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6일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서울구치소에 구속수감 되기 전 대검찰청을 떠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김 전 회장의 귀국을 바라보는 국민들은 과거 대우그룹이 정·관계에 광범위하게 뿌렸을 ‘검은돈’의 실체가 벗겨지고 김 전 회장의 장기 해외 도피 배후가 밝혀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검찰이 이 같은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귀국한 김 전 회장의 일거수일투족에 언론과 국민들의 관심이 폭증하면서 그에 대한 동정론까지 일어 검찰은 더욱 수사에 부담을 안게 됐다. 검찰은 김 전 회장의 광범위하고 복잡한 혐의를 입증해야 하는 부담에 정·관계 로비나 해외도피 배경 등 새로운 의혹을 규명하라는 국민적 요구, 김 전 회장에 대한 선처론 등 2중, 3중의 압력을 받으며 수사를 진행해야 하는 입장이다.
검찰은 이미 김 전 회장이 귀국하기 한 달여 전부터 고된 싸움을 시작했다. 대검 중수2과는 김 전 회장의 귀국이 확실시되던 지난 5월 초부터 흩어져 있던 대우사태 관련 수사기록을 모아 사전검토에 착수했다.
김 전 회장의 눈에 보이는 혐의는 크게 다섯 가지다. (주)대우 등 대우그룹 계열사들의 41조원대 분식회계와 10조원대 사기대출, 2백억달러 규모의 국외재산도피 혐의에 송영길 열린우리당 의원 등에게 불법정치자금을 제공한 혐의, 위장계열사를 신고하지 않은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 등.
‘간단하게’ 한 줄로 정리되는 혐의지만 이와 관련된 수사기록은 수십만 페이지에 무려 1톤 트럭 한 대 분량이나 된다. 각종 불법행위가 여러 계열사와 시기별로 조각조각 흩어져 있고 관련자들도 수십 명이 넘다 보니 산더미만한 기록이 생산된 것이다. 이 막대한 수사기록의 목록을 정리하는 데만 3일이 걸렸다는 것이 검찰 관계자의 전언이다.
검찰의 진짜 고충은 지난 14일 김 전 회장이 귀국하면서부터 본격화됐다. 검찰은 이날 새벽 김 전 회장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체포영장을 집행, 대검 중수부로 연행했다. 이에 국내외 언론은 수사가 시작도 되기 전부터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김 전 회장의 새로운 혐의를 검찰에 요구했다. 물론 언론이 원하는 혐의 중 가장 ‘매력적인’ 것은 대우그룹과 거물급 정치인들의 부적절한 관계다.
김 전 회장 도착 당일 첫 언론 브리핑을 한 검찰 관계자는 기자들의 집요한 추궁에 결국 “뇌물 혐의 한두 개 정도 안 걸리겠느냐. 기다려 봐라”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상당수 언론이 이를 정색하고 받아들여 검찰이 김 전 회장의 추가 정·관계 로비를 집중 수사한다고 보도했다.
수사가 겨우 초기단계에 접어든 다음날에는 언론이 김 전 회장의 보다 구체적인 혐의를 검찰에 요구했다. 이날도 검찰 관계자는 “(정·관계 로비 의혹 관련) 추궁할 만한 몇몇 자료가 있다”는 발언을 했다. 그러자 전 언론은 검찰이 김 전 회장의 로비 의혹 단서를 확보해 조만간 대형 게이트가 터지는 것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말았다.
▲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을 취재하려는 기자들의 열기가 뜨겁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특히 정치자금법의 공소시효(3년), 5천만원 이하 뇌물죄의 공소시효(5년)도 모두 지나 이 같은 혐의에 대해서는 수사 자체가 불가능하다. 여기에 대우그룹의 해외비밀계좌인 BFC 등 해외 비자금에 대한 의혹도 계좌추적이 불가능해 제대로 된 수사를 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실제 당시 검찰 관계자 브리핑의 취지도 치밀한 수사를 통해 정·관계 로비 등 각종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원론적인 수준이었다. 그러나 언론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검찰을 곤혹스럽게 만든 것이다.
여기에 언론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출국을 권유했다’는 2003년 1월 <포춘>에 실린 김 전 회장의 인터뷰 내용을 비롯해, 당시 정권이 그의 해외도피를 종용했다는 의혹을 대대적으로 제기했다. 그러나 김 전 회장의 해외도피 의혹은 사실 이번 검찰 수사의 대상이 아니다. 검찰로서는 김 전 회장의 기존 혐의를 입증하는 것도 쉽지 않은 마당에 수사대상도 아닌 해외도피에 대한 의혹이 증폭되니 난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검찰이 이처럼 난처한 상태인 반면 정작 피의자인 김 전 회장은 5년 8개월 만에 고국에 돌아와 오히려 몸과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기자들에게 “설렁탕을 먹고 싶다”고 했던 김 전 회장은 대검 중수부 조사실에서 첫날 조사를 받을 때는 “라면을 먹고 싶다”고 해 검찰이 김치찌개에 라면을 넣어 주기도 했다. 검찰 관계자는 “김 전 회장이 오래간만에 고국에 돌아와 향수를 느낄 만한 음식을 찾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해외도피중 장협착증 등 각종 병에 시달리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특히 귀국을 앞두고는 하루에 2∼3시간밖에 자지 못해 괴로워했다고 측근은 전했었다. 그러나 중수부 조사실에서 그는 매일 밤 11시쯤 취침해 다음날 8시쯤 일어나는 등 최소 9시간 이상 숙면을 취했다고 검찰은 전했다. 김 전 회장측 변호사는 “김 전 회장이 ‘최근 들어 잠을 제일 많이 잤고 마음도 편하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검찰 관계자도 “김 전 회장이 날이 갈수록 잠도 더 잘 자고 몸상태가 호전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러다 보니 당초 구속이 확정되면 구치소 병동으로 수감될 것으로 예상됐던 김 전 회장은 16일 구속되면서 일반 사동 독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김 전 회장은 이날 구치소로 향하기 직전에도 “해외도피 중 워낙 혼자 지내는데 익숙해 있어 독방생활도 문제가 없다”며 오히려 걱정하는 검찰 관계자들을 안심시켰다고 한다.
이처럼 현재 상태만 놓고 보면 ‘검찰’과 ‘피의자 김우중’의 처지가 거꾸로 된 듯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수사에서 정·관계 로비나 비자금 조성 등 김 전 회장과 관련된 국민적 의혹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는다면 ‘김종빈호’ 검찰은 비난에 직면할 수도 있다. 따라서 검찰도 지금은 조심스러워하지만 새로운 혐의를 밝혀내기 위해 각종 수단을 동원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이번 사건은 박영수 중수부장이 취임한 이후 첫 번째 ‘작업’이어서 중수부로서도 확실한 실력을 보여줘야 할 입장이다. ‘세월의 덕’을 보고 있는 김우중 전 회장이 안심할 수만은 없다는 얘기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