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찰청(왼쪽), 대검찰청 | ||
검찰과 경찰, 언론사에 대한 전방위 로비 사항이 담긴 홍씨의 비밀장부가 경찰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홍씨가 경찰에 체포될 당시만 해도 경찰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홍씨의 장부에 현직 부장검사 2명과 검찰직원 1명,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 1명 등 전·현직 검찰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홍씨의 로비내역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검찰관계자들의 삼성그룹 ‘떡값 수수’ 의혹이 일고 있는 가운데 홍씨의 장부를 확보한 경찰로서는 수사권 조정문제로 각을 세우고 있는 검찰을 압박할 수 있는 최상의 상황이 마련된 셈이었다.
그러나 이런 ‘행복한’ 시간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홍씨에 대해 수사가 본격화하면서 현직 총경 등 경찰 인사들의 연루 의혹이 줄줄이 터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경찰 내부에선 “우리가 독배를 든 게 아니냐”는 긴장감마저 감지되고 있다.
경찰 한 관계자는 “전 국정원 불법도청팀장(미림팀장) 공운영씨의 불법 도청 테이프처럼 홍씨의 일기장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며 “일단 수사에 착수한 이상 철저히 진상을 밝혀야 하지만 여러 가지 요인을 감안할 때 경찰이 피를 흘릴 수 있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검찰이 현직 검사에 대한 경찰의 수사 요청을 사실상 거부해 검·경간에 수사 주체를 둘러싼 갈등 양상마저 빚어지고 있다.
검찰과 경찰, 언론사 등이 두루 연루된 이번 사건은 여러 모로 휘발성이 높은 사건이다. 무엇보다 홍씨가 경찰에 제출한 일기장은 진본이 아니라 사본인 데다 2003~2004년 2년치에 불과하다. 홍씨는 경찰조사에서 30년 이상 일기를 써 왔고, 일기장에는 날짜별로 만난 사람과 금품 및 향응 제공 내역, 이를 받은 사람의 반응 등이 꼼꼼히 적혀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경찰에서 홍씨는 “검찰에서 모든 것을 밝히겠다”고 호언장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홍씨가 경찰에 제출한 사본 일기장 내용은 전체 로비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평이 많다. 홍씨가 비밀장부 진본은 ‘보호용’으로 보관중이며 이것이 모두 공개될 경우 파장은 일파만파로 확대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지금까지 밝혀진 연루 인사 외에 추가로 검·경과 언론계, 정치권 인사들이 더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은 지난 1월 초 한 네팔 인력송출업체가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에 홍씨를 사기혐의로 고소하면서 시작됐다. 홍씨가 이 회사를 인력송출회사로 선정해 주겠다며 1억2천여만원을 받아 챙겼다는 것이다.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지난 4월 홍씨를 붙잡아 1억2천여만원의 사용처를 추궁했고, 홍씨는 자신의 로비내역이 담긴 일기장을 경찰에 제출했다.
이 일기장에는 전·현직 검찰 및 경찰 인사 20여 명과 MBC 고위간부 등 7명, 현역의원 2명, 금융권 및 세관, 군, 구치소 관계자 등 모두 44명의 이름이 언급돼 있다. 그러나 불구속 상태였던 홍씨는 사건이 확대될 기미를 보이자, 행방을 감췄고 지난 8월14일 경찰에 긴급 체포됐다.
이번 사건은 ‘장성 잡는 여경’으로 이름을 날리다가 최근 사기 혐의자에게 운전면허증을 위조해 준 혐의로 구속된 강순덕 전 경위(39)가 최초 단서를 잡고 수사에 착수했다.
경찰조사 결과, 홍씨는 90년대 초까지 부산에서 스티로폼 사업체를 운영하며 돈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사업체가 부도난 뒤 상경해 강남 일대에서 유흥업소를 운영해 왔다.
이번 사건 연루 의혹 대상자는 검찰쪽으로는 K부장검사와 B부장검사, 부장검사 출신의 변호사 K씨, 서울중앙지검 P계장 등 4명 외에 2~3명이 더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홍씨는 이들에게 모두 2천여만원의 금품 및 향응을 제공한 것으로 일기장에 적고 있다. 홍씨의 일기장에는 ‘이 부장’ 등으로 익명으로 처리된 사람도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에는 K, P총경과 서울경찰청 K계장, 그리고 이번 수사를 맡았던 광역수사대장 K경정 등 현직과 전직 경찰관 등 15명이 연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홍씨로부터 각각 1백만원씩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K, P총경에 대해서는 대기발령 조치했고, 꿀 한 통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 K경정은 다른 부서로 인사조치했다. 경찰은 두 총경이 금품을 받은 것으로 확인될 경우 중징계를 내릴 방침이다.
하지만 경찰은 지난 4월 홍씨의 일기장을 입수한 뒤 경찰 관계자들의 연루 의혹 사실을 파악하고도 적절히 조치를 취하지 않아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번 강경조치가 불길이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일종의 ‘불끄기’가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MBC의 경우 K 전 보도국장, K 전 보도본부장, 일선 취재 및 카메라 기자, 행정담당 간부 등 7명이 각각 1백만원 안팎의 접대와 선물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홍씨의 청탁을 받고 해외인력송출업계 비리를 고발한 보도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밖에 홍씨는 자신이 연루된 8~9건의 사건 무마를 위해 세관, 구치소, 의약 관련기관 등에 폭넓은 로비를 펼치고, 아들의 군대 보직이동을 위해 정치인 2명에게도 로비를 한 의혹을 사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선 이 같은 전방위 로비 수사가 ‘용두사미’로 끝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수사권 조정 문제로 첨예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경찰과 검찰의 손발이 맞지 않는 데다 홍씨 로비의 대가성 입증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경찰 관계자는 “형사입건 순위로 1번이 검찰, 2번은 금융기관과 MBC 관계자로 정리했지만 검찰의 수사지휘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검찰이 순순히 이를 받아들일지 장담하기 어렵다”고 했다.
실제 검찰은 경찰의 현직 검사에 대한 수사 요청을 사실상 거부하고 자체 감찰을 벌이고 있다. 이에 따라 현직 검사 수사는 검찰이,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와 검찰 직원 수사는 경찰이 담당하기로 정리됐다. 한 사건에 대해 검찰과 경찰이 동시에 수사할 경우 수사가 제대로 될지 의문시될 뿐 아니라, 처리 수위에 대한 형평성 논란이 야기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 관계자는 “검찰인사들이 수수한 액수가 모두 2천여만원 정도인 데다 이것도 4~5명이 나눠 가지면 액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며 “이럴 경우 징계만 받고 사건이 종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MBC 연루자들은 접대와 향응은 인정하면서도 대가성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일부 인사는 연루 의혹을 받고 있는 사람 중 최근 사망한 이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고위관계자는 “홍씨가 자폭하는 심정으로 모든 것을 까발리지 않는 이상 현재의 상황에서 연루된 인사들을 구속수사하기란 쉽지 않다”며 “이번 사건이 ‘태산명동 서일필’로 끝날 경우 여론의 뭇매를 맞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자기식구들이 적잖이 연루된 이번 사건을 놓고 검·경이 과연 어떤 수사 의지를 보일지 결과가 주목된다.
유영욱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