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정배 신임 법무장관(왼쪽), 김종빈 검찰총장 | ||
전임 송광수 총장이 검찰개혁이나 대선자금 수사, 탄핵반대 촛불집회 수사 등에서 정치권의 압력이 있을 때 대놓고 반발했던 것에 비해 김종빈 총장은 그동안 말을 상당히 아껴왔다. 지금은 송 전 총장 시절보다 검찰의 상황이 더 악화됐음에도 불구하고 침묵이 깊었던 것은 신중하면서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김 총장의 성격 때문이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던 김 총장이 지난달 30일 기자간담회를 자청,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던 얘기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경찰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수사권 조정 문제를 거론할 때는 흥분돼 목소리가 흔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검찰의 상황이 더 이상 ‘침묵이 금’이라는 격언이 통하지 않는 상태에까지 와 있다는 위기의식의 발로로 보인다. 특히 이 같은 김 총장의 발언은 평소 검찰개혁을 부르짖는 여권 내 강경파로 알려진 천정배 열린우리당 의원이 법무부 장관에 취임한 바로 다음 날 나온 것이어서 그 배경이 주목되고 있다.
김 총장은 먼저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검찰이 얘기하면 안 믿는 사회분위기가 있다”며 바깥에서 검찰을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 왜곡돼 있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김 총장은 “검찰이 마치 무소불위 권한을 남용하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이것이 과연 옳은가”라고 기자들에게 반문하기도 했다. 그는 또 “중국 검찰은 우리 검찰을 부러워해 거의 우리 제도를 옮겨 놓았다”며 “사회의 부패감시 차원에서 약간은 권한이 축적된 기관(검찰)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했다.
이 같은 김 총장의 ‘억울하다’는 심정의 토로는 최근 대다수 검사들이 갖고 있는 정서를 대변한 것이다. 한 검찰 중견 간부는 “검찰이 비판받는 것의 원죄는 과거 정치권력에 빌붙었던 검찰 스스로에게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서도 “그러나 이제는 정말 세상이 바뀌었는데 옛날 생각만 갖고 계속 비판하는 것은 문제”라고 토로했다.
다른 소장 검사는 “일부 경찰들이 검사가 간섭, 수사를 왜곡한 사례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조금만 잘못해도 인터넷에 도배가 되는 요즘 그런 일이 가능하겠느냐”며 “매달 수백 건의 사건에 매달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검사들이 무슨 권력을 향유한다는 얘기냐”며 열을 올리기도 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로 현재의 검찰을 매도하지 말라는 주장이다.
김 총장의 억울함에 대한 호소는 자연스럽게 최근 검찰에게 가장 큰 부담을 주는 경찰과의 수사권 조정 문제로 넘어갔다. 김 총장은 “경찰에 대해 얘기하면 또다시 싸움으로 비쳐진다”며 경찰을 직접 거론하는 비판은 자제했다. 그러나 ‘검찰 수사권을 두려워하는 자, 과연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면서 경찰과 정치권의 논리적 문제점을 싸잡아 지적했다.
김 총장은 “검찰 권한이 비대해 나눠주라고 하는데 검찰은 수사권 외에는 가진 게 없다”면서 “수사권도 검찰이 노력해 정치권에 대항하면서 만들어 낸 것”이라며 얘기를 꺼냈다.
그는 이어 “검찰 수사권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은 전체 국민의 10%도 안 되며 검찰은 일반 국민들이 ‘이런 것은 없어졌으면’ 하는 곳에 메스를 들이댄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김 총장이 지칭한 ‘10%도 안 되는 국민’들 중의 핵심은 물론 부정과 부패에 연루된 정치인들이다. 최근 수사권 조정과 관련해 경찰 의견이 반영된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상정하는 등 검찰 권한 축소에 올인하는 정치권을 겨냥한 얘기인 것이다.
김 총장은 최근 대형 부패 사건에 대해 잇따라 무죄를 선고한 법원에 대한 불만도 털어놓았다. 그는 “최근 뇌물 사건이 잇따라 무죄가 나오면서 과학수사를 하라고 하는데 자기들끼리 현금으로 몰래 주고받고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게 과학수사냐”고 기자들에게 되묻기도 했다.
김 총장은 “미국의 경우 뇌물 사건 과학수사는 유일한 것이 감청과 감시”라며 “1년이고 2년이고 혐의자를 쫓아다니며 감청하고 감시하는 것이 나은지, 불러다 ‘왜 돈 받았느냐’고 ‘회개하라’고 설득하는 것이 나은지 판단해 보라”고 말했다.
특히 김 총장은 과거 자신이 중수부장 시절 대우그룹에서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했던 최기선 전 인천시장 사건이 법원에서 무죄가 난 것에 대해 “억울하고 분노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지난달 귀국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최 전 시장에게 돈을 줬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이미 무죄가 난 최 전 시장은 재심이 불가능해졌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현재 우리나라 상황에서 유일한 과학수사는 뇌물을 준 사람이 검찰에서 자유롭게 진술토록 하고 이를 녹화해 법정에 제출하면 법관이 판단하는 것인데 법원이 이조차 못하겠다고 버티고 있다”며 법원을 비판했다. 이는 최근 형사사법절차 개편안을 논의중인 사개추위가 검찰이 요구하는 ‘수사과정 녹음·녹화물의 법정증거 채택’을 거부하는 것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다.
이 같은 김 총장의 강도 높은 발언들에 대해 검찰 안팎의 평가는 엇갈린다. 검사들은 대체로 “할 말을 제대로 했다”는 평이다. 그러나 김 총장 비판의 핵심 타깃이 된 정치권에서는 불쾌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여권의 한 인사는 “검찰의 수사권은 검찰이 스스로 획득한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행정권력”이라며 “따라서 수사권을 조정하는 것도 국민의 몫”이라고 말했다. 한 법조계 인사는 “김 총장의 발언이 이해가 되면서도 천정배 장관 취임 직후에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모양새가 이상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 김 총장은 기자들에게 우려와는 달리 천 장관에 대해 일단 희망 섞인 기대를 내비쳤다. 그는 천 장관과 취임식 직전 만나 덕담을 나눴다며 “천 장관도 밖에서 보는 것과 조직에 와서 보는 것은 다를 수 있지 않느냐. 일부 부담스런 시각이 있을 수 있지만 충분한 토론을 통해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총장이나 천 장관이나 지금은 서로에 대한 ‘탐색전’을 하고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흐르면 결국 두 사람의 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 현안이 부상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두 사람의 관계가 김 총장이 희망한 것처럼 공통분모를 찾는 결과로 이어질지 아니면 과거 강금실 전 장관과 송광수 전 총장처럼 대립하고 충돌하는 관계로 빠져들지 결정이 날 것이라는 얘기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