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월12일 새벽 4시. 나는 어둠이 짙은 창밖을 바라보면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하얀 모니터 안에 커서가 깜박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변호사인 내가 회장부인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날이었다. 어떤 걸 물어도 그녀는 머릿속에 입력된 시나리오 이외에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위기가 되면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것이다. 왜 모두들 밤새 생각한 꾀가 죽을 꾀인 줄을 모를까. 잡히지만 않으면 살인을 해도 괜찮다는 의식이었다. 걸려도 증거만 없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법정은 잔꾀와 술수의 게임장이 되곤 했다. 오히려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이 배신자가 됐다. ‘사람들은 거짓말 할 권리가 있다’라는 권리장전이라도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모니터에 회장부인에게 물을 사항들을 하나하나 써 나갔다. 나는 정직하게 묻고 그녀는 마음대로 거짓말하고, 각자 자유다. 며칠 전 사형장에 다녀온 검사 한 사람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내게 얘기했다. 죽기 직전까지도 거짓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는 인간존재의 본질에 대해 회의를 느낀다고 했었다.
오전 10시30분 고등법원 304호 법정. 법정의 공기는 항상 답답하다. 악한 기들이 차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회장부인이 도끼눈을 뜨고 표독스럽게 나를 보고 있었다. 발톱을 날카롭게 세운 그녀에게서 맹수의 인광이 내게 날아왔다. 불편했다. 하지만 나의 운명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조카 김용국 부부가 댁에 자주 오는 편이었나요?”
내가 부드럽게 물었다. 신경을 곤두세웠던 회장부인이 갑자기 탐색하는 얼굴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타일렀다.
“매번 단답식으로 검사나 변호사들이 묻는 바람에 내가 제대로 말을 못해왔어요. 저 사실은 말이죠, IMF로 집까지 날린 오빠 내외가 불쌍해서 몇 달 동안 우리 집에 와 있게도 했어요. 그 오빠 아들이 용국이죠.”
그녀는 머리가 비상하게 돌고 있었다. 내가 또 물었다.
“김용국 내외는 말이죠, 회장부인인 고모님 댁은 어려워서 자기네가 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고 나한테 말하던데 어떻습니까?”
“에이, 그런 건 없어요.”
회장부인이 이빨을 살짝 보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들어보니까 그동안 주위의 친척이나 친정을 잘 도와주셨다고 법정에서 말씀을 하시던데 사실입니까?”
난 그녀에게 유리한 것만 묻고 있었다.
“그렇게 말했죠.”
경계하던 회장부인의 눈이 순간 깔보는 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감을 가지고 말을 계속했다.
“저는 오빠 내외가 힘들어 할 때 불러서 같이 살기도 하고 옆에 있는 그 아들인 용국이 내외도 기사로 썼죠.”
회장부인이 생색을 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조카 김용국 내외가 집을 사는 데 돈도 8천만원인가 거액을 도와주셨다면서요? 지난번 법정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죠?”
수사기록에 그건 살인청부자금의 중도금으로 되어 있었다.
“그렇죠.”
경계의 빛이 거의 사라졌다.
“참 따뜻하신 고모네요. 참,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15년 전 친조카 김용국이 결혼할 때 결혼식장에 가셨습니까?”
회장부인은 가지 않았다. 회장부인이 움찔했다.
“용국이가 결혼식 때 내가 지방에 살고 있었어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느냐면….”
그녀가 즉석변명을 만들고 있었다. 난 어조를 조금 높였다.
“먼저 가셨나 안 가셨나 그걸 대답해 주시고 불가피한 사정을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모르겠네요.”
그녀는 네 질문의 저의를 안다는 표정을 지으며 빠져나갔다. 그녀의 교활한 성격의 일단이 대화를 통해 노출됐다.
“조카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다는데 이번의 그것 말고 조카 김용국이 결혼식 이후 이 사건 무렵까지 15년 동안 경제적으로 몇 번 정도 도와주셨나요?”
살인청부자금을 주기 전에는 한 번도 없었다는 게 수사기록이었다. 회장부인은 의도를 알아채고 동문서답으로 나갔다.
“하여튼 액수는 정확하지 않은데 8천만원쯤인가 줬는데 그 날짜는 기억 못해요.”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나를 느낄 수 있었다. 신문을 계속했다.
“그건 이번 살인사건 중간시점에 처음 주신 돈이고 그 이전 조카가 지하 단칸방에서 어렵게 살아갈 때 도와주신 적이 있어요?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던데.”
“그래요. 그 사이에 도와준 건 없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녀가 발끈하면서 나를 혼내려고 시작했다.
“됐습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내가 그녀의 말을 막았다.
“아니에요. 그냥 넘어가지 마세요. 여보세요, 왜 나는 말을 못하게 하죠? 난 단답식으로 ‘예, 아니요’ 하는 대답을 못하겠다고 했잖아요?”
그녀가 독 오른 눈으로 나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좋습니다. 그러면 하시죠.”
내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녀는 마음의 평정을 잃고 있었다. 그럴 때 자연스러운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순간 재판장이 끼어들었다.
“이보세요, 김귀숙 피고인! 변호인이 묻는 말에만 대답하세요.”
회장부인이 재판장의 눈치를 보고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흔들리는 마음의 파문이 나와야 하는데 실패했다.
“왜 살인사건이 터진 시점 전후에야 비로소 주택자금 8천만원을 주셨을까요? 그 전에는 보증금 1천만원을 조카 김용국 내외가 꾸러 갔을 때도 야멸차게 거절하셨다면서요.”
“여보세요, 1천만원이 아니라 3천만원이었어요.”
그녀가 흥분하며 외쳤다. 그녀의 담당 변호사는 부탁을 거절당한 김용국이 살인부탁을 들을 리가 있느냐는 식으로 다그쳤다. 난 그 반대방향으로 묻고 있었다. 내가 다시 물었다.
“참, 처음 법정에서는 김용국이가 협박을 해서 8천만원을 주셨다고 했었죠? 왜 주신 돈이 협박으로 빼앗긴 돈도 됐다가 사랑하는 조카 집 사는 데 준 돈도 됐다가 순간순간 바뀌죠?”
내가 물었다. 난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계속했다.
“김용국이 외국으로 도망을 친 후 지방도시에서 몰래 그의 처를 만나신 적이 있죠?”
“만났어요. 왜요?”
“수사기록을 보면 그때 차가 흔들리도록 싸웠다고 하던데….”
“그때 조카며느리가 버릇없게 굴어서 따귀를 한 대 올렸죠.”
“그때 조카며느리가 우리 남편 그렇게 만들어 놓고 어떻게 할 거냐고 따졌다면서요? 그리고 같이 경찰서로 가자고 했죠?”
“아니에요. 그때 저년이 경찰 앞잡이가 돼서 나한테 온 거예요. 자기 남편을 빼달라구요. 내가 직접 마기룡에게 살인교사를 한 것으로 해 주면 자기 남편은 3년 6개월만 살면 되니까 그렇게 해 달라는 것이었어요.”
방청석 뒤에서 김용국의 처가 미동도 없이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회장부인의 입가에서 허연 거품이 튀어나왔다.
“지금 그런 말을 듣는 조카며느리가 본 변호인에게 하는 말이 그 며칠 후 친척을 보내 총대를 메주면 50억원을 주겠다고 하셨다면서요?”
내가 정곡을 찔렀다.
“천만에 그런 소리 하지 마쇼. 저것들이 돈 때문에 나를 이렇게 만드는 거예요. 50억이 아니라 5억만 줘도 저것들은 나가떨어지게 돼 있다니까.”
방청석 뒤에서 김용국의 처가 무서운 눈으로 회장부인을 보고 있었다. 점심시간이었다. 재판장과 배석판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회장부인이 씩씩거리며 내게 경고했다.
“당신,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 생각해 보니까 조금 전에 내가 이리저리 휘둘린 것 같아. 그렇게 하면 못써.”
이미 그건 어떤 또 다른 협박이었다. 나는 조금 능글스러울 필요가 있었다.
“알았습니다. 잘못했어요. 전 죽고 싶지 않아요. 그렇지만 어떻게 합니까? 변호사가 직업인데 물을 건 물어야죠.”
법정을 나와 사무실 쪽으로 향하는 데 김용국의 처가 따라왔다. 그녀는 걱정이 가득한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회장부인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감옥에서 나올 여자입니다. 그렇게 석방되면 나를 꼭 죽일 거예요. 난 괜찮아요. 변호사님도 조심하세요.”
모골이 송연했다. 직업적 일인데도 사건마다 저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는 날까지 살면서 내 일을 하는 것이다.
오후 재판이 시작됐다. 푸른빛이 도는 회색 양복을 입은 자그마한 남자가 증언석에 올랐다. 안경 뒤로 선한 눈이 보이는 회사원 타입의 사십대 남자였다. 그는 살인범 마기룡의 선처를 위해 스스로 증언석에 올랐다. 세상이 모두 살인범 마기룡을 흉측하게 봐도 또 그렇게 인정을 베푸는 사람도 있었다.
“마기룡과는 어떤 사입니까?”
재판장이 물었다.
“사회친구입니다. 제가 마기룡의 총을 보관해줬다가 구속됐었습니다. 집행유예로 풀려나온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부탁한다고 살인에 사용한 총을 보관해 줍니까? 증인은 마기룡을 어떻게 봅니까?”
“제 시각에서는 마기룡은 사람이 여리고 착합니다. 저는 저 친구가 좋아 면회도 두 번 갔습니다. 거짓말을 하거나 의리를 저버리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제가 야채납품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마기룡은 틈이 있으면 제 야채장사를 진심으로 도와줬습니다.”
질퍽거리는 쓰레기통에서 갑자기 한 송이 꽃을 보는 느낌이었다. 수많은 범죄 속에서도 한번 베푼 마기룡의 따뜻한 마음이 그 결실을 맺은 것이다. 난 그를 다시 보게 됐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엄상익 변호사