직부패수사처 신설 등 검찰을 향해 오는 외부 압박들에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태세다. 혹독한 시련에 빠졌던 검찰이 ‘수사만이 살길이다’라는 오래된 경구를 되새기며 반격에 나서는 듯하다.
지난 4월 김종빈 총장 취임 이후 검찰이 시작한 첫 번째 대형 수사는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가 나선 러시아 유전투자 의혹 사건이다. 건설교통부와 철도공사의 고위직이 줄줄이 구속되고 이광재 열린우리당 의원과 노무현 대통령의 후원회장이던 이기명씨의 연루 의혹까지 거론되는 전형적인 대형수사다.
유전의혹 사건은 감사원의 감사중 언론에 폭로되면서 여론과 정치권이 ‘억지로’ 검찰에 떠맡긴 사건이었다. 그러나 수사가 진행되면서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수사 초기 이광재 의원에 대해서는 혐의를 입증기가 어렵다는 식의 말을 흘렸던 검찰이 최근 들어서는 이광재 의원과 청와대를 향해 한발 한발 무섭게 다가가고 있는 모습이다. 검찰이 이 의원의 선거참모가 전대월씨로부터 8천만원의 돈을 받았고 유전 사업이 청와대에 직접 보고됐다는 수사 내용들을 공개한 것도 바로 이 같은 징후를 뒷받침해 준다. 검찰 주변에선 청와대와 여권에 시위를 하는 듯하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 같은 분위기에 힘을 얹어주듯 검찰의 다른 대형사건 수사들이 잇따라 터지기 시작했다. 같은 서울지검의 특수1부는 야권의 유력한 차기 대권 후보인 이명박 서울시장에게 치명타가 될 수도 있는 청계천 복원공사 비리 수사에 착수했다.
지난 6일 검찰 수사관들이 양윤재 서울시 부시장을 전격 체포하면서 시작된 이 사건도 연일 신문과 방송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정가 일각에선 ‘기름’(유전 의혹)에 ‘물’(청계천 개발 비리)을 부으려는 의도라고 말하고 있지만 한 검찰 관계자는 “기름에 물 붓는다고 섞이는 건 아니다”라는 말로 이 같은 시각을 일축했다.
서울지검이 여야 핵심 인물 주변까지 사정의 칼날을 들이대는 동안 서울남부지검에서는 전국택시노련 간부가 기금 운영과정에서 리베이트를 챙긴 혐의에 대해 수사에 착수했다. 특히 남부지검은 택시노련 비리 수사에 머물지 않고 민주노총과 함께 노동운동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한국노총 수뇌부 쪽으로 수사를 확대하고 있어 노동계가 받게 될 타격은 엄청날 전망이다.
또 비슷한 시점에 울산지검도 현대자동차 전·현직 노조 간부들이 수천만원씩의 돈을 받고 신입사원 채용에 관여했다는 혐의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 이 사건도 지난해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광주 기아자동차 노조 채용비리보다 훨씬 규모가 큰 것이다.
이처럼 대형사건 수사를 잇따라 벌이면서 검찰은 지난 2003년 불법대선자금 수사 이후 다시 한 번 여론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 일각에선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대한 수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배경을 놓고 이런저런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이에 대해 검찰의 공식적인 입장은 “각각의 수사가 단서가 있어 시작됐을 뿐”이라는 것이지만 사건이 터진 시점이 묘하다. 경찰과의 수사권 조정 협상과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의 형사소송법 개정이 급박하게 진행돼 평검사들의 극한 반발이 터져나오는 와중에 대형사건 수사가 잇따라 착수됐기 때문이다.
검찰은 평소에 각종 첩보수집 활동 등을 통해 수사거리를 축적해 놓고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대형수사를 연이어 터뜨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검 중수부의 캐비닛에만 3백 개가 넘는 부정부패 관련 사건 파일이 쌓여 있어 햇빛을 보기만 기다린다는 얘기도 있다. 따라서 검찰이 최근의 위기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 ‘강도 높은 수사’라는 정공법을 선택했다는 해석도 크게 무리는 아닌 셈이다.
특히 검찰 내에서는 노무현 정부 들어 시작된 각종 개혁정책들이 검찰을 사정권력의 최고 자리에서 밀어내버릴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급속히 퍼지며 사기가 크게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럴 때 국민들이 박수를 치고 감탄하는 대형 수사는, 외부의 공격도 막아내고 내부 단속도 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재경지검의 한 소장 검사도 “이번 수사가 최소한 검찰의 존립 이유를 국민들에게 각인시키는 데에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신임 김종빈 총장은 취임 때부터 유독 ‘인권 보호’를 강조했지만 주변 환경은 이런 검찰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경찰이 먼저 수사권을 내놓으라며 강하게 도전해 왔다. 경찰과의 지리한 ‘진지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사개추위마저 수사권을 위축시키겠다는 ‘선전포고’를 했다. 서쪽의 미·영 연합군과 동쪽의 소련군, 양쪽으로부터 반격을 받는 2차대전 때의 독일처럼 양면전을 펼쳐야 했던 검찰의 운명은 백척간두로 밀리는 신세가 됐다.
한가하게 ‘인권’ 얘기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러다 보니 김 총장도 지난 9일 대검찰청에서 열린 전국 특수부장회의에서 강력한 부정부패 수사의 필요성을 유난히 강조했다.
김 총장은 이날 훈시에서 “검찰을 둘러싼 외부 환경은 그간 지속적인 자성 노력에도 우호적이지 않다”며 사개추위나 경찰과의 마찰 등 최근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어 김 총장은 “부정부패는 선진국 진입의 가장 큰 장애로 이의 척결은 검찰의 기본책무”라며 강력한 부패수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 총장이 던진 화두에 화답하듯 서울중앙지검은 물론, 서울남부지검, 울산지검 등이 전방위로 사정의 칼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서울과 지방의 검찰청에서 대형 수사를 밀어붙이고 있지만 정작 검찰의 가장 큰 칼인 대검 중수부는 여전히 ‘암중모색’중이다. 대검 중수부가 직접 수사에 나선다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다른 수사들보다 훨씬 강도가 셀 것임이 틀림없다. 한 검찰 주변 인사는 “평검사 회의가 열릴 때 언론에서 ‘검란’이니 뭐니 하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중수부마저 수사에 나서면 그것이 진짜 ‘검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향후 중수부가 또 다른 대형 수사에 나설 경우 그 파괴력을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