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빈 검찰총장(왼쪽), 허준영 경찰청장 | ||
김종빈 검찰총장과 허준영 경찰총장은 2일 이해찬 총리 주재로 김승규 법무부 장관, 오영교 행자부 장관 등이 참석한 ‘5자 회동’을 가졌지만 “함께 노력한다”는 원론적인 입장만을 재확인했을 뿐 조율에는 실패했다. 이제 수사권 조정 문제는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개입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으로 치닫는 분위기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검·경 양측에서는 누가 이기든 한판 승부는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확대되면서 곳곳에서 전운이 감지되고 있다. 현재 형국은 수사권 조정문제에 대해 여론의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찰이 검찰에게 공세를 취하는 모습이다.
경찰은 최근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내려 종결한 사건에 대해 재수사 착수하는 등 노골적으로 검찰을 자극하고 있다. 수사권한을 독점한 검찰의 과거사를 들춰내 수사권 독립을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도전의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간을 끌수록 불리하다는 경찰의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경찰은 최근 사회적 공분을 사고 있는 재건축 비리 관련 수사를 6월 말까지 한 달 연장했다. 그러면서 지난 2002년 재건축이 끝난 서울 강서구 화곡동 주공시범아파트 비리 의혹 사건을 터뜨렸다. 조합과 시공사가 재건축을 하면서 조합원 등으로부터 3천8백억원을 거뒀으나 세무서에 신고한 공사비는 2천6백억원에 불과해 차액인 1천2백억원이 증발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검찰이 2000년부터 수차례 내사를 벌인 뒤 무혐의 처분했고, 지난달 대법원은 공사 내용을 변경키로 한 조합 총회 과정에 문제가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사실상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찰이 검찰의 무혐의 처분과 대법원 판결을 받은 사건에 대해 재수사에 나선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경찰은 물론 재수사에 착수할 만한 새로운 단서를 포착했다고 하지만 이면에는 검찰의 수사를 뒤집어엎어 경찰의 수사력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깔린 것은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경찰은 조합사무실과 조합 관계자들에 대한 전면적인 압수수색을 실시해 여당인 열린우리당 한 중진의원의 후원회 계좌 메모를 찾아내기도 했다. 이번 사건이 단순히 재건축 비리에 그치지 않고 정·관계로 불똥이 확산되는 ‘게이트’로 번질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경찰의 주장이다. 경찰은 시공사인 D건설의 은행계좌 3개의 거래내역을 추적하는 한편 건축 비용과 관련한 자료를 제출받아 관련성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그러나 D건설측과 조합은 “공사비를 가정산한 결과 신고 액수보다 5백억원이 많은 3천1백억여원이 들어 3천8백억원과의 차액은 7백억원 정도”면서 “이 돈도 공사와 관련된 용도로 모두 정당하게 사용했다”며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경찰은 “남은 공사비용 처리를 두고 시공사가 사전에 조합측과 이면 거래를 한 의혹이 짙다”며 수사의지를 거듭 피력하고 있다.
검찰을 겨냥한 경찰의 움직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상돼 왔던 일이다. 경찰은 실제로 검찰사건을 재수사해 일정한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경찰은 최근 지난 2002년 검찰이 수사했던 조달청 납품비리 사건을 재수사해 조달청 전 중앙보급창장(1급) 등 전현직 간부 9명과 업자 3명 등을 무더기 입건했다.
이들은 시중보다 비싼 가격에 납품을 받아 45억원가량의 국고 손실을 초래했고, 각종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업자로부터 사례비를 받아 챙기기도 했다. 범죄행위로 보면 당연히 구속감이지만 검찰은 불구속 지휘를 내렸다. 검찰은 이에 앞서 경찰의 구속 신청을 다섯 차례나 거부했다. 이를 두고 검찰이 경찰의 재수사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수십억원대의 국고 손실 등 범죄가 중하다고 여겨질 때는 충분한 구속사유가 된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경찰 내부에서는 ‘조달청 납품비리 관련 변호사가 고검장 출신이다’라는 말까지 공공연히 거론되기도 했다.
경찰은 현재 검찰을 자극하는 또다른 사건을 내사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서울 남부지검이 벌인 모 경제단체장 선거에 대한 재수사를 은밀히 진행중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은 검찰이 지난해 내사를 했다가 별다른 혐의점을 찾아내지 못하고 손을 든 사건이다. 검찰이 포기한 사건을 경찰이 성공할 경우 만만치 않은 파장을 낳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경찰의 도발에 대해 검찰이 팔짱만 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검찰소식에 통한 한 관계자에 따르면 검찰이 일대 반격을 준비중이라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검찰은 경찰 간부들의 비리파일을 상당수 확보해 놓고 있다”며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해 참고 있지만 때가 무르익으면 경찰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이 확보한 파일에는 치안감 이상 등 경찰 고위급 인사들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경찰의 비리를 폭로해 경찰을 국민여론과 분리하고 궁지로 몰아넣은 일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찰도 호락호락 당하지 않겠다는 태세다. 경찰 고위 관계자는 “우리도 적지 않은 방어망을 구축해 놓았다”며 “검찰이 경찰 비리를 폭로하면 우리도 맞불작전으로 나설 것”이라고 전의를 불태웠다. 경찰도 상당수 검찰 비리를 확보해 놓았다는 뜻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국가정보원이 국내 정보에서 한 발 물러서 있는 상황에서 전국적인 정보망을 갖춘 경찰의 정보력은 검찰을 능가하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 같은 저인망식 정보망을 통해 검찰 간부들의 약점을 속속들이 파악해 놓은 경찰이 검찰의 반격이 시작되면 사활을 걸고 맞대응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경찰 관계자는 “이번에 수사권을 확보하지 못하면 영원히 검찰의 하수인밖에 못한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다”며 “검찰의 반격을 예전처럼 그냥 맞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의지를 불태웠다. 특히 허준영 청장 등 현 경찰 수뇌부는 수사권 조정문제 해결에 진퇴를 걸었다는 평이다.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은 ▲긴급체포 시 검사의 사전지휘 폐지▲검사의 관할서 이송 지휘 폐지▲전문 검시관 제도 도입 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합의점을 찾았으나 핵심 쟁점인 형사소송법 195조(수사의 주체), 196조(수사의 지휘권) 개정문제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유영욱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