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제의 아들 둘은 모두 우수했다. 그 중 막내인 태환(가명)이는 한동안 이모부인 그의 집에서 묵으면서 고시를 준비했다. 이모인 그의 처는 곰국을 끓여 공부하는 조카의 건강을 살폈다. 이모부인 그 역시 더러 용돈을 태환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태환이는 대신 고3이던 딸 혜경(가명)에게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태환이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판사로 임관될 무렵 결혼 얘기가 오갔다. 옆에서 혼사를 지켜보던 정의택씨는 못마땅했다. 태환이 아버지가 신부 집에 5억을 요구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신부 집에서는 태환이의 사법연수원 성적이 좋지 않아 3억원밖에 주지 못하겠다는 얘기도 나왔다. 밀고 당기다 의외로 7억원에 ‘낙착’이 됐다고 했다. 그건 결혼이 아니라 판사 아들의 매매였다.
후배인 동서는 태환이뿐만 아니라 의사인 첫아들 때도 그랬다. 사귀던 여자를 떼어놓고 다른 곳에 아들을 결혼시키려 했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인 태환이는 부모 말에 절대 복종하는 타입이었다. 공부는 잘하는데 어려서부터 보면 자기 주관이 없는 아이 같았다. 여자문제도 그랬다. 태환이는 대학 때부터 사귀던 여자가 있었다. 얼마의 돈을 주어 그 여자를 떼어버리기로 부모와 아들은 결정했다. 사랑이 실종된 껍데기 명품 거래였다.
태환이의 사법연수원 수료식 때 양가에서 식사를 같이했다. 그때 시어머니가 될 태환이 엄마가 분위기를 풀려고 몇 마디 우스개 덕담을 했는데 회장부인은 외면하면서 마치 교양 있는 여자가 푼수를 참아준다는 얼굴이었다.
정의택씨는 결혼식에서도 화려한 외형과는 달리 살풍경한 느낌을 받았다. 사돈인 회장 집 형제들 사이에 냉기가 감돌았다. 나중에 검찰 수사결과에서 안 사실이지만 회장부인은 경영권 문제로 시동생도 청부살해를 시도했다. 대기업 임원으로 있던 정의택씨는 지인을 통해 사돈이 될 집의 정보를 들었다. 사채와 유흥업으로 시작해서 갖은 방법으로 회사들을 인수한 업계의 기피인물이었다.
양가의 피로연에서 정의택씨가 잠시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있었다. 그때 사돈이 된 회장이 들어왔다. 어려운 사이라 그는 조심하고 있었다. 회장은 바로 옆 변기로 오더니 갑자기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치면서 한마디 내뱉었다.
“정 사장! 오늘 보니까 얘기가 통할 사람 같아. 더러 만나서 골프 칩시다. 나도 배운 거 없이 고생해서 성공한 사람이요. 그런데 말이지 성공해 보니까 돈으로 안되는 게 없는 세상입디다.”
정의택씨는 당황했다. 격의 없는 소탈한 품성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돈 번 막장사꾼의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봐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어차피 조심하고 자주 보지 말아야 할 사돈관계였다. 적당히 비위를 맞추고 자리를 피했다. 돈이면 다 된다는 걸 굳이 입 밖으로 꺼내는 그의 인생관을 보며 씁쓸했다.
판사 조카 태환이의 결혼생활이 이따금씩 그 엄마를 통해 귀에 들어왔다. 회장부인은 판사 사위에게 끔찍한 것 같았다. 퇴근할 무렵이면 벌써 남산터널 부근부터 사위의 위치를 확인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건 회장부인의 애정이 아니라 감시라는 걸 알았다.
결혼 전부터 알던 여자친구들이 더러 태환이에게 전화를 한 것 같았다. 딸인 혜경이도 이종사촌 오빠인 태환이에게 고시공부에 대해 물으려고 전화를 했었다. 그런데 회장부인은 사위에게 온 여자 전화를 일일이 캐묻고 따진다는 것이었다.
한번은 태환이가 장모인 회장부인과 함께 가는데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귀를 곤두세우고 여자의 목소리를 듣던 회장부인이 누구냐고 다그쳤다. 당황한 조카 태환이는 그의 딸인 혜경이라고 둘러댔다는 것이다. 이종사촌이니까, 친척동생이니까 회장부인이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게 혜경을 죽음까지 몰아넣는 불행의 원인이 됐다.
2000년 가을 무렵부터였다. 정의택씨 집에는 자주 이상한 전화가 왔다. 50대 후반쯤 되는 여자의 목소리인데도 정의택씨가 누구냐고 물으면 혜경이 친구라고 둘러대고는 전화를 끊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예민한 편인 정의택씨에겐 희미한 기억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누구인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전화국에 발신자확인을 신청했지만 나오지를 않았다.
혜경이에게도 이상한 남자들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도대체 딸이 남에게 미행당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었다. 딸 역시 동네 독서실에 다니면서 한 시간이라도 아끼면서 고시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내다 추석 무렵이 됐다. 회장부인이 정의택씨 집으로 국수 상자를 보냈다. 판사 엄마가 된 처제가 마침 와 있었다. 정의택씨가 회장 사모님에게 감사전화를 하려고 하자 김 판사의 엄마는 그러지 말라고 펄쩍뛰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부잣집에 팔려가면 함부로 연락도 해서는 안되는 것 같았다.
처제는 혜경이도 김 판사한테 전화를 하지 말게 해달라고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순간 그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는 딸에게 판사오빠에게 몇 번이나 연락했느냐고 물었다. 딸은 결혼하고 단 두 번이었다고 대답했다. 한번은 공부 때문에, 다른 한번은 안부전화였다고 했다. 잦은 연락도 아닌데 아무튼 이상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조카인 김 판사가 이모인 그의 처에게 전화했다.
“이모하고 혜경이가 일본여행을 갔다 왔어요? 또 혜경이를 미국유학 보내려고 그런다면서요?”
정의택씨 부부는 깜짝 놀랐다. 조카인 김 판사가 알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니?”
“장모가 얘기해 줬어요.”
그때 정의택씨의 머릿속에서 기억의 전구가 반짝 들어왔다. 괴전화의 50대 여자의 목소리는 바로 회장부인이었다. 결혼 후 피로연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분명했다. 비로소 딸에 대한 미행과 회장 집에는 전화조차 하지 말라는 의미들이 하나의 결론으로 연관성을 가지기 시작했다.
“네 장모는 왜 남의 딸 뒤를 캐고 미행하는지 모르겠다. 따져야겠어.”
정의택씨의 처가 소리쳤다. 온 가족이 옆에 있었다.
“이모, 만약 항의할 경우 저한테 먼저 말해주세요.”
김 판사가 뭔가 사연을 숨긴 듯 초조한 어조로 부탁했다. 정의택씨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딸도 회장부인의 오해를 알자 펄쩍뛰면서 가서 따지자고 했다. 정의택씨 가족은 회장 부인 집으로 항의하러 쳐들어갔다.
“딸 단속이나 잘해요. 이놈저놈하고 붙어먹고 어디 시집가서 잘 사나 봅시다. 내 말이 사실이 아니면 내 새끼 차에 깔려죽어도 괜찮아.”
설득은 씨도 먹히지 않고 오히려 회장부인이 퍼붓는 저주들만 섬뜩했다. 해결은 사위인 김 판사의 몫이었다.
“네가 장모 앞에서 ‘사실이면 사실이다, 아니면 아니다’라고 분명히 해라.”
정의택씨가 조카인 김 판사를 다그쳤다. 김 판사는 얼굴이 백지장같이 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회장부인은 그가 보는 앞에서도 사위인 김 판사의 배를 찌르고 멱살을 잡는 등 표독을 떨었다. 김 판사는 이미 영혼이 없는 밀랍 인형 같다고 정의택씨는 느꼈다. 소득 없이 싸움만 벌인 채 회장집을 나오면서 정의택씨는 조카인 김 판사가 차라리 측은했다. 달래서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겠다고 마음먹고 말했다.
“김 판사, 네가 장모의 오해를 잘 풀어서 이 일을 매듭이어야지.”
“이모부, 장모는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는 사람이에요.”
김 판사가 절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주일 후 회장부인의 조카라는 사람이 연락을 했다. 호텔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정의택씨는 회장부인의 화해 의도로 여기고 가벼운 마음으로 나갔다. 그러나 막상 호텔 커피숍에서 본 남자는 의외였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험악한 인상의 건달이었다.
“왜 그날 허락도 없이 회장님 댁에 침입했죠? 주거침입죄 아닌가요?”
위압적인 어조였다. 정의택씨가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말문이 막힌 건달 같은 그는 납득이 됐는지 이렇게 덧붙였다.
“회장부인을 이긴 사람이 없어요. 한번 이거다 하면 끝까지 우기죠. 그리고 삐치면 침대까지 밥을 가져다 바쳐야 하는 사람이에요. 회장부인은 사돈의 과거까지 다 꼬챙이에 꿰듯 파악하고 있죠.”
정의택씨는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단정했다. 딸 혜경에 대한 괴청년들의 미행은 더욱 집요해졌다. 이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따라붙었다.
“아빠 도저히 참지 못하겠어요. 법으로 해요.”
딸 혜경이가 선언했다. 정의택씨는 형사고소와 함께 접근금지 가처분신청을 했다. 회장부인은 도도했다. 판사사위와 회장이 개입하면 안되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회장부인이 졌다. 심하게 자존심을 다친 회장부인은 헌법소원까지 시도했다. 회장부인의 분노는 이제 제어력을 잃은 적개심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그 무렵 회장부인의 조카인 김용국(가명)은 목동아파트 2단지 앞에서 고교동창인 마기룡(가명)을 만나고 있었다. 전주의 돈을 받아 사채업을 하던 마기룡은 생활에 쫓기는 형편이었다. 전주가 그로부터 돈을 회수해서 다른 건달로 하여금 사채를 놓게 했기 때문이다. 돈에 쫓기던 마기룡은 무슨 일도 할 입장이었다.
“어르신한테 부탁받았는데 사람을 없애야 하는 일이 생겼어. 그런 사람을 소개해 줘. 완벽하게 그런 일을 할 방법이 없을까?”
김용국이 심각하게 말했다.
“그런 일은 아무나 시키면 안되지. 성공해도 나중에 약점을 잡으니까. 어때? 내가 직접 작업을 해 줄까? 우리 사이면 뒤탈이 생길 염려는 없잖아?”
“나야 좋지.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일할 건데?”
“특수 독약이 있는데 그걸 먹으면 일주일 안에 간이 상해서 죽어. 내가 그걸 구할 수 있어. 약을 먹여도 며칠 지나서 죽으니까 완전범죄지.”
김용국과 마기룡 사이에 살인청부의 흥정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