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26일 국가정보원에서 열린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위원회 중간발표에서 위원들이 김형욱 실종사건 등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 ||
그럼에도 국민들은 여전히 등이 가려운 모습이다. 먼저 이번 사건을 최종 지시한 사람이 정확히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진실위는 김재규 전 부장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나 차지철 경호실장 등 또 다른 배후가 있을 개연성도 있다. 이번 발표가 신현진(가명)이라는 당시 중정 현지 연수생의 진술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는 점도 의문이다.
이번 사건의 핵심 인물로 떠오른 이상열 전 주프랑스 대사관 공사가 굳게 입을 닫고 있는 점도 해결해야 할 난제 중 하나다. 김형욱 실종 사건의 진실 규명이 반환점을 돌긴 했지만 여전히 결승선에 이르기는 먼 길이다. 진실위의 중간 발표에 ‘아킬레스’건은 없는지 되짚어봤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지난 79년 10월,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 지시로 프랑스에 있던 중정 거점요원들과 이들이 고용한 동구권 제 3국인에 의해 납치·살해됐으며 파리 근교에 유기 된 것으로 조사됐다.
먼저 이번 발표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김형욱 납치·살해를 최종 지시한 사람이 누구인지가 불명확하다는 점이다. 진실위는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김형욱 전 부장의 납치·살해를 ‘총지휘’했다고 단정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부터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먼저 김재규 부장의 유족과 변호인측은 김 부장의 개입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10·26 사건 때 김재규 당시 중정부장을 변호했던 강신옥 변호사는 “변호 과정에서 김재규씨에게 ‘김형욱씨 사건’에 대해 아는 바 있느냐고 수 차례 질문했지만 항상 같은 답변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또한 “만약 중정에서 김형욱씨 살해지시를 내렸다면 전기고문까지 해 가며 김재규씨를 조사했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측이 이 같은 사실을 왜 밝혀내지 못했겠는가”라고 반문하며 이 사건과 김씨의 관련성을 부정했다.
여기에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 김범태 집행위원장도 “김재규 부장은 ‘김형욱 살해사건’을 결코 지시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자기도 김형욱과 똑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안 했겠느냐”고 반문했다.
김형욱 전 부장 유족측도 이번 발표를 믿지 못하고 있다. 김 전 부장의 맏며느리 제니퍼 경옥 김씨는 “남편에게 듣던 얘기와 달라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남편으로부터 아버님(김형욱)이 서울로 납치돼 피살됐거나 사우디로 끌려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파리에서 살해됐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런 사실들을 비추어 볼 때 김재규 부장이 김 전 부장 살해사건과 무관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가설 하나가 바로 이상열 전 주 프랑스 대사관 공사가 직접 박정희 대통령의 ‘령’을 받아 사건을 총지휘했을 가능성이다. 이것은 이 전 공사의 옛 이력을 살펴보면 확실해지는 측면이 있다.
이 전 공사는 ‘원충연 사건’으로 김형욱 부장의 후원 아래 승승장구했다고 한다. 김 전 부장이 중정을 그만둔 이후에도 두 사람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이 전 공사가 살해사건 전 김형욱과 함께 파리 시내 카페와 카지노 등지를 동행했다거나 김형욱이 사건 당일 돈을 구하기 위해 이 전 공사를 만나는 데 전혀 의심을 하지 않은 것도 평소 둘 사이의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추정케 한다고 진실위는 밝히고 있다. 김형욱의 부인 신아무개씨가 ‘남편이 당시 파리를 방문했을 때 이씨를 믿고 혼자 갔다’고 주장한 것도 이를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이를 토대로 보면 박 대통령은 평소 이 전 공사가 김형욱 전 부장과 확실한 인연이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이 전 공사에게 직접 살해 명령을 내렸을 가능성이 있다. 이 전 공사가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철저하게 함구로 일관하고 있는 것도 김 부장보다 윗선인 박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더욱 철저하게 입을 막고 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하지만 진실위측은 그의 이런 비협조적인 태도가 ‘재직 중 취득한 정보는 무덤까지 가지고 간다’는 정보요원의 철칙을 지키려는 데 기인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씨는 후배들로부터 훌륭한 공작관으로 존경받고 있다는 게 진실위측의 설명이다. 그는 진실위의 3차례에 걸친 면담조사에서 사건 내막에 대해 일절 입을 열지 않았고 다만 “내 면담 조사는 노(No)라고 기록해 달라”고만 했다고 한다.
▲ 김형욱(왼쪽), 김재규 | ||
두 번째 의문점은 낙엽으로 주검을 덮으려했다는 것이 ‘킬링 머신’의 뒤처리로 보기에는 뭔가 엉성하다는 지적이 많다. 살해 장소가 인적이 드문 숲 속인 데다 날이 저물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완벽한 증거 인멸을 위해 땅에 파묻는 등 보다 완벽한 뒤처리를 했어야 상식적이라는 지적이다.
게다가 중정 요원들이 직접 선발한 동구권 청부업자들은 분명히 ‘프로페셔널’이었을 것인데 그들이 권총을 현장에서 분실했다는 것도 의문점이다.
또한 살해 장소가 파리가 아닐 가능성도 여전히 상존한다. 김형욱씨 며느리 제니퍼 경옥 김은 ‘김형욱씨가 10월9일 파리를 떠나 취리히를 경유, 사우디아라비아로 갔다’는 내용의 최근 공개된 미 국무부 문서를 거론하면서 “10월7일 살해됐다는 발표는 날짜부터 맞지 않아 혼란스럽다”고 말한 바 있다.
과거사위 관계자는 “신현진씨 한 사람의 진술에 의존하다 보니 한계가 있었다”며 “이 전 공사 등을 설득하는 한편 결정적인 증거나 단서를 최대한 찾아보겠다”고 밝히고 있다. 앞으로 프랑스 당국의 협조를 통해 살해 장소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 열쇠다.
그리고 진실위는 시체를 찾아 DNA 검사 등을 통해 김형욱 전 부장의 ‘실체’를 확실하게 밝힌 다음 유족에게 주검을 인도해야 진실 규명이 확정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