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동호씨(오른쪽)는 ‘강인찬’의 증언으로 소설 <실미도>를 쓰게 됐다고 한다. 영화 <실미도>에서 강인찬 역은 배우 설경구씨가 맡았다. | ||
백씨는 “소설 <실미도>의 주인공 ‘강인찬’은 아직도 살아있고 그의 증언으로 소설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금고털이로 전과 8범에 15년간 전국의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한 백씨는 80년대 말 소설 속 모델 ‘강인찬’을 한 교도소에서 만났고 실미도 사건의 진상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백씨는 “‘강인찬’은 사건 이후 결혼도 하고 지금은 손주까지 두고 평범하게 살고 있다”며 “99년 <실미도> 출간 이후 또 다른 생존대원 1명이 연락을 해와 만났다”고 말했다. 백씨에 따르면 생존대원들의 제보와 당시 군 수사기관의 기록, 언론보도, 목격자들의 진술에 의해 당시 실미도를 탈출한 684부대원 중 무리를 이탈한 훈련대원이 최소 2명에서 최대 5명까지 있다는 것.
백씨의 주장을 정리하면 이렇다. 24명의 실미도 훈련대원들은 사건 발생 이틀 전부터 실미도를 탈출하면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을 만나자”는 강경파와 “개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인천에 상륙해 뿔뿔이 흩어지자”는 현실파 간의 의견대립이 있었다. 이때 ‘강인찬’은 현실파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파도 살기등등한 강경파의 주장에 따르게 됐다.
작전을 세운 훈련대원들은 71년 8월23일 새벽 6시 자신들을 지키던 기간병을 기습, 교육대장을 포함해 12명을 사살했다. ‘피의 살육제’를 마친 후 훈련대원 이영수가 끝까지 강경파의 청와대행을 반대하자 동료 훈련대원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렇게 해서 훈련대원은 모두 23명.
이후 낮 12시10분경 훈련대원들은 실미도를 탈출, 인천 송도해안에 상륙했다. 이때 해안초소 근무병인 당시 김형운 일병이 훈련대원들을 발견하고 “얼룩무늬 군복에 검은 베레모를 쓴 신원불상의 군인들 출현”이라고 상급부대에 상황보고를 했다. 상급부대에서 “소속과 작전임무를 확인하라”는 명령을 받은 김형운 일병은 실미도 훈련대원들에게 “특수부대의 해상침투 작전”이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상급부대에 보고했다. 이때 김형운 일병이 보고한 군인의 수가 21명이었다. 여기서 2명의 훈련대원이 빠지게 된다. 백씨는 “실미도에서 인천으로 상륙하는 과정에서 훈련 대원 2명이 무리를 이탈해 도주했고 그 2명 중 한 명이 내가 만난 ‘강인찬’이었다”고 전했다. 사건 당일 오후 3시경 대간첩대책본부가 “서울 침투를 기도한 무장공비 21명을 군경이 저지했다”고 발표했다가 당일 오후 6시30분경 당시 정래혁 국방부장관이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 공군 관리 하에 수용중이던 특수범 23명이 고도(孤島) 격리수용에 불만을 품고 난동했다”고 정정 발표한데서 백씨의 생존설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진입한 훈련대원들은 군경과 2차례 교전을 벌이고 오후 2시15분경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앞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춰 섰다. 그리고 이들 중 4명이 부상당하고 나머지는 현장에서 사살되거나 자폭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씨는 “사건 직후 국방부가 훈련대원 20구(부상자 4명 제외, 부상자는 후에 사형집행)의 시신을 실미도 기간병 등을 통해 확인했다고 또 다시 정정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시신 확인자가 3구의 시신은 목부분이 없는 상태여서 폭발에 의한 시신손상으로 보기 어렵다고 진술한 바 있다”며 시신의 숫자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즉, 목 없는 시신 3구는 실미도 사건과 전혀 상관없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백씨는 실미도 훈련대원 중 적어도 2명, 최대 5명 정도가 무리를 이탈해 생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백씨는 “훈련대원들이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하기 전 인천 옥고개 동네에서 떡을 사 먹었다. 이때 훈련대원들이 숲에서 숨어 떡을 나누어 먹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1~2명의 훈련대원의 탈주가 가능했다. 또 탈취버스가 대방동 유한양행 앞 가로수에 부딪쳐 멈춘 후 10분 남짓 후 군경이 현장에 도착했다. 이 10분 정도의 시간도 훈련대원 1~2명이 탈주하기에 적당한 기회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백씨는 그 외에도 훈련대원 생존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실미도 사건 발생 다음 날 주요 일간지의 신문보도 내용을 꼽았다. 백씨에 따르면 71년 8월24일 한 일간지는 “23일(실미도 난동사건 당일) 밤11시30분경 인천 송도해수욕장 부근 민가에 한 군인이 권총을 들이대며 ‘밥 달라’고 말하고 5분후 사라졌다. 군 특수범(실미도 훈련대원)과 똑같은 차림”이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백씨의 이런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생존 훈련대원 ‘강인찬’이 결혼까지 해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이에 대해 백씨는 “사건이 있던 70년대는 지금과 달리 주민등록과 호적 관리가 허술했다. 또 전쟁고아 등으로 무적자가 부지기수였다. 일례로 당시 재소자가 출소하면 법무부 산하 갱생보호소는 재소자들을 잠시 보호하며 호적을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며 “‘강인찬’도 그런 경우”라고 설명했다. 또한 백씨는 “‘강인찬’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데에 상당한 부담을 느낀다. 그리고 당시 사망한 동료대원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많이 가지고 있어 섣불리 자신을 공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백씨의 주장대로 실미도 사건의 훈련대원 생존설은 규명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