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찰은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이 조풍언씨에게 준 4백억원에 대해 횡령 혐의를 적용할 것으로 보인다 (왼쪽),조풍언씨는 김우중씨가 자신이 소개해준 유명인사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해 대신 갚아줬다고 밝혔다. | ||
이미 분식회계와 사기대출 혐의로 구속 기소된 김 전 회장에 대해 검찰은 최근 4백여억원대 횡령죄를 하나 더 추가했을 뿐이다. 그나마 이 횡령 부분 또한 이미 4년 전 예금보험공사가 김 전 회장의 숨겨진 재산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밝혀낸 것을 재확인하는 선에서 그친 수준이다.
폭발력을 갖고 있을 것으로 봤던 김 전 회장의 입은 끝내 열리지 않았고, 항간에 떠돌던 ‘김우중 X파일’도 나오지 않았다. 사건 관련 핵심 ‘참고인’인 재미교포 사업가 조풍언씨에게는 접근조차 못하고 있다. “사실상 수사는 끝났다”는 것이 검찰 주변의 대체적인 분위기다.
하지만 4백여억원의 거액이 왜 김 전 회장에서 조씨에게 전달됐는지, 그리고 이 돈을 조씨는 무슨 용도로 받아서 썼는지를 밝히는 것이 거대한 ‘대우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단초라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 돈의 성격을 푸는 것이 곧 ‘김우중-조풍언 커넥션’의 실체를 밝히는 길이라는 것. 돈의 향방을 둘러싼 세 가지 가능성을 추적해 가다보면 뜻밖에 ‘제3의 인물’이 등장할 가능성도 나온다.
예금보험공사는 2001년 11월 “김우중 전 회장이 4천4백30만달러(당시 환율로 약 5백11억원)를 인출해서 홍콩 ‘KMC’사와 미국 ‘라베스’사에 입금시켰고, KMC는 이 돈의 일부를 사용, 대우정보시스템의 주식 2백58만주를 2백81억원에 매입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예보에서는 김 전 회장이 사실상 대우가 넘어가는 것을 감지하고 공금을 빼돌려서 조씨 명의를 내세워 대우의 알짜배기 계열사를 사들이려 한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실소유주=김우중, 대리인=조풍언’이라는 첫 번째 가능성이 등장한다.
예보의 발표를 재확인한 검찰에서도 그렇게 보는 시각이 우세한 듯하다. 따라서 김 전 회장의 횡령 혐의 확정으로 대우 수사를 마무리 지으려 하고 있다. 사실상 조씨는 김 전 회장의 비자금을 대신 관리해준 역할에 그쳤다는 시각이다. 페이퍼컴퍼니 성격이 짙은 KMC와 라베스의 실질적 대표는 조풍언씨인 것으로 알려졌다. 항간에는 조씨가 운영했던 무기거래 회사 ‘기흥물산’의 영문 이니셜을 딴 회사명이 KMC라고 알려지기도 했다.
99년 6월 당시 상황을 보면 예보측의 이 같은 주장은 설득력을 더해 보인다. 대우그룹 마지막 구조조정본부장이었던 김우일 전 상무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김 회장은 내게 조씨를 ‘미국의 사업가’로 소개하면서 ‘이 양반이 대우 계열사를 사고 싶어 한다. 회사를 팔아서라도 외자를 유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밝혔다.
김 전 상무의 증언을 통해보면, 당시 김 전 회장은 아도니스골프장과 대우정보시스템, 대우통신 전자교환기 사업부문을 조씨에게 넘기도록 지시했다는 것. 그것도 “세 개 부문 모두 최저가로 넘기도록 회장이 지시했다”고 김 전 상무는 밝혔다. 당연히 특혜 의혹이 제기된다.
하지만 ‘조씨의 역할이 단순히 명의만 빌려준 차원에 그치느냐’ 하는 데에는 의문이 남는다. 김 전 상무는 “당시 국회에서 한나라당이 조씨의 골프장 인수 건을 폭로하자마자 겁에 질린 듯한 조씨의 국제 전화를 수차례나 받았다”고 밝혔다. 당장 계약을 취소할 테니 계약금과 중도금을 돌려달라는 독촉이 대단했다는 것.
뿐만 아니다. 대우통신 전자교환기 사업부문 매각안 역시 주주총회에서 부결되자 조씨는 “당장 매입대금을 돌려달라”며 청구소송까지 제기했다고 한다. 만약 조씨가 단순히 김 전 회장의 대리인 역할만 했다면 결국 김 전 회장측에 대고 이렇게 빗발치는 독촉을 할 리가 있겠느냐는 반론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문제의 4백억원을 두고 두 번째 가능성으로 대두되는 것이 바로 김 전 회장의 로비 자금설이다. 김 전 회장이 마지막까지 조씨를 통해 구명 로비를 시도했고, 결국 이것이 실패했다는 것.
이는 “최근 김 전 회장이 DJ정권과 조씨 모두에게 배신감을 갖고 있다더라”라는 한 재미교포 경기고 동문 관계자의 말(<일요신문> 6월19일자 보도)이나, 최근 한 일간지에서 보도한 ‘김 전 회장이 99년 10월 해외 도피 직전 조씨에게 로비용으로 1백억원 이상의 거액을 건넸다’는 내용으로 뒷받침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우측에서는 “당시의 대우 상황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며 그 가능성을 현저히 낮게 보고 있다. 김 전 상무는 “해외도피 직전 로비용으로 조씨에게 거액을 건넸다는 보도는 명백한 오보라고 나는 확신한다. 99년 10월이면 사실상 상황은 종료됐다. 회장은 8월 이후부터는 사실상 정부측과 완전히 등을 돌렸다. 1백억원이나 되는 돈을 쏟아부어서 로비를 할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라고 주장했다.
김 전 상무는 조씨에 대해서도 “심부름꾼 역할이라면 몰라도, 정권의 실세라거나 로비리스트라고 할 만한 인물이 전혀 아니었다”고 혹평했다. 그는 “조씨는 99년 6월에 김 회장으로부터 처음 소개받아서 내가 이후 사업관계로 대여섯 차례 집중적으로 만났다”고 밝혔다.
그가 당시 조씨로부터 받은 명함에는 서울 청계천에 주소를 둔 ‘D물산’ 대표로 적혀 있었다고 한다. 세운상가에 있는 조그만 사무실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는데 이사 한 명과 직원 5~6명이 있었고, 이 이사가 사실상 조씨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는 것. 이사라는 인물은 김 전 상무에게 “조씨는 DJ의 양아들” 운운하면서 은근히 실세임을 과시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김 전 상무는 “D물산은 무기중개회사였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김 전 상무는 인터뷰 도중 “사실상 대우나 김 회장은 조씨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그런 인물에게 대우가 회사의 명운을 걸고 로비를 맡겼겠느냐”고 반문했다.
일각에서는 조씨가 로비를 명목으로 김 전 회장을 오히려 역이용한 게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으나, “그렇다면 김 전 회장이 굳이 그런 조씨를 지금까지 보호할 이유가 없다”는 반론에 부딪히고 있다. 김 전 회장은 검찰 조사에서 4백여억원의 성격에 대해 “조씨에게서 빌린 돈을 다시 갚은 것”이라고 밝혔다는 전언이다.
이런 가운데 전혀 뜻밖의 새로운 가능성이 돌출되고 있다. 김 전 회장이 ‘제3의 인물’로부터 거액을 빌렸고, 문제의 4백억원이 이 돈을 갚는 데 쓰여졌다는 주장이 그것. 특히 이 같은 내용은 핵심 당사자인 조씨를 통해 처음 불거진 내용이어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국내 언론과는 철저히 인터뷰를 피하고 있는 조씨는 2003년 5월 한 재미 교포 언론인과의 인터뷰에서 “대우그룹이 해체될 당시 정말 어려울 때 내가 주선해서 세계적인 ‘유명인사’를 김 회장에게 소개해 주었고, 그는 김 회장에게 7천5백만달러를 빌려줬다. 김 회장은 그 돈으로 H은행의 전환사채를 매입했고 그 전환사채를 담보로 돈을 대출받아 대우그룹의 회생을 위해 사용했다. 그러나 김 회장은 빌린 돈을 갚지 못해 결국 담보인 전환사채가 백지사채로 되어버려 엄청난 곤경에 빠졌다. 김 회장은 유명인사의 돈을 갚기 위해 당시 시가 약 4천5백만달러 상당의 대우정보시스템의 자신 소유 주식을 주면서 ‘한 달 뒤에는 배로 뛸 것이니 그때 주식을 팔아 본전을 챙겨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히려 주식이 폭락하면서 결국 2천5백만달러만 회수했다”고 밝혔다.
조씨는 7개월 후인 2003년 12월 이 언론인과 또다시 맞닥뜨리자 “나머지 5천만달러를 결국 내가 대신 갚아줬다. 내가 해외도 다니고 해야 하는데 그 (유명인사의) 돈을 안 갚고 마음놓고 다닐 수 있겠나”라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회장과 관련해서는 오히려 자신이 막대한 피해자인 점을 애써 강조한 셈이다. 하지만 그 ‘유명인사’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하고 있다. 조씨 주변에서는 “자칫 외교분쟁으로까지 비화될 수도 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조씨의 이 같은 언급은 과연 어느 정도나 신빙성이 있는 걸까. 일단 돈과 주식으로 그 성격이 분명히 다르지만 예보가 말한 4천4백30만달러와 조씨가 말한 4천5백만달러 상당어치의 주식은 액수가 대충 일치한다. 김 전 회장이 검찰에서 언급한 “빌린 돈을 갚기 위한 용도로 쓰인 것”이라는 진술과도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 김 전 상무는 “만약 김 회장이 회사 차원에서 돈을 빌렸다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다. 검찰 주장대로 차용증 같은 서류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만약 조씨의 말이 맞다면 김 전 회장 개인 차원으로 들여온 자금이라는 것. 그는 또 “대우정보시스템은 당시 비상장회사였는데 주식이 갑자기 절반으로 폭락했다는 것 또한 절대 있을 수 없다. 조씨의 완벽한 거짓말”이라고 밝혔다.
반면 조씨를 두 차례 만나 인터뷰한 재미교포 언론인은 “인터뷰 자체를 꺼리는 조씨 입장에서 일부는 꾸며낸 말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두 차례 인터뷰에서 일관되게 ‘유명인사’를 거론했다는 점에서는 단순히 무시하고 넘어갈 수만은 없을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김 전 회장 또한 “조씨에게 빌린 것”이라는 말만 하고 4백억원의 향방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이런 점들을 살펴보면, 문제의 4백억원 뒤에 김 전 회장과 조씨가 보호해야 할, 밝히기 어려운 ‘거물’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 수밖에 없다. 만약 그렇다면 김 전 회장이 ‘횡령’ 혐의를 쓰면서까지 보호하려는 거물은 과연 누구이고, 그와 김 전 회장, 그리고 조씨의 3각 돈거래에 숨어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조씨는 앞서의 재미 언론인에게 “절대 한국엔 안 들어간다. 난 LA 공원묘지에 묻힐 것”이라고 확언했다고 한다. 한인사회에서도 조씨를 못 본 지 오래됐다는 반응이다. 결국 다시 시선은 김 전 회장의 입으로 쏠릴 수밖에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