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월29일 오후 2시40분. 창문 하나 없는 법정 안에는 무지근하고 불쾌한 기운이 흘렀다. 미리 법정에 온 나는 방청석을 둘러보았다. 붉은 얼굴의 회장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앞으로 회장부인의 자매들이 앉아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나와 눈길이 부딪치자 입을 삐죽거리고 흰 눈을 추켜올렸다.
나는 내가 발견한 진실을 글로 적어 재판부에 제출했다. 검사 역시 그가 알아낸 진실을 법대에 올려놓는 것이다. 판사들은 그 싸움의 심판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선 회장부인과 내 의뢰인인 김용국은 정반대의 입장이었다. 난 회장측에서 돈으로 입을 막으려는 그 사실 자체도 글을 통해 폭로했다.
회장은 재판이 끝나면 나를 고소하겠다고 김용국의 처를 통해 협박해 왔다. 청부살인도 하는데 협박은 아무것도 아닐지 몰랐다. 이왕 나선 김에 김용국의 처를 법정에 증인으로 세워 이차로, 또한 공개적으로 진상을 확실히 알릴 계획이었다.
방청석 반대편에 그들이 죽인 여대생의 아버지 정의택씨가 고개를 떨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피해자인데도 방청석의 대다수인 회장측 사람들은 자기네를 피해자로 착각하고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 이제 재판 시작 5분 전이었다. 무료한 듯 서기가 책상 앞에서 손가락을 하나하나 다른 손으로 주무르고 있었다. 그 옆에는 빨간 립스틱을 바른 속기사가 모니터를 보면서 공상에 잠겨 있었다.
법정 벽 위에 매미같이 달라붙은 시계의 바늘이 정확히 세 시를 가리켰다. 재판장과 배석판사들이 법정으로 등장했다. 벽 쪽의 문이 열리면서 회장부인의 찡그린 얼굴이 보였다. 절룩거리면서 나오는 그녀는 세상의 고통을 혼자 다 진 표정이었다. 그 뒤를 따라 구깃구깃한 재소자복을 입은 김용국이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그 역시 입이 잔뜩 부어 있었다. 바로 뒤에 마기룡이 붙어 있었다. 마기룡은 허리를 낮추고 본능적으로 주위의 공기를 살폈다.
이윽고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 정의택씨가 증인석에 올라와 앉았다. 정말 치밀한 공작을 하려면 회장은 설사 살인교사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를 설득해야 했었다. 그러나 반대였다. 회장부인의 공판담당 변호사가 일어나 정의택에게 물었다.
“증인은 진실을 밝혀 죽은 딸의 영혼을 밝힌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돈보다 진실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죠?”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해서 이 사건의 일심 판결이 나기도 전에 회장부인을 상대로 24억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고 전 재산을 압류했죠?”
변호사는 정의택씨에게 모욕감을 주었다.
“죽은 딸이 발견됐을 당시 범인들은 체포되지 않았습니다. 검사는 그런 상태에서는 회장부인을 살인죄로 걸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전 독자적으로 살인을 원인으로 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검사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민사로라도 진실규명을 하고 싶었습니다.”
“단순히 그런 목적인데 그렇게 거액을 청구하신 건가요?”
변호사의 어조에는 빈정거림이 묻어 있었다.
“제가 상담한 변호사는 회장부인 같은 그런 여자는 미국처럼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해서 1천억이나 2천억이라도 받아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에게서 그걸 다 빼앗아야 한다는 얘기였습니다.”
“증인은 회장부인에게는 그렇게 민사배상을 청구했으면서도 김용국이나 마기룡은 그냥 놔두셨던데 왜죠?”
“저 두 사람은 회장부인의 돈으로 망가진 불쌍한 살인도구들입니다. 나는 그런 인간들에게 돈을 청구하기 싫었습니다.”
회장측은 철저히 그를 매도했다. 나도 김용국의 변호사였다. 한번쯤은 회장측의 시각으로 정의택씨를 의심해 봤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는 무관심한 권력과 거대한 금력 앞에서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수사해 달라고 사정하는 초조한 아버지한테 술을 얻어먹으면서 탐욕의 눈길을 번들거리던 몇몇 형사들을 증오했다. 차라리 시골의 순박한 형사가 조사를 다 해주었다고 했다. 그랬다. 돈은 경찰도 검찰도 변호사도 그 누구도 마취시켜 사실을 왜곡시킬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증인, 한 가지 다시 참고 삼아 묻겠습니다.”
검사가 끼어들어 물었다. 그는 금력의 영향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집요한 수사 의지로 회장부인은 공판정에 선 것 같았다. 변호사지만 속으로 박수를 쳐주었다.
“회장부인인 김귀숙은 정의택씨가 언론플레이를 하는 바람에 자기가 억울하게 범인이 됐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회장부인이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언론플레이라는 말을 쓴 것 자체가 순수하지 못한 정치성을 느끼게 했다.
“사건이 터지고 수많은 기자들이 접근하고 인터뷰하자고 했습니다. 제 딸이 살해된 게 뭐가 그렇게 명예로운 일이겠습니까? 대부분 거절했습니다. 한번은 <동아일보>에서 ‘여대생이 알고 지내는 남자의 장모 구속’이라는 제목을 봤습니다. 피가 끓어올라 제가 그 기자에게 항의했습니다. 이종사촌 오빠를 ‘알고 지내는 남자’로 표현하느냐고 말이죠. 그런 식이면 당신 외삼촌은 알고 지내는 여자의 동생이냐고 물었죠. 다음부터 그런 원색적인 제목은 없어졌습니다. 애비로서는 정말 언론과는 얘기도 하기 싫고 힘들었습니다. 지난 설날 모란공원에 뼈로 차갑게 남아 있는 딸을 보고 왔습니다. 한창 즐거워야 할 청춘에 우리애가 왜 그렇게 되어 있어야 합니까?”
그는 특히 문제의 발단인 조카 김 판사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아는 사람이 얘기해 주는데요. 김 판사 자기 때문에 내 딸 혜경이가 살해당하고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데도 얼마 전 법원 부장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김 판사가 이 사건을 너무나 남의 일같이 생각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기적인 녀석이라 대학 때부터 이종사촌인 우리 혜경이가 좋아하지 않았어요. 대한민국은 그런 녀석을 판사로 쓰고 있습니까?”
그의 분노가 재판부의 가슴에 투사되고 있었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제가 이 재판 전에 글을 한 부 드렸는데 읽으셨습니까?”
“읽었습니다.”
나는 내가 발견한 진실을 기도하고 적었다.
“잘못 쓰거나 진실에 어긋난 게 있습니까?”
“아닙니다. 인정합니다.”
일단 진실은 밝히고 용서를 구하는 게 태도라는 생각이다. 변호사가 돈에 취해 사실을 왜곡하면 그건 또 다른 범죄다.
“딸의 시신을 처음 봤을 때 감정을 얘기해 주시죠.”
“우리 혜경이가 죽은 지 열흘이 됐는데도 내가 갔을 때 눈 한 쪽을 번쩍 떴어요. 그리고는 입을 씰룩거렸습니다. 저는 그런 걸 믿지 않는 사람인데도 한 맺힌 딸의 영혼이 가지 못하고 나를 기다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허억” 하고 마른 울음을 터뜨렸다. 재판장과 배석판사들이 그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는 침착하려고 애를 쓰면서 말을 계속했다.
“죽은 딸의 하얀 얼굴을 보고 처음에는 총에 맞았는지 몰랐습니다. 양미간에 구멍이 보여서 굵은 송곳에 찔린 줄 알았어요. 이미 경찰이 얼굴에 엉킨 피를 닦아 놓은 것 같았어요. 판사님들은 수사를 하지 않으면서 미적거리는 형사반장이나 죽은 애 아버지가 사주는 밥과 술을 느긋하게 처먹는 형사를 바라보는 제 마음을 짐작이나 하시겠습니까? 차마 제가 세부적인 사항은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만 인터폴에 협조하는 것까지 저 아니면 이 사건이 밝혀지지 못했을 겁니다.”
“이 넥타이를 보세요.”
그가 자기가 매고 있는 포도주색 넥타이를 가리켰다.
“이건 죽은 딸 혜경이가 선물한 겁니다. 저 악마 같은 더러운 여자가 끝까지 빠져나가려고 한다면 목숨을 걸고 따라가서 우리 혜경이 복수를 할 겁니다. 그래서 저는 재판이 열릴 때마다 이 넥타이를 매고 나옵니다.”
그가 한 맺힌 얼굴로 고개를 돌려 회장부인을 바라보았다. 기세등등하던 회장부인이 순간 움찔했다. 나는 다음 질문으로 들어갔다.
“증인 역시 살해되실 뻔했죠?”
그 말에 정의택씨가 갑자기 고개를 휙 돌리며 소리쳤다.
“야! 이 놈!”
순간 마기룡의 목이 자라같이 들어갔다.
“네가 날 죽이려고 할 때도 내가 험하게 대하지는 않았는데 어떻게 내 딸을….”
정의택이 울부짖었다. 그가 재판장을 보면서 절규했다.
“재판장님 저는 할 수만 있다면 제 목숨을 바쳐서 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고 싶습니다.”
법정에는 냉랭한 법뿐만 아니라 그런 피해자의 격분도 있어야 했다. 그래야 사회적 분노도 판사들의 가슴에 저며든다.
나는 그 순간 회장부인에게로 무심코 시선이 갔다. 기가 죽을 만한데도 회장부인은 고개를 빳빳이 든 채 검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잠깐만요.”
그녀가 손을 들면서 말했다. 재판장이 허락하거나 말거나 그녀가 소리쳤다.
“저 사람은 말이죠. 소설을 쓰고 있어요. 거짓말입니다.”
나는 마치 악마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