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우중 전 대우 회장 | ||
검찰이 기소한 김 전 회장의 혐의는 40조원대의 분식회계와 1천억대가 넘는 회사돈 횡령 등 어마어마한 규모다. 특히 김 전 회장이 수백억원대의 회사돈을 빼돌려 가족들을 위한 페이퍼컴퍼니를 세우고 해외에 은닉한 주택과 포도밭, 현금 등이 확인된 것은 검찰이 날린 회심의 펀치다. 검찰이 김 전 회장을 상대로 상당히 선전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핵심적 의혹 사항인 김 전 회장의 정·관계 로비 혐의와 해외도피 배경 등은 전혀 규명되지 않았다. 이 부분에서는 김 전 회장이 검찰의 공격을 거의 완벽하게 방어한 셈이다. 검찰이 바쁘게 링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잔 펀치는 많이 날렸지만 결국 김 전 회장이 효과적으로 수비 전술을 펼쳐 ‘판정승’ 한 형국이다. 귀국하자마자 검찰에 의해 구속돼 1.75평짜리 구치소 독방에 수감됐던 김 전 회장이 두 달 만에 20평이 넘는 일류 병원의 특실로 옮긴 것도 이 같은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김 전 회장의 ‘승인’은 무엇일까. 검찰 주변에서는 산전수전 다 겪은 김 전 회장의 노련함과 최근의 변화된 수사 환경에 하늘의 운까지 김 전 회장을 도왔다고 분석하고 있다.
김 전 회장이 5년 8개월간의 해외도피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던 지난 6월14일 온 국민과 언론의 관심은 대단했다. 당시 한 방송사는 헬기까지 띄워 김 전 회장이 공항에서 검찰 청사로 이동하는 장면을 생중계했을 정도였다. 이어 전 언론은 김 전 회장이 연루된 각종 의혹을 ‘종합선물세트’처럼 쏟아냈다. 그만큼 외환위기 이전 국내 2대 재벌이었던 대우그룹의 해체와 세계 경영의 귀재로 불린 김 전 회장의 몰락에 대한 의혹이 많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여기에는 대한민국 검찰의 최정예부대인 대검 중수부가 김 전 회장을 둘러싼 의혹을 말끔히 해소해줄 것이라는 기대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두 달 반이 지나 검찰이 김 전 회장에 대한 수사를 사실상 마치고 난 뒤의 결과는 국민들과 언론이 당초 예상했던 것에 비해 너무나 초라한 편이다.
검찰은 김 전 회장을 40조원대의 분식회계, 10조원대의 사기대출, 32억달러의 재산 국외도피, 1천1백41억원대의 회사자금 횡령, 계열사 부당지원 및 위장계열사 설립, 정치인에 대한 뇌물공여 및 불법정치자금 제공 등의 혐의를 적용, 두 번 기소했다. 언뜻 대단해 보이는 이 혐의들은 그러나 이미 과거 대우그룹 수사 때 대부분 밝혀져 전직 대우 임직원들에게도 적용됐던 것들이다.
그나마 이번 수사에서 새로 적용된, 재미교포인 조풍언씨에게 5백26억원을 송금하고 부인인 정희자씨가 관여하고 있는 필코리아의 대주주인 퍼시픽인터내셔날 설립을 위해 3백83억원을 빼돌렸다는 등의 횡령 혐의도 상당 부분 이미 알려져 있던 의혹들을 확인하는 수준일 뿐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대우그룹 해체를 막기 위한 김 전 회장의 정·관계 로비, 김 전회장의 갑작스러운 출국에 당시 국민의 정부 핵심 관계자들의 압력과 회유가 있었다는 등의 정작 중요한 의혹들은 전혀 규명되지 않았다. 결국 이번 수사는 과거 대우그룹 수사를 다시 한번 ‘리뷰’한 수준에 머물고 만 셈이다.
수사 성과가 미약하자 검찰은 김 전 회장이 회사 자금으로 미국 보스턴에 80만달러짜리 가족용 주택과 프랑스에 2백90만달러짜리 포도농장을 구입했고, 여전히 해외 페이퍼컴퍼니에 4백만달러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내용도 폭로했다. 또 6백만달러 어치가 넘는 유명작가의 그림을 회사돈으로 구입, 부인이 소유하고 있는 미술관에 전시해 놓고 있으며 1백63억원 상당의 전용비행기도 임의로 팔았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그러나 김 전 회장의 도덕성에 타격을 줄 이 같은 혐의들에도 논란을 빚는 부분이 있어 재판과정에서 그대로 혐의를 인정받게 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는 지적이다.
검찰의 노력에도 이처럼 수사 결과가 미진하게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은 김우중 전 회장의 검찰수사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상대적으로 빛을 발한 면이 있다.
검찰이 노리고 있던 ‘큰 먹이’인 정·관계 로비나 대우 몰락의 진실 등이 밝혀지기 위해서는 김 전 회장의 자백이 필수적이었다. 워낙 오래전 상황이다 보니 로비 혐의 입증에 반드시 필요한 금융거래나 회계 자료 등 객관적 증거가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찰의 집요한 추궁에도 김 전 회장은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여기에 당시 대우그룹의 비자금을 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 대우자판 사장 전아무개씨, 전 대우건설 사장 정아무개씨 등은 김 전 회장의 귀국 전후에 모두 해외로 나가버려 검찰은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대우 몰락 만판 김 전 회장의 비서로 그룹의 전체적인 자금 흐름을 관리했던 이아무개 이사도 오래전에 미국으로 이민 가 검찰의 호출을 거부하고 있다. 검찰이 비빌 언덕이 없었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검찰을 더욱 난처하게 만든 것은 김 전 회장의 건강상태였다. 귀국 전부터 심장병과 장폐쇄증이 심각하다는 소문이 무성했던 김 전 회장은 구속된 이후 검찰수사에 속도가 붙을 때마다 병원을 찾았고 급기야 지난 8월30일 수술까지 받고 말았다. 강도 높은 수사로 김 전 회장의 자백을 짜내야 할 검찰로서는 속이 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검찰 관계자는 “과거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 수사 때 김 전 회장처럼 입을 열지 않던 모 재벌 노회장이 젊은 검사가 밤샘 조사를 하다 불쌍하게 조는 모습을 보고 혐의 일부를 인정한 적이 있었다”며 “그러나 김 전 회장 수사의 경우 이 같은 행운을 위한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김 전 회장의 건강상태 때문에 밤샘 조사는커녕, 일과시간의 조사마저 대폭 단축해야 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어려운 수사 환경 속에서 검찰의 의욕을 더 떨어뜨리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바로 최근 전국을 뒤흔들고 있는 안기부 ‘X파일 사건’이다. 보통 검찰이 대형사건 수사를 진행하면 국민들과 언론이 집중적인 관심을 갖게 되고 이는 각종 제보와 언론의 의혹 폭로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검찰이 국민들, 언론과 함께 수사를 하는 셈이다. 그러나 X파일 사건이 터지면서 국민들과 언론의 관심은 김 전 회장 사건에서 멀어지게 됐고 검찰은 외로운 수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X파일 ‘쓰나미’가 김우중 사건을 쓸어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김우중 사건은 검찰에게 너무나 힘겨운 수사가 됐고, 이는 미약한 수사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김 전 회장은 검찰 수사 단계에서 ‘기본적인’ 혐의만을 안고 법원의 재판 단계로 넘어가게 됐다. 김 전 회장은 재기를 위한 행로 중 첫 번째 고비인 검찰 수사를 최선의 결과로 넘어선 셈이다. 이제 남은 것은 사법부의 판단과 향후 거론될 정치적 사면이다. 이후에도 행운의 여신이 김 전 회장에게 계속 미소를 지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