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삼성 회장 | ||
삼성이 더 걱정하는 부분은 앞으로 X파일 파편이 어디로 더 튈지 모른다는 점이다. 최근 <월간조선> 9월호가 도청 X파일 녹취록 전문을 공개하면서 ‘전선’은 더 깊고 넓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특히 민주노동당이 그동안의 지리멸렬한 모습을 벗고 ‘삼성 때리기’에 올인, X파일 정국을 주도하면서 ‘사태 수습’은 더 어려워지고 있다. 삼성은 향후 X파일 사건이 국정조사로 이어져 그룹 총수 이건희 회장이 장시간 국회 증언장에 서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까 매우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와중에 검찰은 지난 2002년 대선자금 수사에서 밝히지 못했던 삼성의 5백억대 채권의 행방을 다시 찾으려 하고 있다.
과연 X파일 정국이 ‘삼성공화국’ 균열의 전주곡이 될지 짚어보았다.
최근 야당 정치인 A의원은 삼성그룹 고위관계자들과 골프를 함께했다. 이 자리에서 삼성 임원들은 X파일 사건이 어디로 튈지 노심초사하며, 국회의 대응방법을 떠보는 등 분주하게 정치권 ‘로비’를 했다고 전해진다.
A의원은 이에 대해 “삼성측 관계자들이 이번 X파일 사건에 대해 굉장히 걱정스럽게 생각하고 있더라. 하지만 뾰족한 해결방안이 없다는 데 더 답답해하는 것 같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를 보면 삼성이 겉으로는 이번 X파일 사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 같지 않아 보이지만, 물밑으로는 정치인들과의 접촉을 늘리는 등 사태 수습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삼성이 X파일 사태에 대해 겉으로는 적극 대응을 자제하고 있지만, 실제 안을 들여다보면 일부 불만 섞인 반응도 나오고 있다. 특히 민중연대, 언론개혁국민행동, 기아자동차노동조합, 민주노동당 등이 공동 주관한 촛불문화제가 매주 목요일 7시에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 앞에서 열리고 있는 것에 대해 매우 불편해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우리도 솔직히 열받는다. 우리만 잘못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요즘 심정 같아선 회사가 시키지 않아도 우리가 직접 목요일마다 열리는 촛불집회를 막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고 말했다. 삼성은 직원들의 피해의식 등을 의식해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에 집회가 열리는 것을 피해서 목요일만은 5시30분에 직원들을 일찍 퇴근시키는 것으로 알려진다.
먼저 삼성은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이 검찰 떡값 리스트에 이어 제2, 제3의 폭로전을 이어갈 가능성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삼성은 그동안 자신들을 표적으로 겨냥해온 민주노동당의 ‘전투의지’에 내심 긴장하는 모습이다. 사실 민노당은 그동안 ‘무기력한’ 의정활동으로 크게 침체돼 있었다. 하지만 이번 X파일 정국에서 여야 양대 정당이 눈치를 보는 사이 처음으로 X파일에 담긴 떡값 리스트 실명을 공개, 여론의 뜨거운 호응을 얻는 ‘전과’를 올려 크게 고무된 표정이다. 민노당 조승수 의원은 “민노당 의원 전원이 수갑을 찰 각오를 하고 X파일을 파헤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혀 삼성을 더욱 긴장시키고 있다.
특히 실명을 공개한 노회찬 의원은 국민들로부터 ‘속시원한 폭로’라는 찬사와 함께 인기가 급상승중이다. 삼성이 긴장하는 포인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정작 X파일이 불법 도청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누설하는 것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등 실정법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게 삼성의 주 방어 포인트였다. 하지만 여론은 ‘속시원한 까발림’에 크게 박수를 보내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민노당이 또 다른 X파일을 폭로할 가능성이 높고, 이 경우 그 파편이 고스란히 삼성으로 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삼성이 더욱 곤혹스러워하는 부분은 바로 그룹 총수 이건희 회장이 ‘포토라인’에 서는 경우다. 삼성 내부 사정에 정통한 대기업 정보담당 한 관계자는 “지난 대선자금 수사 과정에서도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검찰 소환만은 필사적으로 막았다. 어떤 기업이든지 그룹 총수가 검찰에 불려가는 것만은 온몸으로 막으려고 하지만 삼성의 경우는 말 그대로 필사적이다”고 전하면서 “삼성이 특히 우려하는 것은 검찰의 조사보다 오히려 국회의 국정조사나 청문회다. 재판은 막강 법무팀이 법리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하지만 국정조사나 청문회는 여야가 전격 합의해 그룹 총수를 증언대로 불러낼 경우, 이 회장이 큰 고초를 겪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번 X파일 사건의 파장이 결국 이건희 회장이 다시 한번 포토라인에 서는 쪽으로 흘러갈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여론을 등에 업은 노회찬 의원이 ‘삼성의 조직적인 검찰 떡값 제공 의혹’과 관련해 법사위 차원의 청문회 개최를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아울러 노 의원은 청문회 개최시 반드시 불러야 할 증인으로 “삼성 떡값의 최종결정권자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라며 이 회장을 증인에 포함시켜 앞으로 파장이 예상된다. 민노당이 ‘청문회 증인 배제’ 신화를 이어온 삼성의 방어벽을 뚫고 이건희 회장을 증언대에 세운다면 X파일 사건도 그 하이라이트를 맞을 전망이다.
삼성이 세 번째로 느끼는 위기 의식은 검찰의 대선자금 재수사에 있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부장 박영수)는 지난 2002년 삼성이 불법 정치자금으로 쓰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무기명채권 8백억원 중 지난해 대선 자금 수사 때 사용처를 밝혀내지 못한 채권 5백억원의 향방을 밝히기 위해 최근 금융결제원의 삼성채권 관련 계좌에 대해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다. 이는 사실상 검찰이 삼성그룹의 2002년 대선자금에 대해 재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해석된다.
당시 검찰은 이회창 캠프에 건네진 3백억원대의 삼성 채권의 일련번호는 거의 다 밝혀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노무현 캠프 쪽으로는, 안희정씨를 통해 건네진 채권 15억원이 전부였다는 점에서, 사용처를 밝히지 못한 채권 5백억원 중 일부가 노 캠프에 흘러갔을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다. 만약 이런 의혹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삼성으로서는 또 다시 대선자금 수사의 악몽 속으로 빠져들게 돼 더욱 난처한 입장에 빠질 전망이다.
정가 일각에선 대선자금 문제는 삼성이 다칠 수도, 또 삼성이 현 정권을 압박할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이라는 점을 들어 사라진 채권의 ‘봉인’이 쉽게 열리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대선자금 문제는 삼성으로서는 언제 터질지 모를 ‘활화산’일 수밖에 없다.
삼성은 X파일 정국에 대해 외관상 담담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삼성 이학수 부회장은 최근 열린 계열사 사장단 회의인 ‘수요회’에서 ‘과거에도 큰 위기가 있었지만 이를 잘 극복해온 점을 강조하고 더욱 경영에 전념해 위기를 넘길 것’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진다. 일단 본업에 충실히 임하면서 여론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재계에서는 ‘법대로’ 나갈 경우 삼성의 막강 법무팀이 재판 장기전을 통해 이번 사태에서 ‘승리’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럼에도 삼성이 X파일 후유증이란 중병을 치유하기 위해 꺼내들 수 있는 처방전에는 아직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먼저 대내적으로는 일각에서 이학수 구조본 부회장 책임론이 흘러나오지만 가능성은 희박한 편이다. 재계 한 소식통은 “한때 삼성 일각에서 이번 사태의 책임을 지고 이 부회장이 물러나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사회 전반에 큰 파장을 불러온 이번 사태가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지 개인의 진퇴로 해결될 사안은 아니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부회장이 이재용 상무의 경영권 승계작업을 총괄하고 있는데 그가 낙마한다면 삼성 전체에 큰 혼란이 올 수도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이 부회장은 살아남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일부에선 삼성이 X파일 대응 과정에서 초기에 너무 ‘강경책’에 치중했던 것이 도리어 여론의 역풍을 부른 것 아닌가 하는 자성론이 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이런 ‘강경책’은 삼성 구조조정본부 재무팀과 법무실 간 대립·갈등의 산물이라는 해석도 있다.
삼성 정보에 정통한 재계 한 소식통에 따르면 “삼성그룹이 최근 구조본 법무실을 본격 강화하면서 법무실의 파워가 커졌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 주류인 재무팀의 목소리가 작아지고 법무실이 상황을 주도하는 형국이 되면서 X파일 정국에서도 강하게 법적 대응 일변도로 나가 사태가 악화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앞으론 삼성이 X파일 폭로에 대해 강경책보다는 사태를 ‘관리’하는 쪽으로 가야 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편 삼성그룹 계열사의 한 고위 임원은 사견임을 전제로 “삼성이 이번 사태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X파일 사건을 헤쳐나가기 위해 대외적으로 적극 대응하기보다 국민 여론에 겸허한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지난 8월14일 삼성은 서울 태평로 본관에 ‘새로운 시작’이라는 대형 플래카드를 내 걸었다. 그 플래카드는, 삼성과 대한민국이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실’이라는 출발대 위에 발을 내디뎌야 한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