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부인의 공판 담당 민 변호사가 김용국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는 김용국을 몰아쳐서 회장부인이 살인을 교사했다는 그의 진술을 뒤엎어야 했다. 살인범들은 일심에서 회장측이 변호사를 붙여준 뒤 말을 맞춰만 주면 거액을 주겠다고 유혹했다고 내게 알렸다. 서로의 불신 때문에 그게 뒤틀렸다. 살인 잔대금도 제때 안 주는 신용 없는 여자를 어떻게 믿느냐고 그들은 투덜댔다. 회장부인만 빠져나가고 자기네만 목에 밧줄이 걸리면 억울하다는 것이다. 이젠 진흙 밭의 개싸움이었다.
때 묻은 재소자복의 김용국이 증인석에 올랐다. 결연한 표정이었다. 회장부인이 앞에서 그를 뱀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방청석의 회장측 사람들이 그에게 차디찬 시선을 보냈다. 김용국은 그걸 의식했는지 얼굴이 벌게졌다. 우유부단한 그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유도신문에 넘어갈 수 있었고 상황에 따라 말을 바꿀 수도 있었다.
“잠깐만요.”
검사가 먼저 재판장에게 발언을 요구했다.
“지금 방청석에는 회장부인의 가족들만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김용국이 아주 꺼려하는 친척들이기도 합니다. 그들을 퇴정시킨 후에 진술하게 해주십시오.”
“변호인측도 한마디 하겠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을 시작했다.
“검찰측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변호사인 저는 김용국이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진실을 말해야 더욱 신뢰를 얻으리라고 봅니다. 눈치 보면서 안 보이는 데서 말하면 계산된 정직입니다.”
“그것도 그러네요.”
재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관련자들이 다 그 자리에 있기를 원했다. 입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순간적인 표정이나 감정이 더 정직했다. 김용국이 말을 할 때 회장부인의 반응을 보고 싶었다. 회장부인 역시 죄가 없다면 눈을 부릅뜨고 김용국의 증언을 들어야 할 입장이었다. 그때 민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이 자리에 김귀숙 피고인은 있을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몸도 불편하신 분인데 퇴정하게 해 주시죠.”
내가 즉각 일어서면서 반대했다.
“아닙니다. 김귀숙 피고인도 이 자리에서 김용국의 증언이 사실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회장부인이 순간 의심의 눈으로 나를 쏘아봤다. 재판장이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입회 여부는 당사자의 의사에 맡기겠습니다. 김귀숙 피고인! 어떻게 할래요? 남아서 김용국이 증언하는 걸 들을래요? 아니면 먼저 교도소로 가서 쉴래요?”
회장부인은 자기 변호사에게 다시 ‘어떻게 할까?’라고 눈으로 물었다. 민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 알아서 할 테니 가도 된다’라는 사인을 보냈다. 회장부인이 이빨을 드러내며 다짐하듯 한마디 했다. 아픈 듯 찡그린 표정도 지었다.
“나중에 오늘 김용국이가 한 말들을 제가 다 확인하고 진술할 수 있는 거죠?”
“다 할 수 있어요. 걱정 마세요.”
민 변호사가 말했다.
“알았어요. 그럼 먼저 갈게요.”
그녀는 천천히 법정을 빠져나갔다. 민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서 김용국을 노려보며 이렇게 서두를 꺼냈다.
“김용국이가 워낙 거짓말을 많이 해서 오늘 오전 법정 내내 신문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재판부에 선입견을 주려는 말이었다. 김용국이 침묵했다. 나는 항의하려다 참았다. 이윽고 민 변호사가 물었다.
“증인은 중국에서 잡혀 한국으로 압송된 4월11일 밤 정혜경을 살해한 적이 없다고 조사관 앞에서 진술했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다음날인 4월12일에는 정혜경을 직접 죽였다고 하면서 진술서까지 썼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첫날은 거짓말을 했던 거네요?”
“저, 그게 왜냐하면….”
“아니, 나도 그 이유는 아는데 거짓은 거짓 아닙니까?”
“…!”
김용국이 얼굴이 붉어지면서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하루 만에 말이 그렇게 달라졌을까? 왜 그랬죠?”
“처음에는 마기룡이가 나보고 중국에서 짠 시나리오대로 하자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마기룡이를 조사한 형사가 마기룡이가 심경변화를 일으켜서 다 불었대요. 그러면서 저 보고 조서를 다시 쓰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줄 알고 다시 말했어요. 버티면 나만 나쁜 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때 듣고 있던 검사가 “잠깐만요” 하고 끼어들어 김용국을 보면서 따지듯 물었다.
“이봐요 김용국씨! 진술을 번복하게 된 건 전화추적이나 금융거래추적을 통해 사실이 드러나니까 어쩔 수 없이 했잖아?”
“그건 아니고요. 마기룡이가 말을 번복해서 저도 말을 바꾼 겁니다.”
민 변호사가 씩 의미 있는 웃음을 지으며 다시 질문을 했다.
“회장부인인 고모의 지시로 정혜경을 살해했다고 하면 선처할 수 있다고 저 검사가 조사할 때 회유했죠?”
“아니요. 그런 사실 없습니다.”
김용국이 단호히 부인했다.
“없긴 뭐가 없어요? 일심에서 저 검사가 잘 봐주겠다고 하다가 사형을 구형하니까 당신 부인이 검사를 따라가서 막 항의하고 당신 일심 변호사도 구형량을 줄여준다고 해서 협조했는데 왜 사형시키려고 하느냐고 따졌잖아요?”
“그런 거 없었다니까요.”
“없긴 뭐가 없어요? 내가 들은 얘기가 있는데.”
민 변호사가 단정적인 어조로 추궁했다. 방청객들의 분노가 화살이 되어 검사에게 날아갔다. 검사가 발끈한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가 재판장을 보며 소리쳤다.
“아니 있지도 않은 사실을 가지고 변호사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난 항의 받은 사실이 없어요. 오히려 김용국씨 부인이 내게 고맙다고 절까지 했어요.”
검사가 법의 도마에 올랐다. 민 변호사가 날카롭게 되받았다.
“사형시켜달라고 한 사람한테 고맙다고 절까지 했다고요? 그러지 마세요. 난 분명히 그 얘기들을 들었다니까요.”
“그러면 그 증인을 불러 물어봅시다. 변호사가 어떻게 있지도 않은 사실을 가지고 법정에서 그렇게 말합니까?”
멱살잡이라도 할 기세들이었다. 변호사가 한 발 물러섰다.
“뭐, 정 그러시면 검사에 관해 진술한 부분은 공판조서나 녹음에서 삭제해도 됩니다. 이만하면 됐습니까?”
그 말에 검사도 감정을 자제하고 자리에 앉았다. 민 변호사가 김용국을 보면서 신문을 계속했다.
“도대체 회장부인이 어떤 살해지시를 했다는 거죠?”
“고모님이 저한테 ‘너도 알다시피 이 사람 저 사람 써서 미행을 해봤는데 결말이 나지 않는구나. 더 이상 어쩔 수 없지 않니? 죽여버릴 사람을 알아보라’고 하소연했습니다. 또 어떤 때는 네 동생 같으면 이렇게 지지부진할 수 있느냐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거절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민 변호사가 따졌다.
“늦은 시각이라 그냥 ‘알았습니다’ 하고 돌아왔습니다.”
김용국이 얼버무렸다.
“그럼 바로 살인을 승낙한 거네?”
민 변호사가 곤란한 질문으로 치고 들어왔다.
“승낙은 아니고 그냥 알았다고 한 거죠.”
김용국이 본능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하면서 얼버무렸다.
“그 정도가 살인교사의 다예요?”
민 변호사가 확인했다. 그렇다면 범죄가 아니었다.
“아니요. 차로 돌아오는데 고모한테서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어요. 다시 하소연을 했어요.”
살인교사가 단순한 하소연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회장부인은 무죄였다. 유일한 증인인 김용국의 진술이 번복되는 순간이었다.
“잠깐만요. 잠깐만!”
검사가 손을 번쩍 치켜들고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회장부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하소연한 건 제발 정혜경을 죽여 달라는 애원이었잖아요.”
검사는 김용국에게 사정조로 물었다.
“그렇죠. 저는 그렇게도 받아들였습니다.”
김용국이 검사의 눈치를 보면서 화답했다. 민 변호사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지금 변호인 신문 중 아닙니까? 검사가 뭐가 그렇게 근심이 돼서 중간에 말을 잘라먹고 그럽니까?”
검사가 쑥 들어갔다. 민 변호사가 다시 질문했다.
“회장부인인 고모가 살인을 부탁했다고 주장하는 그 무렵 증인 김용국씨는 처와 함께 방 얻을 돈을 고모한테 얻으러 갔다가 냉정히 거절당했죠? 처가 눈물까지 흘렸다면서요?”
수사기록에 그런 부분이 있었다.
“그렇습니다.”
“상당히 섭섭했겠네? 다시는 고모를 보고 싶지 않았겠네?”
“그랬죠.”
“고모가 살인을 지시했다고 주장하는 시기가 바로 그 직후던데 그렇게 싫어하는 고모 말을 듣고 살인을 했단 말이죠?”
김용국이 진땀을 바작바작 흘리고 있었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