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 ||
지난 4일 오후2시 서울중앙지법 423호에서는 지난 96년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를 이건희 삼성 회장의 자녀들에게 싸게 팔아넘긴 혐의로 기소된 저가발행건에 대한 1심 판결이 있었다. 법원은 허태학 전 에버랜드 사장(삼성석유화학 사장)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박노빈 삼성에버랜드 사장(전 에버랜드 상무)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법원은 이때 발행한 전환사채를 이용해 삼성에버랜드의 1대주주로 등극해 삼성지배구조의 정점에 올라선, 그래서 사실상 지분상속승계를 완성한 행위가 불법이라고 판정한 셈이다. 물론 2심도 남아있고, 3심도 남아있어서 법원의 최종판결이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이날 법원의 1심 판단은 최근 거세게 일고 있는 삼성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을 사법적인 절차로까지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됐고 삼성은 60년대 한비 사건 이래 유례없는 비판여론에 직면하게 됐다.
문제는 이 비판 여론에 대한 대응을 놓고 삼성의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삼성 구조조정본부에서 미묘한 기류가 연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환사채 저가 발행의 손발이 허태학-박노빈 사장 라인이었다면 수뇌부는 구조본이다. 벌써부터 국회에선 이건희 회장을 국정감사 증인으로 신청했고, 검찰에선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등 그룹 수뇌부에 대한 소환조사도 검토하고 있다.
이미 안기부 도청X파일로 이학수 부회장-김인주 사장 등 구조본 수뇌부의 검찰 출두설이 나돌고 있는 가운데,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발행건도 검찰에서 재조사를 하겠다고 나서니 삼성으로선 엎친 데 덮친 격인 셈이다.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건은 기존 에버랜드 주주였던 이건희 회장이 증자 참여를 포기함으로써 이 회장의 자녀인 이재용 상무 등이 인수한 것이 발단이다. 즉 본질적으로 이건희 회장의 ‘재산’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문제인 것이다.
이는 삼성 구조본 관재파트에서 담당하는 일이다. 허태학-박노빈 라인이 유죄판결을 받았다면 이를 기획했던 구조본 관재파트에 대한 검찰조사도 당연한 것이다.
관재파트는 구조본 회장실 2팀으로 불리기도 한다. 회장실 1팀은 김준 전무가 관할하는 비서팀이다. 관재파트는 구조본 재무팀 소속이기도 하다. 재무팀이 관재파트와 운용파트로 나뉘고 이 중 총수의 재산관리쪽이 관재파트인 것.
이 관재라인의 핵심은 이학수 부회장-김인주 사장이다. 이건희 회장 체제 출범 이래 재무팀은 이 부회장 관할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이학수-김인주 계보 바로 밑에 있던 ‘연결고리’가 최근 사라졌다는 점이다. 관재파트의 박아무개 전무가 지난 7월28일 세상을 떠난 것. 고려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관재파트의 핵으로 불리던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큰 수술을 세 번이나 받으며 투병해왔다.
일각에선 그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검찰의 수사가 벽에 부딪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검찰에서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 발행에 대한 책임소재를 따질 때 박 전무가 일련의 사태 책임자로 떠오를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반면 이 부회장이나 김인주 사장 등 기존 수뇌부가 박 전무의 사망으로 더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검찰의 칼끝이 이 부회장 등 핵심부로 바로 겨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구조본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또 있다. 바로 구조본 내 갈등설이다.
▲ 유죄판결을 받은 허태학 전 에버랜드 사장(왼쪽),강해진 법무팀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이종왕 법무실장. 이종현 기자 | ||
이후 삼성 안팎에선 검사 출신을 영입해 그룹 핵심 비밀을 모두 노출시키는 것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한 칼’하던 야성 습성이 강한 검사출신과 총수에 대한 절대 충성을 특징으로 하는 기업 고위 임원이 궁합이 맞느냐는 것이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과 사시동기(17회)로 대검찰청 수사기획관을 지낸 이종왕 변호사(전 김&장 대표변호사)가 지난해 8월 삼성그룹 법무실장(사장)으로 영입된 뒤 삼성 법무실에 검찰 출신인사가 대거 영입됐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삼성의 최근 상황은 법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기에 구조본의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에 대한 반응이 삼성 안팎에서 엇갈리고 있다. 특히 지난 6월28일 금융계열사의 의결권 제한을 규정하고 있는 공정거래법에 대해 삼성이 헌법소원을 제기하자 ‘삼성이 정부를 상대로 법대로 밀어붙이려한다’는 식으로 비쳤다. 한마디로 잘나가는 삼성이 ‘대담해지기까지 했다’는 것.
이런 의사 결정에는 강화된 삼성 법무실의 의견이 많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정서법’의 위력을 아는 ‘민간인’ 출신 구조본 인사들은 정부를 상대로 헌법소원을 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워했는데, 법무실에서 ‘헌법소원에 승산이 있다’는 의견을 냈다는 것이다. 이후 구조본 내 법무실과 구조조정실의 의견대립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 이해당사자들이나 여론 주도층을 상대로 사전에 미리 ‘여론 마사지’를 통해 동의를 구하고 일을 추진해가는 기존의 삼성 스타일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이종왕 사장은 확실한 삼성의 실세로 떠오르기도 했다. 그는 법조인 출신답게 논리 정연한 어법을 구사하며 법무실의 의견을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수십년간의 실전 경험을 자랑하는 삼성그룹 내 고위 임원들도 그의 논리를 앞서지 못한다는 것.
하지만 삼성 내 일각에선 강해진 법무팀이 들어선 이래 위헌 소송 제기, 금산법 개정안, X파일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지만 해결은커녕 개개의 사건이 연쇄폭발을 일으키면서 초유의 ‘반삼성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는 비판도 없지 않다.
올해 국감의 최대 이슈가 민간기업인 삼성 관련 사건으로 채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건은 법원의 1심 판결 뒤 검찰에서 즉시 항소함으로써 삼성 법무실 대 검찰의 2차 결전이 자동 성사됐다.
안팎으로 사상 초유의 사건과 변화에 시달리고 있는 삼성 구조본이 어떤 해법을 내놓을지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