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일 국회의 재경부 국정감사에서 증인으로 채택된 이건희 삼성 회장의 자리가 비어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문제는 지뢰를 해체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삼성으로서는 어떻게든 타결을 원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그룹의 지배구조와 직결되는 민감한 사안도 포함돼 있어 뇌관 제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삼성이 끝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라는 해석이 대세며 이는 그들이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방호벽’이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삼성전자 등 알짜기업에 대한 M&A 위협론이나 삼성전자 본사의 해외 이전설 등이 그것이다. 이런 ‘대응 카드’들은 그 실현 가능성을 떠나 삼성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삼성이 끝까지 기대고 있는 비장의 ‘대응 카드’가 무엇인지 따라가 본다.
삼성은 한국 경제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발전의 원동력으로, 그 중추가 의혹과 비리로 얼룩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개혁의 대상으로도 떠오르는 이중적 모순을 안고 있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려는 정부의 입장은 단호도 듯하면서도 모호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9월 언론사 경제부장단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삼성의 지배구조 문제와 관련해 “삼성의 지금까지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고 비판하면서도 “이 부분은 정부의 원칙과 위신도 유지해 나가고 또 삼성은 적대적 M&A(인수 합병) 등에 대한 문제를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시간적인 유예를 가지고, 정부가 가지고 있는 규범적 입장 같은 것을 존중하면서 경영의 새로운 묘안을 좀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바 있다. 노 대통령은 양측이 흑백논리로 대결하기보다 타협안을 찾아야 하고 국민들도 이에 양해를 해야 한다는 중간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삼성 내부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노 대통령이 공개 석상에서 삼성 문제 해결을 위한 선결 과제로 ‘M&A 위협’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삼성 지배 구조 문제를 ‘정부안’대로 진행하겠지만 M&A 가능성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처리하겠다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 소식통은 “사실 삼성은 그동안 지배구조 문제만 나오면 M&A 문제 등 민족 자본의 보호라는 거시적인 시각으로 접근, 정부의 지배구조 개선 공격에 대한 방어논리로 삼아왔다.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M&A 발언을 하는 것을 보면서 삼성이 그 동안 축적해온 방어논리와 언론플레이가 서서히 먹혀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밝혔다. 삼성전자 윤종용 부회장은 노 대통령의 M&A 발언에 대해 ‘화답’이라도 하듯 지난 10월5일 국회 답변에서 삼성전자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 가능성에 대해 ‘언제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삼성의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방어논리 설파’ 작업이 실제로 진행된 것일까. 여기에는 논란이 있지만 지난해 4월 이후 언론의 보도를 통해 그 실마리를 추적해볼 수도 있다.
지난 2004년 4월29일 한 경제일간지는 ‘삼성보고서’를 보도한 바 있는데 주된 내용은 “삼성전자가 M&A 위기에 노출돼 있다. 그리고 해외 유수의 투자기관 회장이 삼성전자 본사의 미국 이전을 제안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를 두고 당시 재계 일부에서는 “삼성에서 정부의 지배구조 개선 압력에 맞서 언론에 일부러 흘린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다. 삼성이 ‘SK-소버린 M&A 이슈’를 이용해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효과적으로 설득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언론에 보고서를 고의로 흘렸을 가능성도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 내용을 보도한 S기자는 취재 경위에 대해 “우연한 기회에 입수한 것일 뿐이다. 당시 SK-소버린 경영권 분쟁이 한창이었는데 민족자본이 해외자본 침투에 상당히 취약했던 시기였다. 그런 점에서 삼성 보고서는 일종의 경고 의미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때 불거져나온 또 다른 핫 이슈는 바로 삼성전자의 본사 해외이전 가능성이다. 앞서의 ‘삼성보고서’에는 한 미국계 자산운용사의 회장이 삼성전자 본사를 미국으로 옮길 것을 요구했다는 구체적 내용도 포함돼 있다.
또한 삼성전자는 주총 때마다 외국인 주요 투자자들로부터 본사를 미국 등 해외로 이전하라는 요구를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외국인 투자가 입장에서 보면 국내법에 제약조건이 많아 미국으로 본사를 옮길 경우 좀 더 대담한 투자 결정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경제의 불투명성 등을 근거로 외국인들이 한국 기업의 주가를 실제 가치보다 낮게 평가하는 일)라는 최대의 약점에서도 벗어날 수 있어 삼성전자의 주가가 최소한 2배 이상 상승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더욱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다.
▲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전경. | ||
‘삼성보고서’ 유출 파문 몇 달 뒤인 2004년 9월23일에는 삼성과 인연이 깊은 <중앙일보>에서 ‘삼성 내부 보고서’를 인용해 “삼성전자를 외국자본에 뺏길 수도 있다”는 보도를 했다. 또한 <중앙일보>는 “(금산법 개정안의 주요 내용인) 금융계열사의 의결권을 묶는 방침이 철회되지 않는 한 거대한 외국자본과 싸우기는 불가능하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올해 4월 <중앙일보>는 삼성경제연구소의 ‘대외자본 개방의 허와 실’이란 보고서를 통해서도 “정부가 ‘M&A 활성화를 통해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며 공격자에게 유리하도록 제도를 바꾸다보니 국내 기업들은 경영권 지키기에 급급하게 됐다. 외국 자본의 잠재적 M&A 위협 속에서 국내 기업은 투자 대신 경영권 방어에 회사 돈을 쓰고 있다”며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삼성전자 M&A는 그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게 증권가 및 M&A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이들은 “이론상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일”이라고 보고 있다. 대주주 지분이 낮아 SK의 소버린 사태와 같은 돌발 변수가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유동 주식수가 적고 지분이 다양하게 분산되어 있어 외국인 투자자들 간 전략적 담합이 없으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참여연대 또한 삼성의 M&A 위험 주장에 대해 “사이비 민족주의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하면서 “수십 개의 포트폴리오 투자펀드들이 담합하여 제조기업의 경영권에 도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며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례”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재계의 한 관계자는 “세계 유수의 자본그룹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삼성전자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삼성이 그동안 낸 보고서들도 최악의 시나리오에 미리 대비하자는 예방 차원이라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견의 폭이 크긴 하지만 삼성전자의 M&A 가능성이 낮다는 게 증권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왜 언론 등을 통해 계속 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일까.
앞서의 소식통은 “삼성은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이다. 그런 대기업이 외국 자본의 손에 넘어간다고 계속 경고 사인을 보낸다면 국민여론도 정부의 대기업 지배구조 개선 정책에 무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삼성이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마지막으로 기대할 수 있는 카드도 바로 그러한 국민여론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삼성그룹은 지금 노무현 정권의 ‘시험’에 만족할 만한 ‘답안’을 써내야 하는 입장이다. 그 마지막 장에는 과연 어떤 내용이 숨겨져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